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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墓 京機道 長湍郡 下道面 井洞里 白巖橋 艮龍坎入首子坐原. ①附右
◉ 現 파주시 장단면 정동리 【장단군읍지(광무3년, 1899, 고종 36)】▶ 4世 宋 松禮
¤ 파주시 장단면(長湍面) : 경기도 파주시 서부에 있는 면. 면적 33.96㎢. 장단군은 본래 고구려 장천현(長淺縣)인데 신라 떄 장단으로 고쳤다. 1001년(고려 목종 4) 단주(湍州)로 승격되었고 1018년(현종 9) 다시 장단현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 12월 다시 장단을 임강현에 합병하였으며 이때 명칭은 임단현(臨湍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419년(세종 1)에는 다시 장단현이 되었다. 1456년(세조 2)에는 장단, 임진현을 폐합하여 임진현에 소속시켰으며 1458년에는 임강, 임진을 합해서 장단으로 하였다. 조선조 말에는 진현내면, 진동면, 상도면, 하도면, 서도면, 『생략』 등을 관할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군내면, 진남면, 진서면, 소남면, 대남면, 강상면, 대강면, 장도면, 장남면, 진동면 등으로 개편하였다. 본래 장단군 지역이었으나 1972년 12월 28일, 장단면을 비롯한 장단군 3개면이 파주군에 편입되면서 파주군 장단면이 되었다. 이후 1979년 5월 1일 군내면에 출장소가 개설되어 군내·장단·진동·진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2011년 군내출장소의 명칭이 장단출장소로 변경되었다. 지금은 대성동과 통일촌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지금의 장단면은 본래 하도면, 상도면, 중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남면으로 병합되었고 1934년 장단면으로 개칭되었다.
면 전체가 비무장지대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속하여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나 일부 출입영농이 허용되고 있다. 문산읍과의 경계에 자유의 다리가 놓여 있다. 행정구역은 강정리·거곡리·노상리·노하리·도라산리·동장리·석곶리·정동리 등 8개리가 있다.
경의선의 남한지역 마지막 역이 된 장단면의 도라산역은 경의선이 문산의 임진강역에서 임진강철교를 건너는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은 임진강에 철교와 나란히 자유의 다리가 놓여 그 연장선의 자유로는 노상리를 거쳐 군내면 방향으로 북상한다. 도라산리에 출입국관리소가 설치되어 있다.
✼ 公 卒 後 160年 ②成化 丁酉(조선 成宗 8년 1477년) 5代孫 ③豊德郡守 ④叔璂 立石 ✼ 又 206年 肅宗 癸亥(1683년) 12代孫 黃海監事 *光淵 改立石
《양의공이 별세하신지 160년 후인 1477년 공(公)의 5세손 군수 송숙기가 그 묘에 표하였고, 또 206년 후인 1683년 공(公)의 12세손 황해 감사 송광연이 묘를 수축하고 비석을 개수하고 또한 이를 기록하였다.》【1989년 대동보 1권 84쪽】
① 부우(附右) : 부부를 합장(合葬)할 때, 아내를 남편의 오른쪽에 묻음.
② 성화 :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 성화제의 연호. 성화 13년은 1477년 정유
③ ¤ 풍덕(豊德) : 경기도 개풍지역의 옛 지명.
『생략』 1413년(태종 13)에 군(郡)을 폐하고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예속시켰다. 5년 뒤 다시 군이 되고, 1442년(세종 24)에는 덕수현과 합쳐 풍덕군으로 하였다. 그 뒤 1650년(효종 1)에 부로 승격하였으나 1823년(순조 23)에 이를 폐하고 개성에 예속시켰다.
1866년(고종 3)에 다시 부로 복구되었으나 1895년에 풍덕군이 되어 개성부 관할에 들어갔다가 다음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개성군에 편입되었고, 1931년 개성부가 독립되자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과 풍덕군이 합쳐져 개풍군이 되어 대성면이 되었다.『생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군수(郡守) : 조선시대 동반(東班: 文官)의 종4품 외관직(外官職)으로 군(郡)의 행정을 맡아보았다. 군수는 일반 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 주된 임무는 공물(貢物)·부역 등을 중앙에 조달하는 일이었다. 부윤(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정3품)·도호부사(종3품)·군수(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 등은 그 품계(品階)에 고하(高下)는 있었으나, 행정상으로는 상하의 차별 없이 모두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직접 받았으며 이들을 통칭 수령(守令)이라고 하였다. 전국을 모두 82군(郡)으로 경기도에 7곳, 충청도에 12곳, 경상도에 14곳, 전라도에 12곳, 황해도에 7곳, 강원도에 7곳, 영안도(永安道: 咸鏡道)에 5곳, 평안도에 18곳을 두었으며, 군내(郡內)에 불상사가 발생하면 현감으로 강등(降等)시키는 일도 있었다.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④ 송숙기(宋叔琪) : 세종 8년(1426) ∼ 성종 20년(1489). 본관 여산. 10世. 정가공파.
