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월인천강지곡
세종이 죽은 왕비 그리며 한글로 처음 쓴 시가집이죠
입력 : 2023.10.26 03:30 조선일보
월인천강지곡
▲ ①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돼 있는 월인천강지곡. ②경기도 여주에 있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 영릉(英陵) ③지난 5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종대왕자 태실 태 봉안 행차 재현 행사' 행렬이 세종대왕 동상 앞을 지나고 있어요. 조선 왕실 풍습에 따라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胎·태반이나 탯줄처럼 태아를 둘러싼 여러 조직)를 길지(吉地)에 가져가 묻는 행차예요. /문화재청·남강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이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 저작물 10권을 6년에 걸쳐 영어로 번역 출간했다고 해요. 세종대왕이 지은 한글 시가집 '월인천강지곡', 공덕이 높은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한국 고승전', 성철(1912~ 1993) 스님의 설법과 해설을 실은 '선문정로', 법정(1932~2010) 스님의 수필 50편을 선별한 '맑고 향기롭게' 등입니다. 이 중 월인천강지곡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이 지은 글이자 훈민정음 반포 직후 나온 책이라 더욱 주목받습니다.
아들이 쓴 책에 아버지가 노래 붙여
우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무슨 뜻인지부터 알아보죠. '월인천강의 노래[曲]'라는 말인데, '월인천강'이란 달[月]이 천강[千江=무수히 많은 강]에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입니다.
부처의 본체는 하나지만 무수히 많은 세계에 화신(化身·부처가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나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마치 달 하나가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얘기예요. 한마디로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라고 할 수 있죠. 뜻을 알고 나면 '월인천/강지곡'이 아닌 '월인/천강지/곡'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세종은 왜 이 노래를 지었을까요? 세종 28년인 1446년 왕비 소헌왕후가 이질에 걸려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종보다 두 살 연상이었고, 38년을 부부로 산 왕비였습니다. 숨진 곳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사저였는데, 큰 슬픔에 잠긴 수양대군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번역해 1447년 '석보상절'을 냈습니다.
그런데 '번역'이라고요? 무슨 글로 번역했다는 얘기일까요. 왕비가 별세한 해인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 바로 한글이었던 것입니다. 완성된 석보상절을 읽어본 세종은 크게 감동해 구절마다 그에 대한 찬가를 직접 지어 한글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월인천강지곡이죠.
비운의 가족사 겪은 세종의 왕비
조선 시대 최고 성군(聖君)으로 일컬으며 우리가 줄곧 '대왕'이라 부르는 세종의 왕비가 바로 소헌왕후 심씨입니다. 8남 2녀를 낳으면서도 세종이 숱한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훌륭히 내조했고, 자애로우면서도 왕실의 엄격한 기강을 잡은 중전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1426년 한양에 큰불이 났을 때 지방에 가 있던 왕과 세자를 대신해 만삭에 몸소 화재 진압을 지휘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숱한 아픔을 겪은 비운의 왕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왕비가 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태종 셋째 아들의 아내였죠. 그러나 남편의 큰형인 양녕대군이 온갖 비행으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뒤 남편인 세종이 1418년 임금이 되면서 왕비 자리에 올랐습니다. 친정 아버지 심온은 가장 높은 벼슬인 영의정이 됐죠.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태종은 4년 뒤 승하할 때까지 상왕 자리에서 정치에 개입했는데, 강상인이라는 신하가 군사 업무를 상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받게 됐습니다. 이 사건에 심온도 연루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가족은 노비가 되거나 귀양을 가야 했습니다. 왕비의 집안이 한순간 몰락하는 재앙이 닥친 것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걸까요? 태종이 셋째 아들인 세종을 왕위에 올린 뒤, 처가 세력의 힘에 휘둘릴 것을 우려해 왕비가 속한 심씨 가문을 정치적으로 몰락시켰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태종은 이미 처남들을 죽이는 등 자기 처가인 민씨 세력도 공격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때 소헌왕후도 '역적의 딸'로 몰려 한때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습니다. 태종이 '왕비는 놔두자'는 뜻을 밝혀 간신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하지만 왕비의 어머니가 노비로 살아가는 기막힌 상황이 한동안 계속됐고, 상왕 태종이 죽은 뒤에야 사면될 수 있었습니다.
며느리 복도 없었습니다. 첫째 세자빈은 지나치게 미신에 의존했다는 이유로, 둘째 세자빈은 남편인 세자(훗날 문종)가 아닌 다른 사람과 궁궐 안에서 연애했다는 등의 이유로 잇달아 쫓겨났습니다. 셋째 세자빈인 현덕왕후 권씨는 원손(아직 왕세손으로 책봉되지 않은 왕세자의 맏아들)인 아들(훗날 단종)을 낳은 다음 날 별세했습니다.
소헌왕후는 또 큰딸 정소공주,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이 때문에 병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차남 수양대군이 3남 안평대군과 6남 금성대군, 손자 단종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죠. '조선 최고의 왕비'의 가족사가 이처럼 불행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머나먼 저승에서라도 나를 생각해 주오"
소헌왕후를 기리기 위해 차남 수양대군이 쓴 석보상절, 그리고 세종이 그것을 보고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갓 세상에 나온 문자인 한글로 만들었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으로 조선 왕조의 창업을 기린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한글 시가로서 국문학사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가 정인지·안지·권제 등 신하들이 지은 것인 데 비해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손수 지은 것이고, 여기에는 '한글이 과연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적합한 문자인지'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월인천강지곡에는 또 한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은 아내 소헌왕후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녹여냈다는 것입니다. '만 리 밖 일이시나 눈에 보는가 여기소서'라는 월인천강지곡 구절은 '멀리 저승에서도 나를 생각하라'며 왕비에게 간절히 전하는 비밀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세종이 승하한 해는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지 3년 뒤인 1450년이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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