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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25) 그냥 믿어야 하나요?
문 : 저는 서른 살 청년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다니면서 길을 찾다가 성당에서 제 마음의 평안함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교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인도한 어른들은 “믿음은 의문을 가지려고 하거나 물음을 가지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며 “주님께서도 토마스 사도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된 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저 나름대로 이해하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이런 마음으로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는지요?
답 :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님의 생각은 아주 건강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보지 않고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토마스 사도가 그렇게 많은 가르침을 듣고 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을 품었기에 질책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구도자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구도자들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기에 형제님의 마음가짐은 바른 것입니다. 영성가들이 말하기를 믿음은 ‘해답’인 동시에 ‘물음’이라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물음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행복해지거나 혹은 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24시간 열려 있는 학교와도 같습니다. 이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과목들은 사랑, 용서, 행복, 상실, 두려움, 인내, 수용 등으로, 인간다워짐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나비가 누에를 벗고 날아오르듯이 우리 마음도 유아적 상태에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방랑자들입니다. 늘 떠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떠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방랑 수행자, 구도자가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떠나란 말은 아니고 마음이 진리를 찾아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성심리학자들은 방랑자의 원형은 인류 특유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없을 때 우리는 인간 특유의 모습을 상실하게 됩니다. 제 자리에 안주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퇴행하여서 고집스럽고 흉해져 갑니다. 방랑자들은 무언가를 배울 때 권위자들이 던지는 답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아웃 사이더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복종이나 경직된 도덕관은 길을 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영성심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새로운 도덕, 새로운 관념,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주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하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삶의 의미를 배우려 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가르쳐주는 대로 살게 되면 방어기제 중에서 ‘내사’라는 방어기제, 자기 자신에게 심리적 고문을 가하는 방어기제가 생겨서 기도는 많이 하는데 마음은 늘 우울하고 힘겨운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고문 게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물음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주님께서 내게 바라는 삶일까 하는 물음 - 그래야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의 의미가 다가옵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그의 시는 힘이 넘쳤다고 합니다.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내적 탐구를 하면서 삶의 활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회서의 지혜에 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집회 4,11-13).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29) 왜 죄인처럼 살아갈까요?
문 :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자매들이 있는데 이분들을 볼 때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죄인이라며 늘 우울한 얼굴로 지내는 것입니다. 칭찬을 해드려도 자기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분들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답 :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과소평가 되어온 과정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동물 취급하거나 단세포 생물이나 기계처럼 생각하는 등 인간 본성의 고귀한 가능성은 늘 과소평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시고, 심지어 수많은 생명을 돌보라고 큰 권한을 내리신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 중에 늘 주눅이 든 죄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적잖이 많습니다.
매슬로우는 사람은 본성으로 돌아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의지로 잠재력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신앙인인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은 한계를 모르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되는 초월적 순간 같은 절정 경험을 통해서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통합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초월 심리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사람은 추한 모습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고, 인간은 그럴 가능성이 높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하느님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그럼 왜 피어나질 못하고 시든 꽃처럼 추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가? 부정적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게, 어떤 사람은 안 좋게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은 부정적 고정관념끼리 부딪치면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정적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사람은 실제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자기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행동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우리가 좀더 밝은 세상을 보고 자신 안의 자원들을 찾아내고 싶다면 자신과 타인을 부정적으로 채색하는 고정관념을 제대로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서점가에 신념의 법칙을 통하여 자기 변화를 이루게 하려는 책들이 즐비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독서량이 부족해서? 아닙니다. 부정적 무의식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아서입니다. 부정적 무의식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긍정적 변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마치 집을 새로 지으려고 하면서 썩은 골조는 그대로 두고 벽에 색칠만 다시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변화를 원한다면 머릿속에서 논리게임을 하는 의식적 수준이 아닌 의식보다 무의식이 자기 행동에 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무의식 안의 부정적인 것을 해소, 정화하는 큰 작업을 벌여야 합니다.
인간은 두 가지 사고방식을 가지고 삽니다. 최적의 답을 찾는 수렴적 사고 이것은 안정 추구형 사고입니다. 다양한 해결책을 찾는 확산적 사고 이것은 변화 추구형입니다. 이 중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확산적 사고방식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 심리학자 길포드는 확산적 사고란 고정관념을 넘어가서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질문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생각의 방식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평소의 훈련으로 습관이 생긴다는 것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31) 내적 성장을 하려면?
