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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포용의 정신, 생명과 공존의 시학
- 정영학론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는 ‘훌륭한 시는 강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 했다.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의 서문을 쓴 주희는 ‘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동되어 언어의 여운이 자연스럽게 형용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여운이나 자연스러움 그리고 형용이라는 말은 워드워즈가 말한 ‘자연스러움’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이는 시가 담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시를 정의한 것이다. 정영학의 시는 한마디로 시적 화자의 강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형상화되어 있다고 볼 때, 그 시적 특성이 어떠한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으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정영학의 시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감수성의 중핵은 인간적 따스함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시학으로 긍정이고, 수용이고, 포용이고, 이해라 하겠다. 참으로 착한 황소의 눈으로 자비 가득한 인간의 시선으로 인간과 사물을 바로보고 있어 다행스럽다.
시를 나타내는 한자의 시詩 속의 寺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사’로 읽을 때는 ‘절’을 의미하고, ‘시’로 읽을 때는 ‘관청’을 뜻한다. 시詩는 엄밀하게 절의 말이 아니고, 말해서 관청의 말이다. 이는 서민의 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상의 원리가 자동화라면, 시의 원리는 비유다. 오늘날 절의 명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寺는 원래 중국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중국에 불교를 전한 서역 스님을, 외국인을 접대하는 영빈관을 홍려사鴻攦寺라 불렀기 때문에 스님이 머무는 곳을 자연스럽게 ‘사寺’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 사寺는 현재의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사寺의 士는 선비 사가 아니라 之갈 지의 변형으로, 그 의미는 ‘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寸은 법칙, 규칙을 나타내는 말로, 한마디로 시는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시학원리에 따라 바르게 써야 한다는 촌철살인의 미학을 함의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누가 시를 절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는가. <현대시창작법>에서 황송문은 시詩를 자의적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필자와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 한자의 시詩는 言과 寺 또는 言과 志의 합자로, 언言은 모호한 소리나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음조가 분명하고 고른 말’이라는 뜻이며. 지寺는 지持의 원래 글자로서 손을 움직여 어떤 일을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는 ‘작업, 제작’ 등과 연결될 수 있는 말이다. 또 시詩를 언言과 지志로 본다면, 지志란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뜻이므로 심정이나 마음이 움직여나가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앞서 필자가 설명한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동양이나 서양 모두 시에 ‘제작’ ‘창작’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관조적 삶이라 했다. 정영학 시인에게 있어 삶은 창작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창작의 대상이 생활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생활을 대상으로 하여 그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로부터 벗어나 삶의 민활성을 되찾는다. 이는 창작을 통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영학의 시는 삶과 문학이 상호 삼투되어 서로가 유리되지 않도록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상 경험의 성찰이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일상과 문학의 통합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정영학의 시작詩作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범주화할 수 있다. 하나는 시의 출발점이 세상을 읽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개념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꾸며지며, 대체로 세상 읽기의 소산이며, 그의 시는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정영학은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 그리고 개인적 체험 즉 삶의 체계 속에 내재한 여러 기억들을 잘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일상적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본성적 감성을 찾아낸다. 정영학의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좁은 의미의 서정시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시가 사물의 특징을 순간의 인상으로 섬세하게 그리는 이미지 위주의 묘사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는 묘사적 요소보다 서술적 요소가 더 강한 편이다.
사람은 백 년을
허우적대며 사는데
나무는 천년을 여유롭게 산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를 받으며 사는데
나무는
세월에 자신을 맡겨놓는다
나무가 천년을 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이 할퀸 생채기가
육신을 썩혀 도려내며
뱃속을 훤히 드러내어도
나무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또 다른 생명을 품는다.
천 년의 나이로
그 육신으로도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부르며
내 머리 위에는 얼씬도 않은 산새들이
보금자리를 트니 고목의 자비로움이
자못 성스럽다.
내가 갖지 못한
박애와 겸양과 인내와 자비가
몸에 배었으니 천 년을 살아도
늙지 않고 꽃을 피워 내는구나.
그래서 노목에 피는 꽃이 더욱 아름답다.
나도 나무의 덕을 닦아가며
백 살을 살아가다가
마음 꽃을 피우며
먼 길로 소풍가듯 스러지고 싶다.
- <나무는 늙어서도 꽃을 피운다> 전문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내포적 자아를 갖는다. 이런 점은 정영학 시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내포적 자아는 역사적 자아보다 그 능력이 몇 배로 증폭되어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사물의 속살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안을 가지기 때문에 그 자아가 창조해낸 시는 예사로울 수가 없다. ‘나무는 늙어서도 꽃을 피운다’라는 경구는 미적 사유를 통해 풀어낼 수 있는 메시지다. 시인에게 시가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 보게도 한다. 시인은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 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적 제재인 ‘나무’를 통해 말한다. 시인은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 쓰기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나무는 늙어서도 꽃을 피운다’라는 제목을 보면,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시인은 이 부서진 세상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박애와 겸양과 인내와 자비’라는 것을 그가 작품 속에서 인정하는 순간, 그의 메시지는 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과 나무의 비교를 통해 나무가 가지고 있는 덕목을 찾아나가는 성찰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비교와 대조는 인식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적 삶과 나무의 삶에 대한 비교를 통해 현실인식에 대한 치열성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에는 나무처럼 현인이 되고 싶어하는 시적 화자의 초월적 현상학적 환원이 잘 드러난다. ‘나도 나무의 덕을 닦아가며/ 백 살을 살아가다가/ 마음 꽃을 피우며/ 먼 길로 소풍가듯 스러지고 싶다.’ 라는 삶의 순리적 지향점을 제시하는 성찰적 사고는 전체 시를 관통하는 그림자 형상이 아닐 수 없다.