조선초기의 문신. 자는 거보(巨寶), 호는 월당(月塘), 한성부판사 송복산(宋福山)의 아들. 새보(璽寶 : 옥새와 옥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와 부패(符牌 : 병부(兵符), 순패(巡牌), 마패(馬牌)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등을 관장하던 ㉮상서원의 ㉯직장을 거쳐 세조 1년(1455)에 원종공신에 올라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성종 2년(1471)에 좌리공신에 책훈(冊勳)되었고 한성서윤, 장단과 풍덕군수, 덕원부사, 사섬시와 내자시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죽은 후 그는 이조참판에 추증. 묘는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 있다.
㉮ 상서원(尙瑞院) : 조선시대 국왕의 새보(璽寶)·부신(符信) 등을 관장하였던 관서.
㉯ 직장(職掌) : 새보·부패(符牌)·㉠절월(節鉞)을 관장.
㉠ 절월 : 지방에 관찰사•유수•병사(兵使)•수사(水使)•대장•통제사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 주던 절(節)과 부월(斧鉞). 절은 수기(手旗)와 같고, 부월은 도끼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함.
✼ 祭壇碑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5리 생이마을
4) 配 ①韓國夫人 中和金氏 父 正議大夫 樞密院左承制戶部尙書 祇錫
(배 한국부인 중화금씨 부 정의대부 추밀원좌승제호부상서 기석)
① 한국부인(韓國夫人) : 조선 초기, 외명부(外命婦)의 종1품 또는 정1품의 봉작(封爵). 태종 17년(1417)에 외명부의 관제를 정하고, 종실(宗室) 종1품의 숭록 제군(崇祿諸君)의 아내와 공신(功臣) 정1품의 제부원군(諸府院君)의 아내에게 이를 봉하였다가, 세종 12년(1430)에 군부인(郡夫人)으로 고쳤다. “韓國”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卞韓)의 국호(國號)이다.
5) 時享 陰 10月 1日
6) 子 四男五女
長男 宋 瑨(官 承旨)
次男 宋 璘(知申公)
三男 宋 瑈(官 郎將)
四男 宋 瑞(正嘉公)
長女 陽川人 許冠(官 佐郞) 次女 崔雲(官 密直) 三女 高挺堅(官 宰臣) 四女 徐翼(官 部令) 五女 李渭(官 大卿)
☼ 원종 12년(1271. 신미) 6월 기해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세자 왕심(王諶)을 몽고에 ㉮질자로 보내면서 ㉯상서우승 宋玢, 『생략』등 20명으로 하여금 호종하게 하고 『생략』
㉮ 질자(質子) : 고려 시대 몽고의 지배하에 있을 때, 임금과 고위관료의 자제를 볼모로 몽고에 보냈는데 이를 가리키는 말. 독로화(禿魯花)라고도 함.
㉯ 상서도성(尙書都省) : 고려시대의 중앙정치기구인 상서성(尙書省)의 상층관서.
995년(성종 14) 이전의 어사도성(御史都省)이 개칭된 것이다.
관원으로는 상서령(尙書令, 종1품) 1인,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인, 지성사(知省事, 종2품) 1인,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인,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 정5품) 각 1인,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 정6품) 각 1인, 도사(都事, 종7품) 2인이 있었다. 『생략』
이 가운데 상서령은 종친에게 제수하는 허직(虛職)이었으므로, 좌우복야가 실질적인 장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 아래로 승·낭중·원외랑 등이 좌우로 나누어져 기구 전체가 좌사(左司)와 우사(右司)의 이원적인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생략』 그러나 고려에서는 좌우복야와 지성사가 품질(品秩)로는 재추의 반열에 있지만, 실제로는 허직 또는 한직(閑職)으로 운영되어 재추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추밀원의 추신(樞臣)이 재추로서 상서6부의 판사와 상서를 각각 겸임하였다. 이 때문에 상서6부의 독립성이 강화됨으로써 도성이 상서6부를 직접 관할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기능은 상서6부와 지방 주현 사이의 공첩(公牒)을 중계하거나, 의형(議刑)·영조(迎詔)·재계(齋戒)·기우(祈雨)·과거 등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사무기관에 그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원종 14년(1273. 계유)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정월 임오일. 마강이 ㉮대장군 宋玢과 함께 수도 부근지역의 전함(戰艦)을 순시했다.
○ 3월 경오일. 마강(馬絳)이 원나라로 귀국하자 대장군 宋玢을 동행시켰다. 원나라 황후가 우리나라 낙산사(洛山寺)에 있는 ㉯관음여의주(觀音如意珠)를 보고 싶어 한다 하기에 宋玢으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이다.
