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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曹谿에서 따로 나온 제5세
앞의 수주遂州 도원道圓 선사의 법손
종남산終南山 규봉圭峰 종밀宗密 선사
그는 과주果州의 서충西充 사람으로서 성은 하何씨이다.
집안이 본래 크고 번성하였으므로 어릴 적부터 유서儒書에 정통하였고,
20세쯤부터는 불교의 경전을 탐구하였다.
당나라 원화元和 2년에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조원造圓 화상의 법석法席에 잠시 들렀는데,
흔연히 뜻이 맞아서 머리를 깎아 달라 하였고 그 해에 구족계를 받았다.
어느 날 승가대중을 따라 고을 아전인 임관任灌의 집에 재齋를 올리러 갔다가
맨 아랫자리에서 차례에 따라 경을 받을 때에 원각경圓覺經 12장章을 얻었는데,
그 경을 다 보기 전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는 돌아와서 깨달은 취지를 조원에게 고했다.
이에 조원이 그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그대는 장차 원돈圓頓의 교법을 크게 펴리라.
이는 모든 부처님들이 그대에게 주신 것이다. 떠나라.
이 한 구석에 막혀 있지 말라.”
대사(규봉)가 눈물을 흘리면서 명을 받들어 하직하고 떠났다.
그리하여 형남荊南의 장張 선사[남인南印]를 뵈었는데,
장 선사가 말했다.
“교법을 전할 사람이니, 마땅히 수도에 가서 불교를 펴라.”
대사는 다시 낙양洛陽에 가서 조照 선사[봉국奉國 신조神照]를 뵈었는데,
신조가 말했다.
“보살인 줄을 누가 알아채겠는가?”
이윽고 양한襄漢으로 가니,
어떤 병든 스님이 화엄소華嚴疏 한 질을 주었는데,
바로 수도에 있는 징관(澄觀:청량) 대사가 저술한 것이었다.
대사는 일찍이 이것을 익힌 바가 없었지만 한 번 보고서도 강의를 하였다.
그는 스스로 화엄소를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했다.
“예전에 여러 스님들이 저술한 것은 그 종지를 궁구한 것이 드물어서
이 소疏의 언사言辭의 연원이 유창하고 그윽하며 심오한 진리를 밝힌 것만 못하다.
나는 선법은 남종南宗을 만났고,
교법은 원각경을 만나서 한마디에 마음 바탕[心地]이 트이고
한 권 안에서 의리義理의 하늘이 밝아졌는데,
이제 또 이렇게 절세의 소를 얻어서 내 정성을 모두 쏟게 되었도다.”
강을 마치고 나서 소疏를 쓴 사람을 한번 보고자 하였지만,
때마침 문인門人인 태공太恭이 팔을 끊어서 은혜를 보답하였으므로
우선 글로써 소를 쓴 사람에게 보내어 멀리서 제자의 예를 올리면서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태공의 상처가 나으니,
그때서야 비로소 수도로 가서 제자의 예로 뵈었다.
징관이 그에게 말했다.
“비로자나의 화장세계華藏世界에서 나를 따라 거닐이는 오직그대뿐이다.”
대사는 징관에게 입실한 뒤에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여서,
방편[筌]을 인정하고 형상에 집착하는 허물을 영원히 여의었다.
북쪽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을 갔다가 다시 악현鄂縣의 초당사草堂寺로 돌아와서 살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절 남쪽에 있는 규봉난야圭峰蘭若로 들어가서 살았다.
대화大和 때에 어명을 받고서 대궐에 들어가자 자색가사[紫衣]를 하사받았으니,
황제가 자주 법의 요체를 물었고 조정의 선비가 모두 그를 흠모하였다.
특히 상국(相國:정승)인 배휴裵休는
진리의 전당에 깊숙이 들어와 교법을 전해 받고 훌륭한 외호자外護者가 되었다.
대사는 선학자禪學者와 교학자敎學者가 서로 헐뜯고 다투는 것을 보고 마침내
선원제전禪源諸詮을 저술하였다. 즉 여러 사람이 서술한 것을 필사로 채록해서 선문의 근원이 되는 도리를 드러냈으니,
문자와 게송들로 1장藏[혹은 100권]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서문[都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禪은 인도의 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선나禪那이다.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 하니, 모두가 선정과 지혜를 통틀어 부른 말이다. 원源이라 함은 모든 중생들의 본각本覺인 참 성품으로서,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심지心地라고도 한다. 깨달으면 지혜[慧]라 하고 닦으면 선정[定]이라 하는데, 선정[定]과 지혜[慧]를 통틀어서 선禪이라 하니,
이 성품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원禪源이라 말한 것이다.