빠알간 날에는
몸과 마음에 채워진
족쇄가 풀리는 날이다.
나른한 것 같은 평화로움이
여유를 가지게 하는
빠알간 날에는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짐짓 딴전을 피우면서
빠알간 날은
한껏 평화롭다.
- <휴일> 전문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생명을 유지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정영학이 휴일의 평화로움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느긋하게 즐겨보자는 것도 아니다. 휴일은 쉬는 날이지만, 그에게는 쉬는 것이 아니다. ‘쉼’을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환치시켜 놓았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라는 말로 그는 부성의 절대가치에 천착한다. 사랑의 바탕 위에 선 인간으로서 자식을 기다리는 전통적인 한국적 아버지의 원형이 ‘휴일’ 속에서 절묘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자식을 기다리는 아비의 모습이 얼마나 성스러운가.
테마 임도는
도로가 아닙니다.
펑퍼짐하고 널찍해서 좀 촌티를 벗은 듯하지만
그래도 오솔길을 닮은 데가 더 많습니다.
테마 임도는
그래서 오솔길이라 부르겠습니다.
신작로처럼 생겼지만
그 흔한 쇠수레는 얼씬도 하지 않는 호젓한 외길로
혼자 걸어도 아자작 아자작 밟히는 자갈소리가
친구의 속삭임이 되어 전혀 외롭지 않은 길입니다.
테마 임도에는
반세기의 세월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만화리의 이야기가 있고,
아카시아의 전설이 있으며
괴나리봇짐을 푸는 쉼터와
태고의 순결을 담은 감로수엔 쪽박이 떠 있습니다.
테마 임도에는
숱한 삶들이 공존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옛날에도 그러했듯이
만물의 속삭임은 서로의 정으로 느끼는 평화의 합창이 되고
나도 그들과 함께하는 연주자의 대열에 끼임을 느낍니다.
테마 임도에 이르러
장승의 안내를 받고 들어서면
옛 고장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꿈의 터널을 한나절 지나게 됩니다.
- <테마 임도>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신작로처럼 생겼지만/ 그 흔한 쇠수레는 얼씬도 하지 않는 호젓한 외길로/ 혼자 걸어도 아자작 아자작 밟히는 자갈소리가/ 친구의 속삭임이 되어 전혀 외롭지 않은 길입니다.’라는 두 번째 행이다. 이 표현은 많은 함축을 나타낸다. ‘쇠수레는 얼씬도 하지 않는 호젓한 외길’이 품어내는 연상에 주목해 보면, 테마 임도의 원시적 매력이 대단하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묘사력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만물의 속삭임은 서로의 정으로 느끼는 평화의 합창이 되고/ 나도 그들과 함께하는 연주자의 대열에 끼임을 느낀다’는 임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순전히 시인의 생산적 상상력을 통한 재구성의 결과다.
기억의 잔상을 재생적 상상으로 살려내고 다시 그것을 생산적 상상으로 변용하여 바꾸는 과정, 즉 상상을 통한 언어의 집을 짓게 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징과 연결되어 공생하면서 사는 공동체적 존재인식이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길’, ‘자갈소리’, ‘봇짐’, ‘쪽박’, ‘장승’, ‘꿈의 터널’ 등 열거한 시청각적 이미지는 모두 토속적이며 향토적인 상징들로 시인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함축과 내포가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어 감동을 준다.
어떠한 사물을 볼 때, 무엇을 보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보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은 소재에 그치는 얘기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그 주제와 표현방법까지를 포함하는 범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위해서는 형상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물 인식의 눈이라고 하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장승의 안내를 받고 들어서면/ 옛 고장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꿈의 터널을 한나절 지나게 됩니다.’라는 결구는 선명하게 부각되는 형태의식이나 주제의식의 상상화에 힘입어 작품 창작 의도에 통일적으로 기여한다. 평화를 합창하는 연주자의 지위를 갈구하는 노 시인의 메시지가 지배적 심상이 되어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천지가 복더위에
납작 엎드렸는데도
그 곳에는 싱싱함으로 가득하다.
녹색의 천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얼마나 건강한지
그 넘치는 싱그러움이
운동선수의 피부색 같다.
그들은 이슬만 먹고
이슬로 세수하고
이슬로 배설해도
그 모든 일상의 찌꺼기까지
우리의 가슴을 정화하여
더욱 향기롭기만 하다.
더위에 지친 이들의
쉼터가 기꺼이 되어주고
빗물을 품었다가
옥샘으로 솟아 올려
토끼와 다람쥐의
목욕탕이 되고
지나는 과객들의
감로수가 되어준다.
푹푹 찌는 여름이 와도
푸르른 녹음이 있어
시원한 바다 말고라도
편히 쉴 곳을 제공해 주는
그 푸르름이 너무 고맙다.
- <녹음예찬> 전문
정영학 시의 출발점은 ‘녹색의 천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얼마나 건강한지/ 그 넘치는 싱그러움이/ 운동선수의 피부색 같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공존’과 ‘상생’이라는 생태적 세계관을 축으로 한다. 이는 정 시인의 현실 인식과 작가정신의 발로다. 그는 언제나 시 작업을 통해 자연이라는 미래적 유비쿼터스 환경 안에 머물고자 몸부림치며 문명 속에서도 자연을 벗하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으려 한다. 폭염으로 고통스러워도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공존을 위한 순수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는 데서 이 시는 문학적 가치를 발한다.
