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유배지를 찾아서 /이 명 철
유월에 소리 없이 밀려난 칠월초순도 마지막 날이다.
고창문학의 하계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하여 오늘 하루 휴가까지 낸 나는 내자와 같이 서둘러 출발하여 최초 약속장소인 터미널 옆 영호약국 앞에 갔었다. 의외로 우리 내외가 제일 먼저 왔었다.
작년에 용담댐수몰지구로 세미나를 갔을 때는 전주에 사는 문우들이 있어 상당히 많은 인원이었는데, 오늘은 18명의 인원으로 출발하였다.
오늘의 일정을 소개하였다.
“우리는 먼저 강진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를 보고, 허 준 선생의 유배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유적지, 순서로 관광을 하고, 문학세미나 강의는 이상인 회장님께서 맡아서 해주겠다.”는 등등이다.
우리가 탄 차는 칠월의 대자연(大自然)이 무성(茂盛)하게 어우러진 남도(南道) 땅에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며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아내도 그 동안에 文友부인들과 낯을 익힌 듯 자연스럽게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한다.
월출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월출산 바위들이 각가지 형상으로 모습을 보인다. ‘달맞이 나왔다가 지는 달을 못 잊어 하늘만 바라보고 한숨짓는 듯, 천만년 저렇게 외로움에 젖어 있는 것만 같은 묵상(黙想)의 모습이다. 더위에 지쳐 겉옷을 벗었는지 불볕더위에 바위들이 맨살을 들어내고, 오히려 야산들이 푸른 옷을 입은 것을 탓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흔한 자귀나무의 꽃이 제철을 만난 듯 진분홍 수줍음을 초록치마로 가리며 숲속으로 숨는 것 같기도 하고, 도로가에 가로수가 된 채 수줍음도 잊은 듯 우리를 반겨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차창밖에 스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모두 의미를 남기는 것. 어디를 가나 아름답고 화려한 금수강산이었다.
다산 유적지(丁茶山 遺積地)에 당도했다.
사적 제 107호로,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하고 있다.
1808년 선생께서 유배 당시 지어진 초막(草幕: 茶星閣)을 향하여 산길을 올랐다. 역사를 거슬려 선생을 뵈려 가는 것이다. 길 양편 높은 데는 소나무, 낮은 데는 대나무 숲 사이를 돌고 돌아 올라가는데, 산골 물은 무슨 사연을 전하려는 듯 내려오며 속삭이는 것 같다.
초막은 이미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에 강진군에서 다시 지었다 하는데,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초막 옆에 다산초당(茶山艸堂)이 있고, 그 안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있었다. 한때를 풍미했던 대학자의 초상화를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할 때 어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선생께서 직접 파고 조형(造形)하셨다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그 위에 비룡폭포(飛龍瀑布)를 만들어 놓고 즐기셨다하나, 지금은 변형되어서 그러는지 폭포 같지가 않았다.
비룡폭포를 지나면 제자들을 가르치신 동암(東庵) 일명 동풍암(東風庵)이 있고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쓰신 것이라고 한다.
동암을 지나면 산중턱 단애(斷崖)에 천일각(天一閣)이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정경(情景), 탁 트인 앞에는 바다를 막아 만든 논이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고, 강진만은 남으로 흐르는데 그 뒤에 첩첩(疊疊)한 산과 산은 예나 다름없이 묵묵히 정좌하고 있다.
선생은 때때로 이 천일각에 올라 먼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저 바다를 통하여 딸도 찾아오고 조카도 찾아왔다 하니, 지금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그 때의 정경이 삼삼히 눈에 밟혀오는 것 같아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선생시대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과 천주학은 유교의 공리공론에 찌든 양반들과 관리들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은 선생을 이곳으로 유배시켰지만 선생께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이 나라 억조창생(億兆蒼生)을 위하여 500여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하니, 선생의 그 높은 뜻도 뜻이려니와 인간 능력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선생가신지 250여 년이 지났건만 남북은 갈라져 이제야 겨우 말문이 트이는 듯 하고, 옛 붕당의 폐해는 지금도 이어져,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것을.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무색하고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는 애들 역사교과서에나 소개될 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가고 있으니, 참으로 무상세월(無常歲月)이 수수(愁愁)롭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의 발자취를 더 견학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내려오면서, 선생이 목민심서에 하신 말씀 중에 과연 ‘나에게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공직을 떠날 때가 다 된 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는 선생의 말씀대로 “내가 보던 책이나 책이나 잘 챙겨 가리라.”는 마음을 다지며 하산의 길을 서둘렀다.
해남 갓머리
예정대로 茶山 유배지에서 허 준 선생의 유배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해남의 어느 바닷가에 있다는 허 준 선생의 유배지를 관광버스 기사도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묻고 다니다가 결국은 허탕치고 해남의 땅 끝까지 왔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찻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관광버스도 숨차서 전망대주차장까지 올라와서는 크게 한숨을 쉬는 것 같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계단식으로 되어있는데, 경사진 길을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가야 한다.
