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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SM Academy) 원문보기 글쓴이: 답사회장 (김신묵)
국보 제29호 - 공식명칭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 지 정 일 : 1962.12.20 - 시대 : 통일신라
- 주소 :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
신라 제일의 문화유산
성덕대왕신종이 가진 포스를 표현하기에 말과 글이 부족하다. 1,250년전에 만든 가장 큰 종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만들어진 경위나 남아있는 지금의 존재가치, 신라가 패망하고 난 후 천덕꾸러기로 돌았음에도 훼손되지 않은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그 숱한 전화(戰禍) 한번 입지 않고 오롯이 우리 곁에 남아있는 성덕대왕 신종.
범종 그 자체만으로도 명불허전임에야 칭송이 부족할 지경이지만, 하나하나에 깃든 조각과 새김, 예술성과 과학기술의 놀라움, 천여자에 이르는 문장이 전해주는 멧세지와 역사, 전설로 전해오는 스토리 텔링까지 더해지면 가히 신라제일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요즘말로 보물과 국보를 통털어 종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鍾), 범종(梵鍾)
종(鍾)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르는데 이 범종은 부처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던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쓸때 '쇠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종(鐘)을 쓴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지칭할때는 이렇게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때는 '무거울 중(重)'자가 붙은 종(鍾)자를 쓰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종에 새겨진 글씨가 기록에 종(鍾)자를 썼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전시중인데 국적불명의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비난이 드세다.
타종 또한 금지된채 가끔씩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준다. 최근 복원계획이 발표된적이 있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의 구조와 명칭
성덕대왕 신종은 높이 3. 75m, 둥근 입지름이 2.27m, 무게가 19톤이다. 매달린 신종 앞에 서면 뿜어져 나오는 포스에 압도된다.
종을 매다는 윗부분을 용뉴(龍紐, 종뉴鍾紐라고도 함)라고 하는데 단순한 고리가 아니라 용(龍)모양을 새겨 예술성이 뛰어나며 그 옆에는 수직으로 솟은 관이 하나 보이는데 음향을 조절하는 음관(音管, 음통音筒이라고도 함)이다. 중국이나 일본종에는 없다.
둥근 모양의 종은 위, 아래에 띠를 둘러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기는 각각 상대, 하대라고 하며, 상대 바로 아래에는 같은 무늬를 두른 4개의 유곽(乳廓, 연곽蓮廓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유곽내에는 각각 9개씩 총36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하필 왜 젖꼭지(유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종의 몸통 중앙에는 2곳의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분)와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고, 그 사이에 여러 줄의 글을 새겼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무늬를 새긴 띠에 연화문 8개가 중간에 들어갔다.
<성덕대왕신종의 세부설명>
<용뉴와 음통, 용뉴는 종을 매다는 곳인데 일본 종이나 중국 종에는 없고 한국 종에만 있다.
일설에는 龍의 아홉아들중 셋째 포뢰(浦牢)는 울기를 좋아하여 종에 새긴다고 하며, 용뉴가 바로 그것인데 포뢰는 특히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가 다가오기만 하면 놀라서 큰 소리를 지르니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모양으로 하기도 한다고 한다.>
<상대, 보상화문 무늬를 새긴 띠를 둘렀고 그 바로 아래에 같은 무늬띠로 네모를 만들고 아홉개의 꼭지를 붙였다.
이러한 유곽이 모두 네곳이나 유두는 36개이다. 탁본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상단을 탁본한것이다. 상대와 2개의 유곽안에 각각 9개씩의 유두가 보인다. 보상화무늬가 화려하다.>
<몸통 중앙에는 종을 치는 자리, 즉 당좌를 양쪽으로 두곳에 연꽃으로 표시하였고, 그 좌우로 비천상이 보인다.>
<당좌의 연화문 탁본>
<또한 신종의 앞면과 뒷면 두곳에는 긴문장을 글을 적었는데 2개의 비천상이 좌우로 균형잡혀 새겨졌다.>
<좌우로 비천상의 모습과 중앙에는 긴 문장을 새겨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들게 된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 그리고 신종의 소리로서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는 내용등을 담았다. 모두 1,000자가 넘는 긴 내용을 앞, 뒷면에 나누어 새겼는데 뒷면에는 찬시와 종을 만든이들의 직책과 이름, 신종 소리에 대한 찬사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천상 탁본, 마주보는 2구의 비천상은 양옆에 새겨져 모두 4구이다.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으로서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으로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이다.>
<하대 역시 상대와 같은 무늬띠를 둘렀는데, 중간에 8개의 연화문을 집어넣어 단조로움을 피하였다.