그리하여 ‘나’를 철저히 탐색하면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녹음을 예찬하는 이유일 것이다. ‘더위에 지친 이들의/ 쉼터가 기꺼이 되어주고/ 빗물을 품었다가/ 옥샘으로 솟아 올려/ 토끼와 다람쥐의/ 목욕탕이 되고/ 지나는 과객들의/ 감로수가 되어준다.’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 시인은 항상 배려와 관용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할 공존의 미학을 추구한다. ‘쉼터’ ‘옥샘’ 등의 어구는 정 시인의 에코필리아적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핵심 코드라 하겠다. 이런 코드가 여러 시에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시정신은 ‘공존’과 ‘공생’을 축으로 하는 생태적 합리성에 있다고 해도 좋을 듯싶다.
그의 시는 단순히 환경 문제를 소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철학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감동과 시적 신뢰를 획득한다. 이런 그의 세계관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정중동으로 뒤척이는/ 열대야에도 곳곳에 삶을 열어가는/ 끈질긴 모습들은/ 나에게는/ 성자의 환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하는 <열대야>란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시인의 정직성과 성실성이 탁월한 그의 시적 상상력을 만나면, 어떤 사물도 속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풍경의 이데아는 ‘공존’의 미학 속에서 ‘평화’라는 하얀 살결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문명의 염증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향촌(鄕村)에 아침 되니 실안개가 여전하고
이끼 낀 돌담에도 옛 추억이 묻어난다
담 너머 낯익은 소리 고우(古友)가 아닐런지
인교(人巧)가 교묘한들 천공(天功)에 비할소냐
둘러싼 산수풍광 수려하기 그대론데
소 몰아 밭 갈던 곳엔 기계소리만 분분하다.
친고(親故)를 묻고 물어 옹기종기 불러 모아
아련한 옛 고향의 그 모습을 되살리며
금석(今昔)의 조화로움을 이루고자 하노라.
화친(和親)을 하려할 제 이기(利己)를 멀리하고
희비(喜悲)도 함께하며 손익(損益)일랑 묻지 마소
십 년을 다져진 情이 이로써 영글리라.
회류(會流)가 하나 되어 실개천을 그려내고
실개천이 모여모여 구곡천(九谷川)이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로 하여 만세교정(萬世交情)하리라.
- <애향가愛鄕歌> 전문
<애향가>는 기장군 철마면을 고향으로 둔 향인 친화회를 기리며 2,000년도에 쓴 시다. 고시조 풍으로 쓴 이 시에는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다. <고향송>이라는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마라는 동질성 하나로 모여 오순도순 둘러앉아 진한 정담으로 밤을 지새우는 친화회는 바로 철마 형제들의 모임이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둘러싼 산수풍광 수려하기 그대론데 소 몰아 밭 갈던 곳엔 기계소리만 분분하다.’는 대목이다. ‘기계소리’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단절을 암시하는 단어다.
프롬은 인간의 가능성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특성을 ‘형제와 같은 연대감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회’로 서술함으로써 애정의 본질을 말한 바 있다. 현대는 그런 애정이 필요한 사회다. 그런데 이미 ‘소 몰아 밭 갈던 땅’에는 문명의 이기가 손을 뻗쳤다. 삭막하기 그지없다. 가슴에 문을 닫고 나와 나, 나와 식물, 나와 동물 사이에 벽을 높이는 단절의 공간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정영학은 가슴과 눈을 열어 고향의 자연이 보내는, 고향사람들의 정 스민 발신음을 듣고자 친화회 속에서 언제나 내포적 자아를 취한다.
상생이나 공존의 미학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는 논리적 접근은 소외나 단절이 현대 사회의 특성으로 파악되면서부터 줄곧 호명되어 왔던 이슈다. 정영학 시인 역시 시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고향이 주는 상황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화해의 구도로 응축되는 ‘공존’의 미학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거리, 실감과 정서의 거리는 정영학 시의 미적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을 직접적인 시의 대상으로 삼되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미적으로 응시하는 정 시인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시를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차갑고 긴긴 겨울이
끝이 없듯 춥고 지루했었지만
그래도 끝내 봄은 어김없이 오더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문득 가 버렸을 때
가슴 찢어지는 슬픔에 마음이 녹아 내렸지만
그래도 세월 가니 잊히더이다.
밤새 천둥 벼락이 천지를 흔들고
바람은 모든 걸 날려버릴 기세였지만
그래도 비가 뚝 그친 아침의 창밖은
아무 일 없은 듯 더 싱그러워 보이더이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래도 내 지식의 샘은 더 풍성해졌더이다.
모든 게 비위에 거슬리고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지만
올 건 오고, 갈 건 가며 새로움도 생겨
그래도 어제보다 항상 오늘이 더 낫더이다.
세상은 시끄러워 곧 어찌될 것 같지만
티 없이 쑥쑥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니
그래도 희망이 헛걱정을 지워버리더이다.
- <그래도> 전문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게 서정의 원리다. 그래서 서정 장르의 특성을 한마디로 ‘세계의 자아화’라 한다. 문학은 ‘자아’와 ‘세계’라는 두 층위간의 결합 양상에 따라 갈래가 생기지만, 시의 경우는 대체로 자아와 세계가 만남으로부터 생성된다. ‘세상은 시끄러워 곧 어찌될 것 같지만/ 티 없이 쑥쑥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니/ 그래도 희망이 헛걱정을 지워버리더이다.’라는 시인의 입장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어려워도 ‘그래도’ 아직은 살만 하다는 긍정적 세계관은 불안의 시대상에 비추어 대단히 바람직하다. 이 시의 서두는 ‘차갑고 긴긴 겨울이/ 끝이 없듯 춥고 지루했었지만/ 그래도 끝내 봄은 어김없이 오더이다.’와 같이 어김없이 오고마는 계절의 순환으로 열었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자연의 이법이고 질서다.
