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존재는 어디에나 나타난다>
당신은 아직 ‘어디에도 없는 존재’로 살아본 적이 없다. 당신은 주어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존재(有位凡夫)일 뿐이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지위와 역할, 신분과 위치를 갖지 않는 사람(소위 계급장을 떼고 천하를 횡행하는 자유인 즉, 無位眞人)으로 살아 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당신의 뇌에 저장된 기억이 자동적으로 알려준다(autographical recollecting of memory). 마치 인공지능 AI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 끌고 다니는 것과 같다. 당신은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일 뿐이다. 세상에선 그런 삶을 무난하게 산다, 그냥 그런대로 그럭저럭 산다, from hand to mouth 손으로 일해서 겨우 먹고 산다, day to day하루 하루를 산다는 등등, 일상적인 평균인의 삶이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이게 다라면 거의 자동인형이나 로보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이건 욕계의 축생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는 고귀한 삶을 허비하는 짓이요, 생명을 헛되이 소모하는 일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한 개의 신분, 한가지 역할, 한가지 위치에 붙박여 한 곳, 한 자리에서 언제나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산다는 건 거의 치욕스럽고 비열하면서 비참한 일이다. 누구인들 반복되는 일상적 평균인의 체바퀴에서 벗어나 툭 트인 無何有之鄕(무하유지향, 장자가 말한 ‘생사도 없고 시비도 없으며 인위적인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 또는 그런 마음 상태, 유토피아)에서 속 시원하게 숨 쉬며 살고 싶지 않겠는가? 경제가 발전하여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모두 그런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착각이요, 속임수였다. 첨단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며 대다수는 일터와 놀이터, 집과 직장에 갇혀서 사회경제체제(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 테두리 안에서 꼼지락거릴 뿐이다. 거기에 덧붙여 개인의 무의식 안에는 이미 사회문화적 제약(도덕과 법률, 관습과 이데올로기)가 내면화(super-ego, 아버지의 말)되어 있어 자기를 검열하고 자기를 한정한다. 그 결과 자기는 자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생동안 사회가 허용한 한 자리에 묶인 채 ‘먹고 산다’는 미명 아래 욕계의 종으로 산다. 어떻게 하면 욕계의 종이 아닌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에 임제선사(~867)가 말한다.
“여기 빨간 몸 덩어리(赤肉團, 맨 몸)안에 ‘자리에 매이지 않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여러분의 면문(面門, 감각기관)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똑똑히 보고 보아라.”
그때 한 승려가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입니까?”
임제가 선상(禪床)에서 내려오더니 그 승려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이르라, 이르라.”
잠시 후 그 승려가 무엇이라고 대답하자, 임제는 그를 밀치며 말했다.
“이 무슨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인가!”
자리에 매이지 않는 참사람은 어떤 자리로도 붙잡을 수 없다. 그는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비록 할 수 없이 어떤 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벌써 그 자리에 없다.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나타난다. 그는 삼계에서 벗어났으나 동시에 육도에 잠입하여 중생과 섞여 함께 살아간다. 그야말로 피모대각(被毛戴角, 털을 덮어쓰고 뿔을 단 소나 말이 되어 사람에게 봉사한다)이며 입전수수(入廛垂手, 저자거리에 들어가 손을 내민다)한다. 비록 그러하나 이 무슨 쉰 소리인가!
첫댓글 圓潭禪師는 글을 매우 잘 쓰시는 스님이다. 人文學的 소양도 無窮無盡하다.
글을 써라. 글은, 冊은, 내 運을 퍼트리는 最高의 道具이다.
글을 써 놓기만 해도 누군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책, 출판이 사향사업이라는 말이 나온지 오래지만, 여전히 글은, 책은 나름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으며, 어떤 유튜브, 온라인 매체가 따라가기 힘든 思惟의 깊이와 영향력을 꾸준히 발휘하고 있다.
단 한편의 좋은 글은 시간을 초월하여 늘 우리 곁에 백년 천년을 통과한다.
글은 바람처럼 허공을 헤매다가 누군가의 가슴으로 스며들게 되어 사람들은 깨운다.
세상의 平和와 꿈, 希望을 만드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단 세명이면 된다. 세명도 없으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가능하다.
그래서 깨어있는 賢者의 글은 이렇게 所重하고 貴重한 것이다.
이웃들에게 꿈과 希望을 준다는 건, 무한한 축복이고 '기쁨'이다. 그저 고맙다.
꿈이 없는데, 어떻게 人生을 펼치겠는가?
꿈을 기다리는 자에게 그 希望은 반듯이 찾아 올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마케팅하라.
부산 나마스떼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