또는 선나이행禪那理行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의 본원本源은 선의 이치[禪理]이고 정념情念을 잊고 계합하는 것은 선의 행[禪行]이기 때문에 이행理行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집한 여러 사람의 저술은 선의 이치를 담론한 것은 많으나 선의 행을 말한 것은 적기 때문에
선원禪源으로 제목을 붙인 것이다.
요즈음 참 성품[眞性]만을 지목하여 선이라 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이행理行의 지취旨趣를 요달하지 못한 것이고, 또 중국과 인도의 말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참 성품을 여의고 따로 선의 체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생들이 참[眞]을 미혹해서 티끌에 계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산란散亂이라 하고, 티끌을 등지고 참에 계합하는 것을 선정이라 할 뿐이다.
만일 본래의 성품을 곧바로 논한다면 진眞도 아니고 망妄도 아니며, 등짐도 아니고 합하는 것도 아니며, 선정도 아니고 산란도 아니거늘 무엇을 선禪이라 말하겠는가?
하물며 이 참 성품은 선문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만법의 근원이기 때문에 법성法性이라 이름하고,
중생들이 미혹하고 깨치는 근원이기 때문에
여래장식如來藏識
[능가경楞伽經에 나온다.]이라 이름하고,
모든 부처님들의 만 공덕의 근원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열반경涅槃經 등에 나온다.]이라 하고,
보살들의 만행의 근원이므로 심지心地라고도 하는 것이다.
[범망경梵網經 「심지법문품心地法門品」에 말하기를
“이것이 여러 부처님의 본원이요, 행해야 할 보살도의 근본이며,
이는 대중의 여러 불자들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만행萬行이 6바라밀波羅蜜을 벗어나지 않나니, 선문禪門은 다만 그 여섯 바라밀 가운데 하나로서 다섯째에 해당하거늘, 어찌 참 성품을 모두 지목해서 하나의 선행禪行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선정의 한 가지 행行이 가장 뛰어나고 묘해서 능히 성품 위의 무루지혜無漏智慧를 일으킬 수 있나니, 온갖 묘한 작용과 만행萬行과 만덕萬德과 나아가 신통과 광명이 모두 禪定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3승乘의 학인이 거룩한 도를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禪을 닦아야 하니, 이것을 여의고서는 문門이 없고, 이것을 여의고서는 길이 없다. 심지어는 염불을 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도 16관觀의 선법이나 염불삼매念佛三昧나 반주삼주般舟三昧를 닦아야 한다.
또 참 성품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라서 범부와 성인의 차이가 없지만, 선에는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한 계급의 차이가 있다.
이른바 다른 계교를 품은 채 위를 좋아하고
아래를 싫어하면서 닦는 것은 외도선外道禪이요,
인과를 올바로 믿고는 있지만 역시 좋아하고
싫어함으로써 닦는 것은 범부선凡夫禪이요,
나[我]의 공함이란 치우친 진리만을
깨닫고서 닦는 것은 소승선小乘禪이요,
나[我]와 법法이 둘 다 공하여 참 이치를
나타낸 바를 깨닫고서 닦는 것은 대승선大乘禪이다.
[앞의 네 가지에는
모두 4색계色界와 4무색계無色界의 차이가 있다.]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 지혜의 성품이 본래 구족함을 단박에 깨달아서 이 마음이 궁극적으로 부처와 차이가 없다는 데 의지해 닦는 것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며,
또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고도 하고,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고, 진여삼매眞如三昧라고도 한다.
이는 온갖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생각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차적으로 백천 삼매를 얻게 된다.
달마達磨의 문하에서 차례차례 전하는 것이 이 禪法이다.
달마가 오기 전에 옛날 여러 사람이 이해한 것은 모두가 예전의
4선禪․8정定이니, 여러 고승들이 그것을 닦아서 모두공용功用을 얻었다.
남악南嶽과 천태天台는 3제諦의 이치에 의지해서 3지止와 3관觀을 닦게 하였으니, 교의가 가장 원만하고 묘하기는 하나 들어가는 문호門戶와
차례는 역시 앞의 여러 선법의 행상行相과 같았다. 오직 달마가 전한 것만이 단박에 불체佛體와 동등해서 여러 다른 종문과 크게 다르니, 이 때문에 종宗을 익힌 자는 그 취지를 얻기가 어렵다. 얻으면 속히 성스러움을 이루어서 조속히 보리를 증득하지만, 잃으면 삿됨을 이루어서 신속히
도탄塗炭에 빠진다.