문 : 저는 어떤 잘못을 하고 나면 깊이 생각하고 후회를 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착하다, 신중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데 정작 제 마음은 그리 편하지가 않고 내적인 성장도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저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요?
답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후회할 짓을 하고 나면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혹자는 자아 성찰의 시간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습관은 자아 성찰과는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앉아서 좋지 않은 생각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중추신경이 그런 생각을 현실로 인식해 태풍을 만난 배처럼 정신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집니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와 불행은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들 때 생겨납니다. 만약 사소한 일에만 집중하면 더 큰 시야를 갖지 못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삶의 통찰력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나친 행동 분석적 사고, 제한된 생각 같은 것들은 떨쳐 버리고 새로운 태도를 발전시켜 가면서 성장과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차분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잃어서는 안 되며 그 생각을 관리하는 사람이 자신이란 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회복력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떤 충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자신을 교정하는 정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억압적 환경에서도 정신력을 이용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인생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시각을 바꾸는 일은 인생에 대한 깊고 긍정적인 느낌을 사다리를 오르듯이 하나씩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이 침묵의 영성입니다. 참된 침묵 속에서 사람은 내적인 법칙과 연결이 되고 모든 힘은 정숙한 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힘이 무의식 속으로 숨어든 상태가 되어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적 성장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전능한 절대 법칙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기 위해서 침묵의 영성을 실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고귀해질수록 같은 생각의 소유자들과 연결 고리가 형성되고 결국은 자신을 스스로 돕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반대로 교활한 생각을 가지면 똑같이 주위에 교활한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사람을 속이려 할 것입니다. 자신이 침묵의 영성을 실행하는지 알려면 평온의 기도를 들으면서 얼마나 수긍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를 주시고,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침묵의 영성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헛된 짓을 자주 합니다. 혹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서 더 이상의 행동을 포기하고 수동적이 됩니다. 심지어 우울증, 불안, 신체적 질환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침묵의 영성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나쁜 일을 당하였을 때 처음에는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깊은 상처를 남긴 고통스러운 감정이 좋은 면으로 달라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정의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올바른 목적은 일시적으로 실패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모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르지 않은 것을 선택하면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며 당연히 실패하게 됩니다.
이런 정의의 흐름을 따라 살려면 침묵의 영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구약의 집회서에도 침묵을 강조합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지혜로워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이 너무 많아 미움을 받는 자도 있다. 대답할 줄 몰라서 침묵을 지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말할 때를 알고 있어서 침묵을 지키는 자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기다리며 침묵하지만, 허풍쟁이와 바보는 놓친다”(집회 20,5-7).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38) 성장한다는 것은?
문 : 성장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적 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내적 성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 성장은 발달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성숙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적인 성숙함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이란 창조 욕구를 표현하는 사람, 인격 내부의 긴장 상태를 재조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은 공포감으로 말미암아 고정된 행동양식에 자기를 묶어버리려는 사람, 동결시키려는 사람을 신경증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창조적이 되지 못하고 신경증적인 사람, 심리적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대상 욕구 (self object need)에 문제가 생겨서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보호자에게 그런 기능을 요구합니다. 아이들은 강력하고 튼튼한 부모와의 합병을 통하여 외부의 위험이나 곤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차츰 부모의 이런 기능을 내면화함으로써 혼자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면화가 실패하면 혼란, 막연한 불안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신경증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왜 문제인가? 왜 우리는 내적 성장을 해야 하는가? 왜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 상태로 살아가게 되면 심리적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노예 상태란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주관이 없이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병적인 순종을 하는 소위 ‘로봇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로봇 인간들은 평소에는 일사불란하게 살아가지만, 피라미드 구조의 상부가 붕괴되면 새롭게 살아갈 엄두도 못 내고 다 같이 죽는 혹은 다 같이 소멸하는 집단자살 증후군을 보입니다. 패전 시 집단자살한 일본군들, 집단자살을 하는 사교집단들이 바로 그런 경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개인에게 주신 창조성을 스스로 부인하고 집단이 주는 병적인 메시지를 계시처럼 여기고 자신을 포기하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인생을 살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신경증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이기에 종교나 국가는 개인이 창조적인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개인 역시 내면적인 신경증적 상태를 극복하고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창조성을 추구하면 신경증적인 상태가 자아를 점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부조화한 상태가 거대한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이건 사회이건 지도자들이 독재 성향을 가지면 개인들이 창조적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꺼려할 뿐만 아니라 우민화 정책을 통하여 국민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종교 같은 경우 공포스러운 교리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의식을 지옥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신자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적으로는 신경증적인 상태가 되어서 종교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교주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교집단이 사용하는 종교범죄 행위의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경우 우민화 정책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주입식 교육, 답이 정해진 교육을 시키는 것이고 계속해서 전쟁이나 혹은 재난에 대한 메시지를 주어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감이 창조성을 잡아먹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이 신경증적인 상태가 지속되면 사교집단 신자들처럼 집단자살 증후군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집단적인 감정 고조로 인하여 전쟁 가능성도 높아지기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55) ‘나쁜 사람들’이란
문 : 한동안 나쁜 남자란 말이 유행하다 사라졌는데, 요즘 다시 나쁜 사람이란 말이 어떤 정치인들의 말을 통해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요?
