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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조선왕조실록5 [단종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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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 6대 임금 단종 - 8세에 세손 책봉 (세종30년) → 2년 뒤 문종 즉위하고 세자 책봉→문종 죽고 12살에 임금이 됨→의정부가 나랏일 맡음→왕은 형식상 결재만 담당→즉위 몇 달 후 앵무새 임금에서 벗어나 겸허함을 잃지 않으며 한 걸음씩 성장 |
새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가 수렴 청정 관례 → 단종 땐 할머니, 어머니도 없던 터라 의정부가 나랏일 대신 |
의정부(정승) 영의정-황보인 좌의정-남지→김종서 우의정-김종서→정분 |
단종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대표적 옥의 티.. 본래 노산군 일기로 편찬 단종실록의 기분 서술 방향 및 강조점 - 어리고 불안한 임금,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안평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수양대군의 영웅적인 면모와 우국충정 |
실록에 실린 수양대군의 영웅적 면모와 우구충적은 그를 도운 공신들의 공적을 강조하고 계유정난의 진실이 그들에 의 한 왕위 찬탈 쿠데타임을 입증하는 식의 여러 증거들을 실어놓는등 자화자찬.. | |
야심가 수양대군 - 세종의 둘째아들 유교경전, 역사서, 역법, 병, 풍수, 음악이론, 악기연주 두루 통달- 학문적 소양과 교양 세종은 그의 자질 높이 평가하여 여러 일 맡김, 무인적 자질(타고난 건강과 운동신경). 문종 죽은 뒤 수양대군이 가장 비통해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어린 임금으로 인해 신하들 간의 합종연횡과 붕당이 발생할까 분경금지안을 낸 것에 대해서 종친들에 대한 압력이라고 몰아붙인다. 결국 의정부는 수양대군에게 합법적으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분경을 허용한다. |
세조는 무인적 자질 자랑 - 추운 겨울 얇은 옷, 일부러 늙고 둔한 말, 강궁 사용, 큰 걸음걸이, 직설적으로 속을 잘 감추지 못함, 불교 숭상 |
분경이란 사사로이 세력가의 집을 찾아 청탁하거나 하는 일. 평시에도 금지된 일 |
수양과 안평의 세력대결 세종은 일찍이 대군들을 중용했고 그 결과 대군들은 무시못할 정치적 세력 가지게 되었으며 수양과 안평에게 중요한 일을 동일한 비중으로 맡겨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져 왕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함(둘 사이엔 형제애와 협력의식보단 경쟁심이 강력히 자람) 수양 쪽 종친 - 양녕대군, 임영대군, 세종 후궁 김씨의 아들들 혜빈양씨와 안평 쪽 세력을 견제하여 문종의 후궁인 홍귀인을 빈으로 책봉하여 견제 역할하게 함. 주변시선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세력 확장에 혈안 |
안평대군은 타고난 예술가. 시와 그림, 당대 최고의 명필 정승 중심의 대신 그룹인 소장파들은 수양의 독주에 대한 우려로 안평과 손잡음 안평 쪽 종친 - 세종6남 금성대군, 세종후궁 혜빈 양씨(단종을 키운 유모)의 아들 한남군, 영풍군 | |
한명회의 등장 한상질의 손자, 칠삭둥이, 어려서 부모 잃어 작은할아버지 댁에서 자람, 세상일에 뜻 품고 과거에 도전하지만 번번이 낙방, 세상을 등진자 권람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자 한명회 둘은 절친이 됨..→서른 훌쩍 넘기고 둘은 세상 복귀→ 권람은 장원급제, 명회는 낙방했지만 자존심 접고 음직으로 들어가 벼슬(경덕궁직:경덕궁 관리)→ 어디서도 낮은 벼슬로 인정받지 못하자 비정상적 출로로 출세길을 열고자 정보수집→ 권람에게서 수양대군 쪽에 가능성이 있으니 승부를 걸어보자는 제안으로 수양을 만난다. |
개국 초대 유학자 권근의 손자 권람은 아버지 권제가 첩을 가까이하며 어머니 박대하자 아버지께 반발했다가 집 떠나 산천 유람했는데 이 시절에 한명회를 알게 됨 | |
거사를 위한 준비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한명회는 거사를 위한 정보 수집과 무사들을 포섭, 상대의 허와 실을 파악, 끌어들인 무사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고 .. 수양은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고..→명나라 다녀온 후 공개적으로 우호 세력 확대 나섬 또한 사행길, 국혼 주청, 충성심 담은 상소까지 올려 노련한 김종서, 황보인이 오판하도록 만듦 |
그쯤 측근들과 상의 없이 돌연 고명사은사를 자청(새 임금의 계승을 황제가 승인해준 데에 대한 감사 표시를 하러 중국에 가는 사신)→고집 부려 결국 수양 승인→명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은 뒤 돌아옴(중국 조정에 얼굴 알리고, 수양에 대한 조정 의심 누구러뜨리려는 의도) | |
안평측이 역모를 계획(김종서가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독단)한다는 증거를 만들어 수양 측 거사의 결정적 명분 만듦 → 10월10일 단종 1년 계유년 거사→ 김종서 제거→ 한명회와 무사들 합세→황보인, 조극관, 이양..등 제거 수양 측은 안평과 김종서 쪽에 일방적으로 역모 혐의를 씌워놓았을 뿐 신뢰할 만한 제시를 실록에 실지 못하고 있다. 역모의 전모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김종서와 함께 북방개척한 이징옥도 제거 |
김종서- 세종을 도와 북방 개척하고 돌아온 맹장. 지춘추관사, 지경관사, 지정균관사를 두루 역임한 유학자, 고려사, 세종실록의 편찬 맡음
공신들은 3등급으로 나눠 포상 | |
단종은 최대한 몸을 낮춰 숙보 수양을 예우하되 임금의 자리만은 지키기로 다짐→조심스레 행보 넓혀 나감(조회 참석, 윤대 시작, 경연 참석)→수양은 정난 이후 다시 단종의 국혼 주장→ 종친, 대신, 대간까지 합세→ 단종 강제로 송현수의 딸을 부인으로 맞음→점점 성장해가는 단종을 우회적으로 압박: 단종의 측근들이 난역을 도모했다하여 유배→단종은 대보(옥새)를 수양에게 전해 준다→드디어 수양 임금이 된다 |
단종을 서둘러 혼인시킨 이유? 민심 안정.. 유언비어가 난무해서.. 그러나 국혼 이후에도 민심이 흉흉해서 단종은 직접 포고문 발표 (헛소문 처벌)→수양은 유언비어를 공론화하려는 계산으로 받아들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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