선조先祖들은 우매함을 고치고 잃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사람이 한 사람씩에게 전했지만, 후대에 와서는 이미 의지할 것이 생겼으므로 천 등불에 맡겨 천 곳을 비추게 하였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어 폐단을 이루면서 잘못 아는 이가 많아져, 경론經論을 배우는 학인들의 의혹이나 비방도 많아졌다. 원래 부처님께서는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를 말씀하셨고,
선법에는 돈문頓門과 점문漸門을 열었는데, 두 교법과 두 선법은 각기 서로가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즈음 강의하는 자는 점문의 뜻만을 치우치게 드러내고, 선禪하는 이는 돈문의 종지만을 치우치게 전파하니, 선사와 강사가 서로 호월胡越의 거리만큼 멀리 벌어지게 되었다.
나[宗密]는 전생에 어떤 업을 지어서 이 마음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해탈치 못하고서 남의 속박을 풀어 주려고 하는가? 법을 위해서는 몸과 목숨을 잊었고, 남을 연민하는 것은 감정과 정신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정명경淨名經에서 말하기를 “자기에게 속박이 있으면서 남의 속박을 풀어 준다고 함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만두려 해도 그칠 수 없으니 이는 전생의 습기[宿習]를 고치기 어렵기 때문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매번 법과 사람이 어긋나서 법이 사람의 병이 됨을 한탄하였으므로 따로 경과 율과 논과 소를 지어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의 문을 크게 열었다. 돈오를 드러내어 점수에 자량資糧을 주어서 조사의 말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됨을 증명하였다. 뜻은 이미 본말을 자세히 보였지만, 글이 많고 방대하여서 찾기 어려운 탓에 배우는 이는 많으나 뜻[志]을 얻은 이는 적었다. 하물며 자취가 이름[名]과 모습[相]에 걸렸으니, 어찌 금과 놋쇠를 구별하리오? 헛되이 수고할 뿐 근기의 감응은 아직 보지 못했다.
비록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 늘리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고 설하셨으나, 스스로 애견愛見을 막기 어려울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중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익혀서 앞과 뒤로 생각을 쉰 것이 무릇 10년이었다.
[앞뒤라 함은 중간에 조칙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서 성안에 2년을
살다가 청을 올리고서야 다시 산으로 돌아온 것을 이른다.]
미세한 습기와 감정의 일고 꺼짐이 고요한 지혜에 밝게 드러나고, 차별법의 뜻이 벌려져서 공심空心에 나타나서 마치 빈틈으로 비추는 햇빛에 가는 티끌이 아물거리고 맑은 못 밑의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아졌으니, 어찌 공연히 침묵을 지키는 어리석은 선법이나 글줄만을 찾는 미친 지혜에다 견주겠는가?
그러나 본래부터 스스로의 마음을 요달해서 모든 교법을 분별했기
때문에 심종心宗에 마음이 간절했고, 또 모든 교법을 분별해서
마음 닦는 법을 이해했기 때문에 교의敎義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교리[敎]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남기신 경론이요,
선禪이라 함은 여러 선지식들이 서술하신 어구와 게송이니라.
다만 불경은 펼쳐서 대천세계의 팔부대중을 망라하였고,
선의 게송은 간략하여서 이곳의 한 종류 근기에만 나아갔으니,
대중을 망라하면 드넓어서 의지하기 어렵고, 한 근기에 나아가면
핵심을 가리켜서 쓰기가 쉬우니, 이제 찬술하여 모으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배휴裵休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종파의 문하에는 모두 통달한 사람[達人]이 있다. 그러나 제각기 익힌 바에 안주해서, 통달한 이는 적고 국집하는 이는 많게 되었다. 수십 년 이래로 조사의 법이 더욱 파괴되어서 이어받은 것으로 문호를 삼아 제각기 벌여 놓은 채 경과 논을 무기로 삼아서 서로 서로가 공격을 일삼는다. 감정이 갑옷[函]을 만드는 사람과 화살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변천하고,
[주례周禮에 말하기를 “함인函人은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화살 만드는 사람이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는 어찌 어질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걱정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가 익히는 술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다만 종도宗徒를 따라 피차 서로 비난할 뿐이다.]