답 : 좋다, 나쁘다는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정치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면 좋은 사람, 마음에 안 들면 나쁜 사람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유아적인 판단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의 내적 수준이 ‘수준 이하’임을 보여줄 뿐이지요.
좋다, 나쁘다는 윤리적 평가가 비교적 객관성을 갖는 경우는 행위를 한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성숙한가와 연관이 깊습니다. 대체로 사람들로부터 ‘나쁘다’는 평가를 받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성숙도가 떨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상담 현장에서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중 하나는 가정 폭력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폭력을 당한 사람의 심리가 병적인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뜻입니다.
평소 자기 비난이 심한 사람은 스스로 자해적인 삶을 살아 자아가 피투성이입니다. 그런 상태이기에 상대방의 작은 비난에도 큰 상처를 받은 듯, 마치 상대방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생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상대는 그런 태도가 거슬려 의도치 않은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즉,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원인을 제공해 더 심한 폭력을 행하게 해서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은 희생자처럼 굴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가정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외면적인 것만 봐선 식별하기가 참 어려운 경우입니다. 누가 가해자요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해 행위를 한 사람만큼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해하도록 자극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론 매체들은 일단 드러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언론의 뭇매를 맞은 사람들은 물론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가중처벌이나 정서적 처벌을 당하는 불공평한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다중성 특히 분열성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나쁜 사람의 경우 스스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이들’입니다. 근래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인들이 뜬금없이 많아진 것이지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아메리카니즘의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마약사범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도록 한 필리핀 대통령 등 갑자기 등장한 자칭 정의의 사도들을 보면서 불안감이 올라옵니다. 1980년대 군부 독재자들이 갑자기 등장해 수많은 사람을 학대하고 학살했던 역사적 트라우마가 살아나고, 그 잔혹한 1980년대의 부활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면서 과거사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베는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해 사죄하지 않으며, 트럼프는 미국이 남미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죄 없이 남미인을 추방하려 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역시 가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마약사범들을 즉결 처분하려 하는 등 삶에 피곤한 사람들의 피곤한 분노를 자극하는 언동으로 그 사회의 해가 되는 해충 같은 존재를 척결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합니다. 한 마디로 신종 나쁜 사람입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피곤해 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기에 깊은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런 때 정말 나쁜 사람들이 활개친다는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2) 신앙생활의 무거움
Q. 대림 특강에서 한 강사분이 “성탄절이 가까웠으니 이 세상에 오시는 아기 예수를 우리 마음에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는 예전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 가르침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려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듣고 나서 ‘맞는 말이야’ 하는 생각은 드는데 왠지 자신이 없고 무거운 마음만 생깁니다. 성당에서 기도할 때는 마음이 편안하다가도 성당 밖에만 나가면 다시 세속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제가 신앙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요?
A. 형제님 고민은 사실 수많은 신자가 공통으로 하는 고민입니다. 그러니 나 혼자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일단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완전한 신앙인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존재입니다.