내자는 작년에 다친 다리 때문인지 자꾸 뒤로 쳐진다. 다리를 다친 것도 다친 것이지만 다친 것을 핑계로 운동하고는 담쌓고 지낸 것이 더 큰 원인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못 따라 다니면 다음부터는 데리고 다니지 않을 테야”라고 말하니까, 빙그레 웃으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악착같이 뒤따라와 대열에 동참한다.
전망대 바로 밑 등나무를 올려 만든 간이 쉼터에서 문학세미나를 하기로 하고 앉을 수 있는 곳에 자유로이 앉았다.
이상인 전 회장님은 약10분간 ‘詩에게미치는 잠재의식(潛在意識)’ 題下의 원고까지 준비하시어 문우들에게 나누어주시고 강의를 하시었다.
“시의 잠재의식이란 한 번 믿어버리면 선악(善惡)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실현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평소 나쁜 성품을 버리고 좋은 의식을 지녀야만 좋은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본 바탕의 것은 우리의 것, 우리고창의 것, 우리 전라도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시의 형식, 시의 의미만은 과감히 새롭게 탈바꿈 해야 된다. 구태의연한 시의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집념을 새겨가면서, 시에 미치는 잠재의식을 유념하면서 도약해 나간다면 우리 모두 다 함께 좋은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를 끝으로, 문우들의 시 낭송이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땅 끝의 아름다운 광경, 빙 둘러 바다. 바다. 섬. 섬. 산. 산들, 단애(斷崖)에서 천애(天涯)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윤선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보길도를 바라보며 다시 내려와 허 준 선생의 유배지를 찾아 나섰다. 땅 끝 어딘가 있을법한 유배지, 달리는 차안에서 선생의 그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인간 사랑의 정신을 생각할 때 절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끼며, 차창밖에 바라다 보이는 저 마을들 어디에선가 선생의 의술이 펼쳐졌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씨조선 14대 임금인 선조께서는 자기 명(命)이 다 하여 승하 하셨건만 그 책임은 어의(御醫)였던 선생께 미쳐 이곳 땅 끝까지 유배되셨다. 그러나, 선생은 이곳에 와서도 민초들을 긍휼(矜恤)히 여기시어 정성껏 돌보아 주시면서도 동의보감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선생의 스승인 유의태는 그의 아들 유도지를 두고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하셨다. “받아들일 그릇이 못되는 자에게 도(道)나 예(禮)를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본래는 중국의 왕희지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선생은 끝까지 심의(心醫)가 되시길 원하셨다. 그러기에 어의를 뿌리치고 다시 삼남지방으로 내려와 헐벗고 굶주리며 병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심의의 길을 다 하다 끝내는 선생도 역병에 걸려 돌아가셨으니, 그 숭고한 정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오늘날 의약계(醫藥械)의 행태(行態)는 선생의 그 숭고한 장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의사이든 약사이든 최고 학부를 나와 보통사람들보다 가진 것도 많고, 더 배웠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의약분업에 불만을 품고, 자기들의 직분을 포기한 채, 삭발 후 붉은 머리띠를 전사(?)처럼 질끈 동여매고, 하늘을 향하여 삿대질하며, 국민과 환자를 볼모로 삼아 그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 아니던가. 선생께서 이러한 광경을 보셨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非人不傳. 의사나 약사가 되지 못할 자들에게 자격증을 준 것은 아닌지. 제발,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서민들의 목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아- 아름다운 산과 바다, 점점이 이어지는 섬. 섬... 우리의 강산은 빼어나건만 자연을 닮지 못한 인간들이 더러 있어,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이 자연을 거역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끝내 선생의 유배지를 찾지 못하고 고산 윤선도 선생의 유배지로 향하였다.
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고산 윤선도 하면 우선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산중신곡(山中新曲)등이 머리에 떠오른다.
선생께서는 선조 20년(1587) 한성부(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셨다. 유적지가 있는 지금의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는 선생의 4대조께서 살고 계셨었는데 선생이 8세 때 이곳 종가집으로 양자를 오신다. 선생은 이곳에서 벼슬길도 나아가시고, 귀양살이도 완도로 가셨으며, 돌아가신 것은 보길도이시다. 말하자면 남도와는 깊은 인연이 있다 하겠다.
고산의 유물들과 사시던 집도 그대로이고, 300년 된 소나무도 그대로이건만, 비자나무와 노송에 부는 바람소리만 우리의 마음을 처량하게 할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우리가 찾아 나선 세 사람 다 유배지만 찾아다닌 셈이다. 옛 선비들은 하나같이 절박한 상황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맴맴-매엠-맴, 매미의 울음소리를 선생의 시조인양 들으며 목포를 거쳐 고창으로 달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