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12잡가는 언제 만들어졌나?
격동기의 노래, 잡가
잡가는 서민문화와 양반문화의 융합과정에서 생긴 노래로 양반문화와 서민문화의 경계가 모호하던 시기, 즉 계층간의 이동이 사회 경제적으로 일어난 사회구조적 변화의 시기에 태동되었다.
18, 19세기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던 격동기였다. 홍경래의 난(1811년), 진주민란(1862년), 임오군란(1882년) 등 수많은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으며 갑신정변(1884년), 노비세습제 폐지(1886년), 이화학당 설립(1886년), 갑오경장(1894년) 등 조선사회를 개혁시키려는 변화의 바람이 크게 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만들어진 노래 양식이 잡가라 할 수 있다.
잡가에 속하는 노래가 문헌에 실린 것은 1863년의 '남훈태평가'라는 가집(歌集). 이 노래책에는 12가사 중 '백구사', '매화가' '춘면곡', '성사별곡', '처사가', '어부사'의 6곡과 경기12잡가 중 '소춘향가'가 실려 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나온 대중적 가집들에는 '유산가'나 '집장가', '평양가'등이 등장한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를 참고해 보면 잡가의 세 명인이라 할 수 있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의 활약을 1820년대부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기12잡가는 잡가라는 노래의 큰 틀 속에 함께 있다. 경기12잡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잡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경기12잡가의 '잡가'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붙어 다닌다. 잡가(雜歌)라는 말 그대로 '잡스러운 노래', '잡다한 노래' 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글자의 풀이는 잡가에 대한 이해를 그르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보통 음악적 구조와 연주형태를 구별하기 위하여 별도의 장르로 구분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잡가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경기잡가, 서도잡가, 남도잡가로 나누는데, 경기잡가는 다시 산타령, 12잡가, 휘모리잡가로, 서도잡가는 산타령(입창), 좌창, 잡가(-난봉가, 개타령 등이 여기에 속한다.)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등을 잡가로 부른다. 상대적으로 잡가라는 명칭의 사용은 경기소리에서처럼 서도나 남도소리에서는 뚜렷이 구분하여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