첫째, 사람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감성적 존재라서 완전한 신앙인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 마음 안의 감정들은 시도때도없이 튀어 올라와서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심지어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감정에 쉽게 휘둘림을 당하기에 완벽한 신앙인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에서는 마음이 평안한데 바깥에만 나오면 감정 절제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성당 안에는 내 감정을 자극하는 사람이 없어서이고, 밖에는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평생토록 예민한 감정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기에 마음이 불편할 때는 자책하지 마시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 하면서 자신을 달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나이를 먹으면 나아지지 않겠는가 하시는데 어릴 때는 어린 대로, 나이를 먹어서는 나이 먹은 대로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다르므로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 마음이 정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백안시하고 정신병자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평균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의 자아 역시 정신병자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콤플렉스 덩어리를 껴안고 살고 있고, 복잡한 욕구와 갈등이 엉킨 실타래처럼 뭉쳐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돌아버리겠네” 하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은 돌아버리기 직전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의 삶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하려면 엉킨 실타래 끝을 찾는 것처럼 자기 마음 안 덩어리의 실 끝을 찾아야 하는데 문제는 그 실 끝이 너무 작은데다 심지어는 엉킨 실타래 안에 숨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완벽한 신앙인의 마음을 만든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개과천선해 새롭게 변화하고픈 마음이 있지만, 달라지려고 하지 않는 마음도 도사리고 있어 힘이 듭니다. 이것을 ‘심리적 저항’이라고 하는데 이 상반된 욕구는 마치 힘이 비슷한 씨름 선수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우리 삶을 맴돌게 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앙인의 마음을 갖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은 의식 · 전의식 · 무의식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우리 말과 행동 그리고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의식입니다. 따라서 무의식을 그 밑바닥까지 알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무의식은 깊은 바닷속 같아서 믿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그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감정의 물결이 마치 쓰나미처럼 덮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기에 내 의지로 내 마음을 완전히 평안한 상태로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은 언제 풍랑이 닥칠지 모르는 바다를 헤쳐가는 배와 같습니다. 미국 정신의학자 스콧펙(1936~2005) 박사는 아주 단순한 표현으로 ‘삶은 어렵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럼 이런 힘겨운 삶 안에서 그래도 신앙인으로서 모양새를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하되 심리적 풍랑에 넘어졌을 때 풍랑에 시달리는 배를 탄 제자들처럼 해야 합니다. 즉, 주님 앞에서 약한 나를 인정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은총으로 바다가 조용해지고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에도 무슨 소리냐, 약한 나를 드러내는 게 실패자 모습이 아니냐 또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분들은 완전강박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으니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과 몸이 무너져 종교적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며 살지도 모릅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76)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문 : 본당 신부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처음엔 신자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산책을 할 때도 늘 손에 묵주를 들고 다니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전임 신부님은 신자들과 격의 없이 지내서 그런지 신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불평할 정도였는데 새로 오신 분은 아주 열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왠지 본당 분위기가 썰렁해져 갑니다. 신부님과 함께 지내던 분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분은 입버릇처럼 ‘나는 살아오면서 하늘 아래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었답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아주 냉정한 태도를 보입니다. 심하게 질책도 하고요. 신부님에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요?