정영학 시의 시적 가치는 그 만남의 반응이 반성적 성찰, 즉 깨달음으로 응축된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모든 게 비위에 거슬리고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지만 올 건 오고, 갈 건 가며 새로움도 생겨 그래도 어제보다 항상 오늘이 더 낫더이다.’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누구보다도 순명적인 세계관으로 내일에의 희망에 기대를 걸며, 네오필리아적 가치에 동화되길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은 이유다. 그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사고가 ‘새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정 시인의 시정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늘 새로움에 천착한다는 것은 작가정신의 발로다. 과거지향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겸허한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 할 때, 정 시인의 경우, 이 반응은 단순한 수동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래도 내 지식의 샘은 더 풍성해졌더이다.’라는 사고방식은 시적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마음의 토양이 그만큼 비옥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시에 스며든 이런 긍정적 의식은 공생의 가치를 고양시키기에 독자와 정서적 공감대를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 시인의 시세계는 환상적 세계요, 가정의 세계이며 좀더 낯익은 말로 표현하면 가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어디선가 후각에 익은
그윽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온다.
향이 이끄는 대로
코를 실룩거리며 찾은 곳에는
하얀 치자 꽃 군락이 있었다.
그때의 그 향기였다.
치자 꽃향기 속에서 나는
내 할머니와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외롭고 고고하게 선 치자나무는
조상신과 장독신이 머무는 신목(神木)이었다.
열두 가족에
치성드릴 일은 거의 매일 있었다.
할머니가 안 계시자
대를 이어 어머니가 꿇어앉으셨다.
치자 꽃 피는 유월에는
꿇어앉아 손을 비비는 일이 더 빈번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치자 꽃향기에서
인자하신 조상님의 체취를 느낀 것이었을까?
그때의 치자나무는 없어졌지만
길가에 무리지어 피는 치자 꽃은
여전히 소복한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고
그윽한 향기는 우리 어머니의 향기로 다가온다.
- <치자꽃> 전문
치자꽃을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로 풀어내고, ‘신목’으로 비유한 이 시는 조상신께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이 시가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이면에 내재된 논리 구조 때문인 것이다. ‘열두 가족에/ 치성드릴 일은 거의 매일 있었다.’라고 하면서 가족이 잘되기만을 빌고 빌었던 우리네 여인의 헌신적 삶을 절묘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미적 울림통을 울리게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게, 시인의 잴 수 없는 행복을 잴 수 있게 구체어로 치환하는 능력은 역시 시인의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구체어로 된 시어들은 전부 추상을 구상화시키는 장치다.
이 시 역시 추상에서 구상으로, 관념적에서 구체적으로 언어의 자유로운 자리 이동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시가 추상적 관념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는 시학의 측면에서 그렇다. 정영학 시의 미학성은 바로 언어의 이동, 즉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동이 일어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는 생성미학의 관점에서 그 맛과 멋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할머니가 안 계시자 대를 이어 어머니가 꿇어앉으셨다.’라는 기막히게 관념을 시각화해내는 표현이야말로 이 시를 읽는 쾌미다. 이 한 줄만으로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성스런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어머니가 얼마나 우리 삶에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위로 하늘이고, 아래로 땅인데
땅도 바다도 흙 위에 있고
생로병사도 흙 위에서 명멸한다.
태초에 흙은
활활 타는 불덩어리였지만
바람이 있어 속으로 숨어버리고
바람은
식은 흙에 생명을 불어 일으켰다.
그리고,
모든 우리의 조상님이 영겁으로
흙으로 갔고 흙에서 태어나고
삼라만상도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갔다.
나는 흙을 밟고 다니지만
내가 흙을 밟는다기보다
흙이 나를 치켜들어 손바닥 무등을
태운다고 믿고 의지하면서 산다.
- <흙> 전문
이 시는 흙의 의미를 멋진 역설로 형상화해 냄으로써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하겠다. 시인은 노련하게도 흙의 신통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태초에는 불덩이였던 것으로 인식한다. 바람이 식은 흙에 생명을 부여했다는 식의 신화적 해석이 눈길을 끈다. 구체성을 메우는 데 필수적인 ‘내가 흙을 밟는다기보다/ 흙이 나를 치켜들어 손바닥 무등을/ 태운다고 믿고 의지하면서 산다.’란 역설적인 화두를 배치하여, 지배적 정황을 구축하고 ‘언불진의, 입상진의’의 시정신을 잘 소화하고 있다.
‘바람은 식은 흙에 생명을 불어 일으켰다.’라는 인식은 시인의 주관적 해석이다. ‘바람’과의 관계성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생명 탄생의 기원을 풀어내는 시인의 인식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적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명제를 연역적으로 풀어가는 시적 전개가 돋보인다. 사물과의 소통도 배려도 마음이 평정된 뒤의 문제가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우리 시인들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천착이 있어야 하리라 믿는다. 흙과 인간의 관계성이 이렇게 철학적으로 결합된 것도 모두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시인의 시정신이 피워낸 결실이라 하겠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조약돌
무거운 입으로 묵묵히
파도가 시키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조약돌
이리저리 부딪치고
온갖 수모를 견디어낸
천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고의 달인
조약돌
누구에게나
어디서이거나
한결같은 자세로
순응이 몸에 밴
어쩌면 바보일 것 같은
돌의 군자(君子)
조약돌
인생도
세파에 닳고 닳아야
조약돌 같은
군자가 될까?