㉮ 대장군(大將軍) : 고려시대 종3품 무관직. 중앙군에서 상장군 다음가는 직위로, 이군육위 8개 단위부대에 각 1인씩 배속되어 총 8인에 이르렀다. 각 군·위의 부지휘관 임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상장군과 더불어 합의기관인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무신의 권력집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중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관음여의주 : 낙산사는 3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하나로서, 문무왕 11년(671)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이 당에서 귀국하여 관음보살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낙산(洛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의상이 낙산에서 재계(齋戒)한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신수(晨水) 위에 띄워 용천팔부시종(龍天八部侍從)의 인도로 굴속으로 가서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여 관음보살로부터 수정염주(水精念珠) 받았으며,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올 때 동해용왕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주었다고 전한다.☼ 충렬왕 3년(1277. 정축) 정월 갑오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생략』 宋玢을 ㉮좌우서윤(左右庶尹)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그 외 동궁의 속관들도 모두 배치했다.
㉮ 서윤(庶尹) : 고려 말 ㉠세자첨사부의 한 관직. 충렬왕 3년(1277)에 지사(知事)•좌우찬덕(左右贊德)과 함께 궁관(宮官)의 관직을 둘 때 좌서윤(左庶尹)•우서윤(右庶尹)을 함께 설치하였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세자첨사부(世子詹事府) =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 :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동궁(東宮)의 사무를 맡아 보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충렬왕 4년(1278. 무인) 8월 무오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승지 宋玢을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승지(承旨) : 일명 승선(承宣)·대언(代言)·용후(龍喉)·후설(喉舌)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하면서 중추원에 왕명출납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지주사(知奏使)와 좌승선·우승선·좌부승선·우부승선 각 1명을 두었는데, 1276년(충렬왕 2)에 승선을 승지로 개칭했다. 직질(職秩)은 고려초 이래 정3품이었다. 단 1298년 4월 충선왕이 사림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정치를 도모하면서 왕명출납을 사림원에 위임함에 따라 도승지는 종5품, 일반 승지는 종6품으로 잠시 강질(降秩)되었다.
도승지(지주사·지신사) 이하 승지는 상위의 판중추원사 이하 추신(樞臣)과 함께 중추원관이 되었으나 그들만의 집무처로 승지방(승선방, 대언방)이 있어 추신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왕명출납을 관장했다.【Daum 백과사전】
☼ 충렬왕 7년(1281. 신사) 12월 경술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과인이 과거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 수도에 입조했을 때 정인경(鄭仁卿) 『생략』등이 호종하면서 노고가 많았다. 또 전에 역적 임유무(林惟茂)가 강도(江都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황제의 명에 항거했을 때 찬성사(贊成事)로 은퇴한 宋松禮, 전 추밀원부사 홍문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宋玢, 대장군 김지저(金之底)가 대의를 내세워 그들을 ㉮소탕해 국가적인 큰 공을 세웠다. 그 모두를 어떻게 포상할 지에 대해 의논해 보라.”
㉮ 소탕 : 원종 11년(1270) 5월 국왕의 밀명을 받은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宋松禮 등이 송송례의 아들 宋琰·宋玢과 함께 삼별초를 회유하여 임유무를 죽이고 무인정권의 종결과 왕정복고·개경환도를 이룬 경오정변(庚午政變)을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6, 열전19, 홍규전 및 권130, 열전43, 반역, 임연 부 임유무전 참조.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충렬왕 8년(1282) 임오년 11월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병술일. 지밀직사사 宋玢을 경상도로 『생략』각각 파견하여 전함을 수리하게 했다.
☼ 충렬왕 10년(1284. 갑신) 2월 신축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宋玢과 『생략』원나라에 보내 황제가 존호를 덧붙여 받은 것을 하례하게 했다.
☼ 충렬왕 11년(1285. 을유) 12월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계묘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宋玢을 경상도 조선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로 임명하는 한편, 또 사자를 각 도로 보내 함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량을 준비하게 했다.
☼ 충렬왕 16년(1290. 경인) 정월 무진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첨의참리(僉議叅理) 宋玢을 충청도 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로 임명했다.
㉮ 첨의부(僉議府) :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하여 첨의부로 개편. 고려 후기 중앙의 최고 행정관청. 백관의 서무(庶務)를 관장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를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좌첨의중찬과 우첨의중찬을 두고 그 아래에 첨의시랑찬성사·첨의찬성사·첨의참리(정2품)·참문학사(參文學事)·지첨의부사 각 1인을 두었다.
1293년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고, 1356년(공민왕 5)에 문종 때의 구제(舊制)에 따라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충렬왕 19년(1293. 계사) 12월 무자일.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충렬왕 24년(1298) 무술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12월 병진일. 宋玢을 원나라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 충렬왕 25년(1299) 기해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