답 : 형제님의 고민이 이해가 됩니다.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더군다나 지금까지 살면서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분을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는 분들이 가진 결정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지나치게 자부하는 분들은 죄의식이 적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면 철면피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런데 반사회적 성격장애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아주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도취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인 콤플렉스’ 혹은 ‘바리사이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기에 스스로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하느님께서 특별히 자신들만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별로 없는 이유는 우선 이들이 세상 경험 특히 가난하고 힘겨운 세상살이의 경험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돈을 벌어본 경험도 가난의 힘겨움도 겪어본 적이 없기에 마치 거울 너머로 세상을 보듯이 살아온 데다 온실 속의 꽃처럼 보호막 안에서 살았기에 공감능력이 부족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좁은 시야로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는 병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심리적으로 병적인 부분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너희는 죄를 짓고 살지만 나는 결백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 분열증적인 소인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 안의 어둠, 자신 안의 죄의 성향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심하게 투사하고 전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깨끗하고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모습은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를 넘나드는 비정상의 삶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인은 지나치지 않은 적당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면서 ‘나도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하며 비난을 자제하는 사람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지나친 죄의식은 신경증적 질병의 원인이 되지만, 적당한 죄의식은 인간미 따뜻한 정서를 만드는 근원지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런 죄의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독한 말을 자제하게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을 단죄하기에 앞서 그가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하느님께 대신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부끄러움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하이라이트1) 왜 화를 자주 낼까요 (상)
문 : 남편이 너무 자주 화를 냅니다. 집안일이건 회사 일이건 심지어 성당에서 단체활동을 하면서도 집에만 오면 화를 냅니다. 화를 내는 이유를 들어 보면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치게 자주 화를 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답 : ‘성격 안 좋다’ 혹은 ‘성질 더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 자주 화를 내고 예민하게 반응할 때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분노는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힘겨운 숙제입니다. 한 번에 풀 수도 없고 풀리지도 않는 어려운 숙제이지요.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불청객 같은 감정입니다. 어떤 종교에선 ‘분노는 마음의 독’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분노를 없애려 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항상 좋지 않은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없애 주고 긴장을 감소시킵니다. 분노는 대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오는 좌절감과 연관돼 있습니다. 그럴 때 분노를 표출하면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긴장을 푸는 일시적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또 분노 표출은 자기 안의 심리적 고통과 불안감, 병적 죄의식 같은 힘겨운 감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줍니다. 화를 내는 동안만큼은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분노 표현은 자기방어적 기능도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견딜만한가 보다 하면서 무관심해지거나 ‘건드려도 가만히 있네?’ 하면서 또다시 해코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분노 표출은 유용한 것인데 왜 좋지 않다고 하는가? 모든 분노 표출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분노 표출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레드포드와 버지니아 윌리엄스는 저서 「화가 부르는 것」에서 “적대적 신드롬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강도 높은 예민함, 자기방어라는 인식하에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을 자주 느끼고, 언어ㆍ실제적 태도에서 저돌적으로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이 적대감을 강화하며, 충동에 대한 자제력을 잃게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결국, 대처 능력을 상실해 다른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켜 스스로 소외당한다”고 밝혔습니다.
불이 모든 것을 태우듯 지속적인 분노는 인생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지나친 분노는 잘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평소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즉, ‘자애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고,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그런 마음이 가장 강합니다. 부모에게서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더 심합니다. 그러다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런 마음으로 살기 어렵다는 현실을 깨닫고 조금씩 자기를 포기해 가는 과정을 밟으며 어른이 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어른 행위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기만적 행위여서 마음 안의 적대감이 해소되지 못해 작은 일에도 화를 내면서 살기에 ‘좁쌀영감’이란 빈정거림을 듣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도 편하고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주님 가르침처럼 이웃 사랑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천 방법으로는 고통받고 가난한 이웃,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힘겹게 만든 원수 같은 이들을 위해 당장은 마음이 가지 않더라도 주님께 그들을 봉헌하고 잘 이끌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봉사 활동도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 안의 적개심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성격이 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홍성남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하이라이트2) 왜 화를 자주 낼까요 (하)
답 : 화를 다스리는 두 번째 방법은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 뜻대로 돼 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잘못되면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 삿대질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주님 뜻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도를 바치니 세상사가 다 내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청개구리 심보이지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기도가 이뤄지지 않으면 하느님께 화를 내거나 냉담하는 것입니다.
뉴스에 가끔 행복지수가 낮은 나라와 높은 나라를 비교하는 기사가 납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알고 마음을 내려놓은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 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안달복달 짜증을 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일이 잘 안 풀리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일수록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의탁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적개심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유치하고 이기적인 자기 마음을 달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선물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나에게 잘해 준다면 쌓였던 앙금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죽도록 미울 때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 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혹은 앞으로 받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미리 생각해 봐도 좋습니다. 어떤 본당 신부가 신자들이 속을 썩여도 늘 싱글벙글해서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화가 날 때마다 영명축일에 받은 선물을 생각하고 그래도 화가 나면 내년에 받을 선물까지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고 하더랍니다. 한 번 따라 해 보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는 미국의 뇌과학자 질 볼티 테일러 박사의 방법입니다. 테일러 박사의 실험에 의하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몸 안에서 맴돌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90초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화가 나면 온종일 가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질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한 번 화가 나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 동안 화가 안 풀어져 힘들어하곤 합니다. 그러나 90초 이상 지속하는 화는 첫 번째 주제가 아니라 연이어 떠오른 다른 생각들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가 났을 때는 딱 90초만 시간을 보내면 웬만한 화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방법은 화가 났을 때 훌륭한 음악, 그림 혹은 사진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울 때 엄마는 아이 눈앞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무엇인가를 보여 주면 아이들은 울음을 그칩니다. 마찬가지로 어른들 역시 마음은 어린아이이기에 화가 난 자기 마음 앞에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무엇인가를 놓아주면 순식간에 마음이 돌아서서 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르신은 화가 나면 금고를 열어 본다고 합니다. 금고 안의 돈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아주 편해진다는 것이지요. 돈 좋아하시는 분들은 따라 해 볼 만하지요.