- <조약돌> 전문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보인다. 바닷가에서 살아온 시인은 조약돌을 통해 삶을 반추하는 내용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는 서술적 시행 하나하나의 외적 진술이 상징과 비유를 담고 있기 때문에 미적 거리가 시적 긴장감을 준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시 전체가 시인 자신의 삶을 관통하면서 시인의 내적 고통과 성장이 잘 의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상상력이 아닌가. 가장 문학적인 발상이 이 시에 담겨 있다. ‘인생도/ 세파에 닳고 닳아야/ 조약돌 같은/ 군자가 될까?’라는 표현이 갖는 정서적 환기력은 시궁이후공론의 가치에 진입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정 시인의 시에서 돋보이는 정신은 ‘인고의 달인’이라는 상징이다. ‘누구에게나/ 어디서이거나/ 한결같은 자세로/ 순응이 몸에 밴// 어쩌면 바보일 것 같은/ 돌의 군자(君子)’ 라는 조약돌에 대한 비유는 인생 순응적 삶을 살아가는 타자를 위한 배려심을 나타내어 보여주는 것으로써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압축된 서정시로서 제재인 ‘조약돌’에 대한 심상과 상징을 ‘달인’과 ‘군자’로 그려내었는가 하면 ‘바보 같은’이란 수식어로 군자의 자격을 인간적인 데 두어 풀어내고 있어 공감을 준다. 군자에 대한 풍경화 같은 작가의 사유를 너무나 솔직하게 형상화하고 있기에 군자적 삶의 보편적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따라서 이 시가 환기하는 언어들은 그대로 우리를 미적 사유로 몰아넣는다. 이 시는 제 물상과 합일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화해해야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의 의미가 풍성하다고 하겠다.
시인은 꽃의 마음으로
꽃 같은 시어를 글에 담아내고,
그 글에는
꽃향기가 안개처럼 피어나노니,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줄 알고
꽃이 전하는 생각을 공유하여
대신 전할 줄도 알며
매사를 꽃으로 보고
매사를 꽃으로 말하고
꽃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
설령 나를 시인으로 불러주어도
나는 아직 시인이 못되오이다.
- <시인과 꽃> 전문
결구 ‘설령 나를 시인으로 불러주어도 나는 아직 시인이 못되오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는 낮은 곳을 향한다. 그리고 겸허와 겸양을 지향한다. 그는 이처럼 열린 시를 주창하고 있다. 정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꽃의 마음’이다. ‘매사를 꽃으로 보고 매사를 꽃으로 말하고 꽃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시인은 사물의 발신음을 듣고 난 후 시를 짓는다. 정영학의 이 ‘시’는 시로 쓴 자신의 시론이다. 문학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시론을 가져야 한다. 그가 얼마나 시를 다듬고 여과시키고 승화시켜 내는지는 시를 꽃의 마음으로 쓴다는 데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시는 아픈 마음을 풀어내고 아픈 사연을 다독이는 작업인 것이다. 시에 대한 숙고를 통해, 그는 텅 빈 곳을 따뜻한 마음으로 채우고, 오감을 통해 시의 의미를 읽어내도록 해서 익은 시를 써내고자 한다. 시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 동원시키는 시어들의 취사선택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그 시어의 연결고리도 물고 넘어가는 재치도 재미있다. 이는 시가 씨알이고, 비운 곳을 채우는 것이란 시정신과 맞닿아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정 시인의 시정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고지는 ‘성찰’이기 때문이다. 이 성찰은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시의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시정신인 ‘반성’과 ‘성찰’은 생각이 찰찰 넘치는 통찰과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성찰의 과정은 시를 설계할 뿐만 아니라 시어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전위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무성한 녹색의 이파리 속에
아직 매달려 있는 한 송이 두견화
아름답지만 혼자라서 애잔하다.
어쩌다 무리와 함께 하지 못하고
외롭다 못해 저다지 처량하게 남았는가?
어미 잃은 꽃사슴처럼
새끼 잃은 어미사슴처럼.
왁자지껄하게 함께 피었으면
질 때에도 덜 쓸쓸하게 함께 져야지
한 날 한 시에 만나 해로하다가
떠날 때는 혼자 쓸쓸히 가듯이
너도 그렇게 짝이라도 먼저 보낸 듯이
눈물 훔치는 여인네처럼 아름답고 가녀리구나.
- <때를 놓친 꽃 한 송이> 전문
시인은 세상을 사물로 보지 않고 사건으로 본다. 혼자로 머문 두견화는 ‘어미 잃은 꽃사슴처럼 새끼 잃은 어미사슴’으로 치환된다. 혼자된 꽃의 외롭고 처연한 모습을 선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한 송이’ ‘혼자’ 등의 어두운 이미지를 가져왔고, 이런 이미지를 ‘외로움’과 ‘처량함’ 등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나타내어 사물인식에 관념을 더해 현대시의 중층묘사기법의 효과를 견인한 셈이다. 혼자된 꽃이 지아비를 먼저 보내고 눈물 훔치는 여인네로 의미화한 까닭으로 이 시는 공감을 자아낸다. 산다는 것은 함께 어울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시인에게 혼자됨은 아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쓸쓸함’을 껴안는 시인의 마음은 세상을 보는 작가의 세계관이 아니겠는가.
