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5장 7-17절
설교제목 : 횃불의 약속
내면의 불꽃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처서가 지났지만, 여름의 열기는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무더위와 확산되는 코로나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제가 허리가 아픈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분주함이 조금씩 몰려오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처리하고, 짜여진 일상 안에서 적응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한가로움’이란 단어는 사치처럼 들립니다. 바쁜 시간표에 길들여지고, 적응해야하는 우리는 자신 앞에 놓인 아름다운 것들을 무심히 지나치고 조금은 허허로이 머물기가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합니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입니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해집니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김기석, “사유와 성찰,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다”, 경향신문, 2024. 5.16].
이런 향유와 사용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내면의 불꽃입니다. 내면의 불꽃의 유무에 따라서, 자아의 어둠 속에 가려진 혼란과 교란된 내용들을 오롯이 자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자신을 알아차리고 구별할 수 있는 내면의 불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체로 세우는 약속
아브람은 근동의 막강한 세력이었던 네 왕들에게 포로로 끌려간 조카 롯을 구하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명성도 부도 얻었지만,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다마스쿠스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네 씨에게 날 자만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고 별을 세어보라고 하시면서 좁은 자아의 세계를 넓혀서 하늘의 세계를 조망하게 합니다.
그런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땅을 주어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브람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이렇게 질문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에서 확정된 약속을 주체적으로 하길 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주님은 아브람에게 희생제물을 요구하시고 아브람과 계약을 맺자고 제안하셨습니다.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것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당한 댓가를 지불하라는 의미이고, 이런 희생 제사를 통하여 아브람을 계약의 당사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평등하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체결되는 것이고, 계약에 서로가 종속되기 위해서는 책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희생제물을 요구하고, 계약을 맺는 것은 아브람을 책임의 주체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제는 안락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는 은혜만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책임적 주체로 서는 것입니다. 계약은 계약당사자들이 책임적 주체로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기의 이혼재판으로 불리는 모 그룹회장의 이혼소송에서 재판의 판결문에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가정 파탄의 책임이 있기에 전처에게 두 사람이 20억씩을 지불하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혼이란 그런 책임적 주체가 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갈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남성이 결혼을 하고도 자신의 이전 총각의 삶을 벗어내지 못하고 책임적으로 가정을 짊어지지 못하면 사랑으로 맺은 결혼의 계약은 파탄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아브람의 관계는 정신적으로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갈 때 무의식은 의식으로 하여금 더 많은 책임감의 무게를 짐지우고, 의식 자체를 책임적 주체로 세우려 합니다. 이를 개성화과정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희생제물을 드릴 만큼 아브람은 자신의 충동과 화해하고,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의 리비도를 드릴 책임적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정신적 에너지 혹은 충동을 하나님께 드릴 정도로 책임적 주체로 성숙할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쫓아야 할 솔개
하나님은 암송아지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희생제물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희생제물을 가져와 몸통 가운데를 쪼갭니다. 이 동물의 몸통을 쪼개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동맹을 체결하고 난 후,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행했던 보편적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피와 고통, 죽음 앞에서 맺은 계약은 죽음을 각오하는 의미가 있고, 한 몸을 쪼개는 것은 계약의 두 당사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비둘기가 작아서 쪼개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고, 비둘기가 결코 나눌 수 없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낸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새는 통째로 불에 태우도록 규정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솔개들이 날아와 희생제물을 쪼아먹으려 했기 때문에 아브람은 솔개를 쫓았습니다. 솔개는 아브람의 열정과 희생을 담은 희생제물을 쪼아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망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성한 것 혹은 어떤 결정적인 것과 연결되고, 견고한 상태로 가려할 때 그 관계와 약속을 위협하는 솔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솔개는 정신적으로 혼란하게 하는 부정적인 직관과 사고의 형태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쪼아대는 파괴적인 사고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것이 성사되기에 앞서서 그 약속과 결실을 훼방하며 침투하는 병적 사고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솔개들을 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인간의 약속은 성사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솔개들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부정적인 사고관념이나, 병적이고 의심하며 불길한 직관 속에서 더 발전된 국면을 훼방하는 솔개를 잘 쫓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횃불의 약속
솔개를 쫓고 해질 때에 아브람은 깊은 잠을 잡니다. 그런데 그 깊은 잠 속에서 큰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이것은 꿈 속에서 경험하는 어둠과 방향상실, 두려움의 상황을 대단히 밀도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잠 속에서 이런 어둠은 무의식의 심연을 표상하며, 새로운 계시와 전환의 전조 현상일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짓눌렸을 때, 그때 주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알고 또 알라는 강조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겪게 될 나그네로 살다가 종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고, 그 종살이하게 한 나라를 반드시 벌할 것이고, 그 다음에 네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집트에서의 노예살이 400년의 시간입니다. 주님은 아브람에게 다가올 세대의 일을 예언하십니다. 꿈 속에서 다가올 시대를 말씀하시며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십니다. 사실 모든 꿈이나 환상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이자 다가올 내일의 전조가 암묵적으로 담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꿈이 당장 내일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꿈에서 우리의 삶의 이정표와 마음의 지도의 최종 그림을 이해할 수 있기에, 불확실한 삶의 국면에서 견고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은 잠 속에서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매일 잘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17절에는 해가 져서 어둠이 짙게 깔리는 시점을 다시 설정합니다. 아마 이것은 편집자의 정교한 삽입이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17절 장면은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연기나는 화덕(화로)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과의 계약이 체결됩니다. 여기에서 등장한 불을 담을 수 있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이미지는 신성한 불, 신현현의 특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횃불은 화로에서 타오르는 것일 수 있고, 그 화로에서 취해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신성의 속성은 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불은 신성한 리비도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누미노제적 특성을 지닌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변형시키며 강력한 에너지를 추동시킵니다. 정신 에너지로서 불은 “특수하고 역동적인 정신의 현상 안에서 본능, 소망, 의지, 정동, 집중력, 작업능력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불의 작업은 정신적으로 정신 안에 있는 불순물인 욕망과 분노, 정서적 충동성이 분리되고, 정화되고, 승화되며, 더 높은 단계로의 정신적 발전을 촉발시켜 변환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마가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그들을 변화시켰던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신성한 불은 희생제물이 아닌 이제 인간 개체 위에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임하여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신성한 의지와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소명 위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횃불의 약속이 있으신가요? 신성한 횃불을 통하여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화되고 새롭게 빚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횃불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 위에 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우리 삶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