마지막은 평소 즐겁게 노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대개 적개심이 많은 분은 잘 놀지 못합니다. 적개심이 의심을 만들고 사람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인데, 그럴수록 놀이판에 자주 끼어야 합니다. 물론 심한 돈놀이 판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낄낄거리고 놀 수 있는 놀이판이어야 합니다. 마음은 길들이기 나름이라 재미있는 놀이를 계속하면 ‘재미의 길’이 만들어져서 화통한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채근담에는 “거센 바람 성난 비에는 새들도 근심하고 갠 날씨 따뜻한 바람에는 초목도 기뻐한다. 가히 알지로다. 천지엔 하루도 온화한 기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마음에는 하루도 기쁜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내가 화를 내면 새도 개도 사람도 다 떠나 외로운 처지가 되고, 내 마음이 화창하면 모두 나에게로 오기 마련입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388) 가장 중요한 은총은?
문 : 상담을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신부님의 최근 글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지향하는 행복론이 전통적인 교리로의 회귀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 심리 치료와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상담 치료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가톨릭의 행복론은 전혀 다른 것인지요?
답 : 일반 상담론이 지향하는 행복론은 교회도 같은 의미로 지향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에 대해 강론하셨을 정도로 사람들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영성 심리에서는 사람이 지향하는 행복론을 좀더 차원을 달리해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찾는 행복은 행복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일상에서 좋은 결실을 얻고자 하는 행복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그런 행복만을 찾는 것은 신앙인의 성숙 단계에서 가장 낮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행복을 찾는 삶’이며, ‘주님은 오로지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만을 주시는 분’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주님과 신앙을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 때 쉽게 실망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이 마치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행복을 주는 사람인 양하는 사람은 한편으론 치유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람들을 취하게 하는 유혹자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기복신앙을 멀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보다 한 단계 위의 행복은 (자신의 허물에 대해) ‘부끄러움을 아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상담심리에서는 사람들의 자존감과 자신감의 회복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자존감을 회복시키려는 것은 영성론에서도 아주 중요시합니다. 문제는 자존감 회복이 치유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담 치료에서 직면 기법이 사용되듯이 신앙생활에서는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겸손함을 갖도록 권하는데, 이런 부끄러움을 갖는 것을 일반적인 행복보다 한 단계 높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복감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복감은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행복감입니다. 죄인 의식이 병적인 죄책감과 독성수치심을 유발한다는 상담론의 비판은 죄책감이 성령께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왔을 경우, 혹은 ‘내사’라는 방어기제로 인한 자기 고문 게임에서 오는 자학적 죄책감만을 보고 비판하는 것이지 죄인 의식의 전체성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성인은 기도 중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보는 은총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큰 죄인임에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주셨는지를 깨달으며 깊은 회개와 하느님께 대한 애정을 동시에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고 살아왔는지 마음 깊이 느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며 영적 행복감을 느꼈지요. 이 행복감은 다른 그 어떤 행복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행복감은 신앙인이 아니고선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의 입장, 일반적인 행복론에 머무는 사람들은 ‘죄인 의식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종교적 마조히즘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부 종교인들의 자학적인 신앙을 마치 열심히 하고 정통성을 가진 것처럼 주장해 그런 의구심을 더 하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죄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달라진 삶을 통해 그런 변태적인 신앙과는 다른 신앙생활이 있음을 삶으로 입증합니다.
이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관대함이라고 합니다. 관대함은 자신이 하느님께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하지요.
두 번째는 일상의 소소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은총으로 죄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주는 삶을 삽니다. 그 반대는 가짜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