돋보기로 살펴야
알 수 있는 이름들이기에
차라리 들풀이라 하자.
이름도 그냥 들풀이고
온 산천이 모두 제 집이며
돌보아 주는 이 없고
반겨주는 이 없어도
스스로 즐기며 스스로 자란다.
그 강인한 생명력 하나로
짓이겨져도 죽지 않으며
파서 던져져도 그 곳에 뿌리내리고
자동차바퀴에 깔려도 끄떡없이 일어선다.
아, 들풀의 자유로움이여.
마소처럼 목줄이 왜 필요하며
사람처럼 주민등록증이 왜 필요한가?
그냥 오직 들풀로만 자유롭구나.
그런 삶으로 가뭄을 막아내고
땅을 움켜쥐고 사태도 막아주며
타는 여름에 힘을 비축하여
메마른 겨울을 이겨내면서도
좋다 마다 말이 없고 자랑 한마디 없는,
그냥 만물 중에 군자이구나.
- <들풀이라서 자유롭다> 전문
시인은 ‘들풀’의 자유로움이 부럽기만 하다. 자유로움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얼마나 주체성에 접맥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시를 통해서 정영학 시의 특성을 대충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시어만 보더라도 하나하나가 심상의 확대를 가져올 구체어들로 연속되어 있다. 이는 상상력과 연상에 의해 감동을 창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마소처럼 목줄이 왜 필요하며 사람처럼 주민등록증이 왜 필요한가? 그냥 오직 들풀로만 자유롭구나.’라는 언술은 억압의 삶을 삶 바깥으로 호출함으로써 시인은 존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포착하고자 한다. 자유에 대한 시인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게 하는 이런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시는 자기 표현욕구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반응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는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이 시의 미학은 대자연의 멋과 맛을 알아가는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데서 그 가치가 빛난다고 하겠다.
사람은 백 년도 겨우 살면서
천 년 동안 할 말을 다하며 살지만
나무는 천 년을 살면서도
단 한마디도 말이 없다.
나무라고 왜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천 년을 살아오며
보고 듣고 겪은 사연이 그 얼만데
보고 들은 것은
바람에 날려버리고
겪은 것은 나이테에 적어놓으면서
천 년의 인고를 이겨내며 산다.
나는 아름드리
노거수 그늘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위력에
천 근의 무게로 짓눌려도
그 도타움에 기대고 싶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까지 하다.
- <나무> 전문
문학이란 미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시 작업 또한 미를 구축하는 작업이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려면 관념이나 정서가 양식화되어야 미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시를 보면, 나무의 미덕을 찬양하는 데 대한 서정적 자아의 인식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상징을 활용해 정서의 양식을 꾀함으로써 관념의 노출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다. 시인은 나무가 있어, ‘그 도타움에 기대고 싶다’고 인식한다. ‘천 년의 인고’는 가장 큰 나무의 미덕이다. 나무 앞에 선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 떨어진 미미한 존재들이다. 이처럼 정영학은 대상과의 거리에서 진실한 삶의 표정을 읽는 것이다. 이 시에 있어서 주제의 발현은 세계 혹은 사물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되 그 만남은 매우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멍게 한 마리에
파도와 갈매기소리까지 섞여
바다가 통째로 들어있다.
오톨도톨한 껍질에는
건져 올린 해녀의 만족감이 서려있고,
해파리 같은 속살에는
야릇한 갯내음과 바다소리가 녹아,
우렁쉥이의 향과 어우러져서
멍게를 담은 접시는 그대로 갯마을이다.
갓 건져 올린 우렁쉥이가 놀라서
온 몸으로 물총을 쏘아대는
망태 속에는 갑갑한 삶이 꿈틀대고
바다와 해녀와 멍게와 갯바위가
어우러져서 또 다른 파도를 일으킨다.
- <멍게> 전문
시인은 기장이란 바닷가에 산다. 바다 관련한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일이다. 바다에 멍게가 나고, 생선이 놀고 해초가 커가고 플랑크톤이나 고래 같은 것들, 파도와 갈매기가 존재하기에 ‘갑갑한 삶이 꿈틀대고’, 세상이 아름답게 인식된다. <멍게>에 등장하는 해녀는 우리가 껴안아야 할 타자인 것이다. 이처럼 정영학은 대상과의 거리에서 멍게를 통해서 해녀의 진실한 삶의 표정을 읽는 것이다. 멍게와의 만남은 그래서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용시는 매우 개성적이다. 바닷가에 사는 정영학만의 사물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그러나 대륙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seeing as’의 관점으로 포착하여 주관적 인식 세계로 변용시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성취한 때문에 이 시는 훌륭한 서정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동토의 땅에도
노래가 있고 낭만도 있다.
하늘 바람이
구름을 춤추게 하고
점점이 피어나는 겨울 안개는
산 가족이 뱉어내는
따뜻한 입김이다.
곡조와 장단이 있고
즐거이 들어주는 이가 있으면
거기에는 음악이 있다.
춤추는 구름은
고공의 솔개가 손뼉 쳐 주고
산새들의 지저귐은
음률과 강약이 있고, 어울림이 좋으며
그 입김은 산을 데우고 안개를 피우니
산까지 매료시키는 훌륭한 예술이다.
산동네에는
권모도 술수도 없는
정직함으로만 살아가는 자연,
그들만의 겨울노래는
한없이 순수하다.