법은 나와 너를 따라서 높고 낮아지니, 시비가 분분히 일어나서 판가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난날 세존과 보살과 제방의 종파의 교종敎宗이 충분히 뒷사람들로 하여금 논쟁을 일으키게 하여 번뇌의 병만 더하게 할 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에 규산圭山 대사가 오래 탄식하다가 말하기를 ‘내가 이때를 당하여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래의 세 가지 교의로써 선종의 세 가지 법문을 인증하니, 병․소반․비녀․팔찌를 녹여 하나의 금으로 만들고, 소락酥酪과 제호醍醐를 섞어서 한 맛이 되게 하는 것과
같고, 벼리[綱]와 옷깃[領]을 잡으면 들리는 것이 모두가 순조롭고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마치 갑옷의 옷깃을 들 때에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기만 하여도 끌려오는 것처럼
순조롭게 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였다.]
도회지를 의거하여 오는 자가 모두 같은 곳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주역약례周易略例에 말하기를 “도회지를 의거해서 사방에서 오는 이를 보면 천지사방<六合>으로부터 아무리 많이 와도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도서都序가 원교圓敎에 의하여 모든 종취宗趣를 감정하면 아무리 백가百家의 학설이라도 총괄하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히려 배우는 자들이 밝히기 어려울까 걱정해서 다시 근본과 근원의
본말本末과 진망眞妄의 화합과 공종空宗과 성종性宗의 숨고 드러남과 법法과 의義의 차별됨과 돈점頓漸의 같고 다름과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의 엇바뀜[迴互]과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깊고 얕음과 통달함과 국집함의 시비是非를 곧바로 보셨다.
우리 스승 같은 분은 부처[佛日]를 받들어서 간곡히 돌이켜 비추어서 의혹에 가린 마음을 모두 제거하고, 부처의 마음[佛心]에 순응하여 큰 자비를 널리 펴서 겁이 다하도록 이익을 받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교리를 펴신 주인이요, 우리 스승은 교리를 회통 시킨 사람이니, 본말이 서로 부합하고 멀고 가까움이 서로 비추어서 일대시교一代時敎의 장한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세존께서 가르침을 펴신 이래로 오늘날까지 그것을 회통하니
“가히 장한 일을 마쳤다”라고 한 것이다.]
혹 어떤 이가 묻기를 ‘여래로부터 아직까지 통틀어서 회통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종취宗趣를 어겨서 지키지 않나니, 관방關防을 폐지하여 의거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비밀히 갈무리하고 은밀히 계합하는 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이에 대답하되 ‘여래께서 처음에는 3승을 따로따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도로 회통하였느니라’ 하였다.
[30년 전에는 소승을 말씀하시기도 하고, 공교空敎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상교相敎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성교性敎를 말씀하시기도 해서 듣는 이가 제각기 성품에 따라 깨달았으나 서로 통하여 알지 않았다. 하지만 40년 뒤에는 영취산에 앉아서 3승을 희통하고 구시拘尸에 가서 한 성품을 드러내셨으니, 이것이 전후의 일정한 궤칙軌則이었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가섭보살이 찬탄하기를 ‘모든 부처님들은 비밀스런 말씀[密語]은 있어도 비밀스런 창고[密藏]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세존께서 칭찬하시기를 ‘여래의 말은 열려 있고 드러나고 청정하고 가림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서 비밀스런 창고라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요달하여서 창고라고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므로 왕도王道가 흥왕하면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이 지켜지고, 불도가 갖추어지면 모든 법을
총체적으로 지니면서도 마군과 외도는 막아진다.
[열반의 원교圓敎에서 모든 법을 화합하여 회통하되,
악마의 교설과 외도 논사의 삿된 교설만은 분명히 가려내었다.]
그러니 다시는 망정에 집착해서 팔을 그 사이에 흔들지 말라.”
[대사는 또 원각경의 대소大小 두 소초疏鈔를 지었고,
법계관문法界觀門과 원인론原人論을 지었는데 모두
배휴裵休가 서문을 지었으니,세상에 성행하였다.]
대사는 회창會昌 원년(元年, 841) 정월 6일에 흥복사興福寺 탑원塔院에 앉아서 입멸하니, 그 달 22일에 도속道俗들이 시신을 규봉圭峰에다 모셨다가, 2월 12일에 화장을 하여 밝고 크고 윤택한 사리를 얻었다. 나중에 문인들이 울면서 구하니, 모두가 타고남은 재 속에서 얻었는데 다 석실石室 속에 봉안하였다. 그의 수명은 62세이고, 법랍은 34세였다.
