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계기로 인종은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마침내 내시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 등과 의논하여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 상장군인 최탁(崔卓)·오탁(吳卓) 등과 함께 1126년 2월에 거사했다.
즉 오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궐내로 들어가 이자겸의 일파인 척준신(拓俊臣)·척순(拓純) 등 5, 6명을 살해했다. 이 급보에 접한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은 잠시 당황하다가 먼저 척준경이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앞으로 나오고 이어서 이자겸의 아들로 현화사(玄化寺)의 주지였던 의장이 승병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척준경이 중심이 되어 궁궐에 불지르고 반대파를 잡아 살상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인종은 난을 피하여 산호정(山呼亭)으로 갔으며, 신변에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서(書)를 보내 왕위를 넘겨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자겸은 양부의 의논이 두려워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종형제인 이수(李壽)의 반대로 그 서를 왕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자겸은 이씨가 왕권을 잡는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2차례나 왕을 독살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딸인 왕비가 인종을 도움으로써 실패했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를 떼놓음으로써 수습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李之彦)과 척준경의 노비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에 생긴 틈이 생기자, 왕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을 통해 척준경에게 교서(敎書)를 전해주었다. 교서내용은 척준경에게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이자겸을 제거해 큰 공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었으며, 이어 김부식(金富軾)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을 척준경에게 보내어 이자겸의 제거계획을 독촉했다. 이에 척준경은 무력을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귀양보냈다.
그리하여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가 폐비되었으며, 임원애(林元敱)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이어 척준경·이수·김향·최사전은 공신호와 관작을 받았고, 이자겸은 그해 12월 유배지인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그후 척준경은 공신으로서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나 사양하고 문하시랑의 직을 받아 잠시 동안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공을 믿고 지나치게 발호(跋扈)하다가 1127년(인종 5) 3월에 좌정언 정지상(鄭知常)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서 죽었다. 이로써 이·척에 의한 파문은 끝이 났으나, 이자겸의 난을 통해 당시 귀족들이 정권·왕권을 둘러싸고 상호간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움을 되풀이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자겸의 난으로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졌으며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궁궐이 모두 불탐으로써 귀족층의 분열·대립이 표면화되거나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되고 있었다.
즉 이·척이 제거된 이후 개경의 귀족세력 가운데서도 특히 김부식 형제(경주김씨)와 이수(경원이씨) 및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애(정안임씨)의 계열 등이 크게 부상했고, 한편 척준경을 탄핵하는 공로를 세운 정지상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묘청(妙淸)과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의 서경 출신 신진관료가 주요인물로 등장했다. 이후 서경천도를 주장하는 서경출신의 귀족과 이에 반대하는 개경 귀족의 충돌로 귀족세력 자체 내의 분열이 극심해졌다.
좋은 자료라 퍼 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