<동토의 땅> 전문
정영학의 자연 관련 시에는 생태에 대한 사랑, 특히 소시민들의 소소한 인정이 농밀하게 함축되어 있다. 신기하게 그의 시를 읽으면 ‘고향마을’이 떠오르고, 시골의 천진무구한 아이들이 아름다운 대상으로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이것은 그의 시가 ‘자연예찬’이면서 ‘생의 찬가’로서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강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 메시지의 강력한 설득력은 그의 선한 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같은 본성의 저변에는 고향의 그림자 형상이 짙게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착한 심성과 향토를 사랑하는 토포필리아적 세계관의 표출에 힘입어 그의 시는 때때로 지극히 낭만적인 매력을 지니기도 한다. ‘산동네에는/ 권모도 술수도 없는/ 정직함으로만 살아가는 자연’이라는 대목만 보더라도 그에게 ‘동토의 땅’은 온 힘을 다해서 하루를 보낸 시인이 예찬으로 맞이하는 축복의 땅이다.
갈매기의 날개 끝에
봄이 너울거리면
제 울음소리까지 노래가 되어
파도의 리듬을 타며 퍼져난다.
언덕배기 산처녀의 바구니엔
쑥이 가득하고
갯바위 돌 틈을 후비는
바다소녀의 바구니엔 톳이 싱그럽다.
아침 찬거리 낚으러나간
사공의 어창에는
낚아 올린 봄 도다리가 퍼덕거리고
그물을 손질하는 마을 앞은
평화와 여유로 한가롭고
어부의 손끝은
풍요의 기대로 쉴 틈이 없다.
갯마을의 봄은 나날이
짙어가는 봄 미역밭의 색깔과 함께
익어간다.
- <갯마을의 봄> 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갯마을’은 ‘평화’다. 시인은 갯마을에 나가 생의 축제를 느낀다. 이 시의 첫 어구 ‘갈매기의 날개 끝에/ 봄이 너울거리면/ 제 울음소리까지 노래가 되어/ 파도의 리듬을 타며 퍼져난다.’는 것이 말해준다. 더 나아가 ‘갈매기’ ‘톳’ ‘봄 도다리’ ‘미역’은 오감을 활짝 열고 바라보면 바다가 다 자신에게 속삭이고 말을 걸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는 갯마을의 평화 축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를 읽는 매력은 시어들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데 있다. 무심코 읽어나가다가 순간 필자의 마음에 멎었다. ‘갯마을의 봄은 나날이/ 짙어가는 봄 미역밭의 색깔과 함께/ 익어간다.’라고 하는 기막히게 관념을 시각화해내는 표현이야말로 이 시를 읽는 쾌미다. 이 한 줄만으로도 바닷가에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바다가 얼마나 시인의 삶에 중요한가를 대번에 알 수 있게 한다.
북극 한파가
대지를 꽁꽁 묶어버렸다.
백수를 눈앞에 둔 할아버지도
생전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른 추위에
뜰 앞의 동백도
두 손 들고 꼬리를 내렸다.
월동이라면 코웃음 쳤던 동백인데
그 두꺼운 잎을 늘어뜨린 채
시들어버려 너무 애잔하다.
갸륵하게도
빨간 꽃 몽우리는
사생결단으로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우리 엄마 마음이다.
그래도 겨울 꽃인데
죽을 리야 만무하겠지만
축 늘어져 오들오들 떠는 동백이
문밖에 내놓은 우리 가족 같아
너무 불쌍하면서도 기특하다.
- <가련한 동백> 전문
사생결단으로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동백을 바라보며 삶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계절이 생명의 겨울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빨간 꽃 몽우리’는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시인은 그래서 관념 속에 있는 어머니의 강인한 정신을 ‘동백’으로 치환했다. 동백이 아름다운 것은 붉어서가 아니다. 사생결단의 강인함 때문이다. 개화보다 낙화가 더 아름다운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노을 진 저녁,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음에 감동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듯이, 시인은 ‘축 늘어져 오들오들 떠는 동백이 문밖에 내놓은 우리 가족 같아’ 가슴을 여미기도 한다. ‘문밖에 내 놓은 우리 가족’이란 표현은 일반인과 다른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표현은 지식이 아니라 감성이 작용한 까닭일 것이다. 정영학 시의 서정적 특성은 삶의 생명성에 시적 자아를 동질화시키려는 시인의 지속적인 노력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꽁무니에 여름을 달고
6월이 팔자걸음으로 오고 있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드높고
들녘에는 녹색이 파도타기를 하는
여름은 모든 것을 성숙하게 한다.
하늘은 무상하여
비바람을 얼마나 퍼부울지
아니면 얼마나 인색하여 목을 태울지
그래도 하늘은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셨다.
이 6월에
영현들은 피땀을 비 오듯
육신을 불사르며 이 땅을 지켜냈다.
그때에는
여름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게다.
6월을 슬퍼하지 말고 거룩해 하자.
감사하면서 이 여름을 이기자.
두꺼운 녹음과 출렁대는 바다가 있으니
여름 낭만을 즐기며
지켜내고 이겨내자.