또한 연화문 아랫부분은 그냥 일자로 처리하지 않고 뾰족한 마름모꼴 꼭지 모양을 만들었고 그 윗쪽 무늬띠는 접어 넣었다.>
<하대의 무늬띠 탁본, 그 위로 글자를 양각한 모습과 좌우로 비천상의 일부가 보인다.>
이처럼 월등하게 우수한 성덕대왕 신종의 예술성, 작품성은 물론 현대에서도 재조(再造)가 어렵다는 작업공정에 있어서의 과학과 고난이도의 기술등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무려 27톤이나 되는 쇳물을 붓고 이를 작업하여 저 거대한 범종을 만들어낼 시설과 능력, 자본과 기술이 1,300년전에도 가능했다니 그저 놀라울뿐이다.
종 안쪽을 밑에서부터 들여다보면 쇳물 처리한 거친 표면들이 보인다는데 이는 마감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종소리가 부처님의 목소리에 가까운 장엄한 소리가 나면서도 여운이 부드럽게 오래오래 멀리멀리 가는 신비한 소리를 내려는 장인의 배려라고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종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올려다 볼 수는 없다.
성덕대왕신종 수난사
전설에 의하면, 성덕대왕 신종의 네배가 넘는 대종이 황룡사에 있었는데 고려때 침략한 몽고군이 이를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일단 배에 싣고 감은사지 앞쪽 하천으로 실어날라 바닷길로 옮기려다가 그만 문무왕의 화신 호국용이 배를 뒤집어 침몰시키니 그 대종은 하천에 빠졌거나 가까운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후로 풍랑이 심하면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감은사지 앞 하천을 대종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크고 완벽한 보물들은 전쟁은 물론 도난과 약탈등에 시달려 보존이 쉽지 않기 마련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771년 혜공왕때 주조되어 처음 봉덕사에 매달렸는데 그래서 ‘봉덕사종’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폐허로 변한 봉덕사에 신종을 방치 할 수 없어 1460년(세조 6년) 영묘사에 새로 종각을 지어 옮겼다고 한다. 조선초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종소리가 백 리 밖 까지 들렸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다시 1507년(중종2) 경주 남문 밖 봉황대 아래로 옮겼는데 군사 징집 이외에 성문의 개폐시 타종하기 위해서였다. 국보급 범종이 성문개폐 신호도구로 전락한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그때는 종각을 잘 지었다니 다행이며, 일제강점기인 1915년 다시 읍성 내아 자리에 있던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겼는데 지금의 경주문화원 경내 종각이 그곳이다. 이후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콘크리트 종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콘크리트 종각에 대한 불만이다. 우리나라의 국보 범종을 국적불명의 콘크리트 건물에 걸어 놓으니 이 어찌 경우가 바른 일이라고 하겠는가? 그것마저도 건물하중과 범종 중량에 문제가 있는지 매달려 있어야 할 종이 커다란 목재 몇개를 고여서 그 위에 얹어 놓은 모양새는 참으로 볼성 사납기 그지 없다.
원컨대 한국식 종각이나 종루를 멋지게 지어 격에 맞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박물관 자리에 새로 짓거나 원래 종이 달려 있었다는 봉덕사를 복원하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외국인들에게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국보 범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뿐만아니라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타종을 금지하고 관람객들에게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는 치졸함도 재검토하여 정밀측정을 통한 가부를 가리고 난 후 가능하다면 타종의 계속 되어야한다고 본다. 종이 울려야 종이지 않은가? 도저히 불가하다면 신종(新鍾)을 조속히 만들어서라도 타종이 가능한 역할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경주 박물관으로 옮기기 전의 종각모습, 경주고적회 자료사진>
<지금의 성덕대왕신종 모습(오른쪽), 목재 몇개를 크게 잘라 그 위에 종을 얹어 놓았다. 왼쪽의 문화재청 홍보사진은 매달려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 패망후 황폐해진 서라벌에 남아 용케도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과 고려왕조를 거치는 천년동안 수많은 병화(兵禍)와 화재, 자연재난등을 겪었을텐데 용케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감사한 일이다.
더구나 최근들어 과학기술의 발전등으로 새겨진 글자를 식별, 해석하거나 안, 팎으로의 결함과 덧칠, 쇳물 내부의 모양까지도 관찰이 가능하고 동일한 신종(新鍾)을 복원차원에서 주조해 낼수도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복원 소식의 결과가 기다려진다.
< 계 속 >
첫댓글 계속 열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