- <6월의 산하> 전문
유월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사’와 ‘극복’이다. 이에 대한 시인의 의지는 결구에 명징하게 나타나 있다. 시인은 ‘두꺼운 녹음과 출렁대는 바다가 있으니/ 여름 낭만을 즐기며/ 지켜내고 이겨내자.’라는 말로 유월의 아픔을 낭만으로 채우고자 한다. 그 근거로 든 ‘두꺼운 녹음과 출렁대는 바다’는 유월의 아픔은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충실하며 유월을 슬퍼하지 말고 거룩해하자는 메시지로 꾀하는 공감대 형성은 시적 신뢰를 얻기 위한 세심한 배려라 하겠다. 정영학은 다양한 제재를 통해 평화를 꿈꾸는 의식 있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위요하고 있는 분단의 환경 속에서 유월의 아픔을 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한마디로 애국적인 시민의 삶을 산다. 철저하게 구체어를 통해 감동 미학을 구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자에게 포근함을 선사해왔다. 평화에 눈길을 주고, 아픈 이들을 더 챙겨주는 배려심이 큰 때문일 것이다. 아픔과 슬픔보다도 회복과 극복을 지향하기 위해 화해의 길을 열고,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 낭만의 원리로 환치시켜내는 탁월한 능력도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가을은...
석이네의 가을은
텃밭의 감나무와 함께 익어간다.
풋 열매 홍조 띨 적에
초가을임을 알겠더니
빨갛다 못해 속살까지 익어버린 지금
하늘은 무서리 흩날리는 늦가을이구나.
부드러운 속살을 힘겹게 안고
빠알간 꿀주머니로 변해버린 너는
이제는 아흔 노인인 양
매달려 있기도 힘겹고 지쳐
드디어는
수십 길 낭떠러지로 하나 둘
패대기쳐지는 너의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구나.
삼천궁녀의 장렬한 최후가 끝나가고
까치밥만 두어 개
덩그렇게 매달렸을 때쯤이면
앙상해진 가지가 외로이 떨면서
나무도 시절도 겨울을 노래하겠지.
- <홍시> 전문
정영학 시집 해설의 마지막 시로 <홍시>를 놓는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만남과 이별이 존재의 양면성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이해시키고 있다. 삶은 언제나 이별 속이다. 이별은 살아 있는 자의 운명이므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영학에게 있어서 이별의 아픔은 ‘노래’로 승화되는 긍정의 정서다. 이 반전의 묘미, 역설의 힘이, 정영학 시의 매력이다. 일반적으로 이별의 자리에는 외롭고 슬프고 아픈 정서가 남겠지만, 정영학의 이별 자리에는 긍정이 살아 숨쉰다. 알고 보면 그게 우리네 생이고, 우리 인생이고, 방문을 열면 보이는 감나무와 함께 하는 우리 시골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본질이다. 이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슬픔도 기쁨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영학 시의 생명적 근원은 반전을 노리는 긍정적인 인식과 순명의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보는 일상이, 사물이, 사건이 이렇게 생명적이라는 데 놀라게 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본래적 의미의 생성적 질서와 그 환희의 인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마음을 열어 놓고 사물과 교감을 나누고 사물의 진면과 교응하길 좋아한다. 그의 직관과 관조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어서 어떠한 인위도 만들지 않는다. 그는 홍시의 처절한 생을 통해서 생명의 존귀를 찾고 생의 이치를 구한다. 시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일상에 자리한 아픈 이별을 체득하면서, 그것을 긍정으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 하겠다. 그의 시풍은 긍정미학과 생명의식을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하여 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명의 의식은 정 시인의 시를 감동으로 이끄는 특질이라 할 것이다.
3.
제대로 시를 볼 줄 아는 독자들은 위대하고 큰 것이 주는 압도감보다 작고 절실하고 당연한 것이 주는 소박한 감동에 더욱 매료되는 법이다. 이런 절실한 것에 대한 배려나 찬양은 시의 미덕이다.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할 작가적 사명이기도 하다. 힘든 생의 극복을 위한 시인의 노력이 큰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은 시인의 이러한 노력이 시 속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보이게, 잴 수 없는 행복을 잴 수 있게 구체어로 치환하는 능력은 역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바다의 식물성적인 푸르름 속에 펼쳐지는 생명과 긍정의 향연은 ‘동백’과 ‘홍시’의 등장으로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바로 이런 시적 원리를 통해 시가 생성된다는 데서 우리는 그의 시가 힘을 갖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갯마을에 살고 있는 서민이기에 그의 시적 질료들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것들이다. 작고 고개를 낮추고 사는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주제가 거창하거나 수사가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눈길을 주고,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을 더 챙겨주는 배려심이 큰 때문일 것이다. 갈등과 반목보다도 상생과 공존을 지향하기 위해 사물을 생태적 세계관으로 호명하고,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 우리네 삶의 원리로 환치시켜내는 탁월한 능력도 한 원인이라 하겠다. 거대하고 거룩한 지구적인 것에서 크고 화려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 시인은 지극히 볼품없는 약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서민적 삶의 태도를 취하기에, 그의 시가 감동적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이런 작은 것에 대한 배려나 찬양은 시의 미덕이다. 생활에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할 작가적 사명이기도 하다. 현대시의 독자들이 타락된 시어에 지쳐 있을 때라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선다고 하겠다. 정영학의 시선은 작고 여리고 애틋한 사물들에 대한 애정으로 물결친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인격화시켜 존재 가치를 고양시키는 시적 작업이 전체 시를 관통하며 그림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인 스스로가 삶의 부피와 무게를 포용하겠다는 뜻이리라. 미처 깨닫지 못한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여 시로 승화시켰기에 독자들은 그의 시적 지향성에 신뢰를 보낼 것으로 믿는다. 이런 독자의 신뢰를 기대하는 것은 갯내음이 나는 어촌의 언덕길을 오르며 향토적인 사물에 눈길을 두고, ‘용서’를 소주잔에 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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