대사는 유언하기를 “시체를 메다가 새와 짐승에게 보시하고, 뼈는 태워서 흩뿌려라. 슬퍼하고 사모하다가 선관禪觀을 어지럽히지 말것이며,
매년 청명淸明 때에는 산에 올라가서 7일 동안 살림[講道]을 하라.
그 밖의 주지하는 법은 계율에 맞출 것이며, 어기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상복을 입은 사부대중, 수천 백 명이 슬피 울면서 들판을 뒤덮었는데, 선종宣宗이 다시 불교를 세우게 되면서 정혜定慧
선사라는 시호를 추가로 하사하고, 탑호는 청련靑蓮이라 하였다.
상공相公인 소면蕭俛이 자기의 견해를 바치고,
선사에게 주석注釋하여 주기를 다음과 같이 청했다.
“하택荷澤 선사가 말하기를
‘모든 삼매에서 청정한 본체를 보면, 8만 4천의 온갖 바라밀문도
모두가 소견을 통해 한 때 일어나 작용하는 것일 뿐이니, 이를 이름하여 혜안慧眼이라 한다. 만약 진여와 상응할 때를 당當한다면
[선악善惡을 생각하지 않고, 공유空有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 가지 변화가 적멸하니
[만법이 모두 생각과 반연에서 생겨 모두가 허공인 까닭에 변화라 한다. 이미 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 만법이 전혀 일어나지 않겠기에 없애지 않아도 자연히 적멸하게 된다.]
이때에는 다시 보는 바가 없고,l
[비추는 본체가 홀로 섰고 꿈과 지혜에는 계급이 없어진다.]
삼매의 온갖 바라밀문도 일시에 공적해서 다시 얻을 바가 없다’
[산란散亂과 삼매三昧, 이 언덕과 저 언덕은 마주 대하여 물리치는 말인데, 마음에 망념이 없고 성품에 생멸이 없음을 알면 선정과 어지러움, 참과 허망이 일시에 적멸해지니, 따라서 얻은 바가 없다.]
고 하니, 이것이 소견에 의해 일시에 일어나 작용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소견의 성품이 원명圓明하고 이치는 형상을 여의었으니, 형상을 끊으면 묘한 작용이 되고, 형상에 머무르면 집착하는 정이 된다. 8만 법문이 모두가 그러하여서 한 법이 있으면 하나의 티끌이요, 한 법이 공하면 하나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소견의 청정한 본체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이후에 저에게 대답을 보내 주십시오.”
사史 산인山人의 열 가지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답問答마다 각각 한 권이므로 이를 참작해서 필사한다.]
첫 번째 물음:어떤 것이 도이며, 어떻게 닦습니까?
반드시 닦아서 이루어야 합니까,
아니면 공용功用을 빌리지 않는 것입니까?
답변:걸림 없음이 도이고 허망을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도는 본래부터 원만하나 허망하게 일어남이 허물이니,
허망한 생각이 몽땅 다하면 그것이 바로 닦아 이루는 것이다.
두 번째 물음:만일 도가 닦아서 이루어진다면 이는 조작造作하는
것이라서, 세간법이 허망해서 실답지 않으므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무너지는것과 똑같으리니, 어찌 세간을 벗어난 법이라이름하겠습니까?
답변:조작이란 업業을 짓는 것이니, 이름하여 거짓된 세간[虛偽世間]이다. 조작 없음이 바로 수행이니, 곧 진실인 출세간이다.
세 번째 물음:그 닦는 바라는 것은 돈수頓修입니까, 점수漸修입니까?
점수라면 앞의 것을 잊고 뒤의 것을 잃으리니, 어떻게 모아서
이루 겠습니까?돈수라면 만행의 길이 많거늘
어찌 일시에 원만하겠습니까?
답변:참 이치[眞理]는 즉각 깨달음으로써 단박에 원만해지고, 망령된
정情은 그 정을 쉼으로써 점차적으로 다한다. 단박에 원만함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일시에 팔다리가 이미 온전한 것과 같고,
점차적 으로 닦음은 마치 오래 길러서 어른이 되어서야 의지와
기상이 서는 것과 같다.
네 번째 물음:무릇 심지心地를 닦는 법은 마음을 깨달으면 곧 요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로 행문行門이 있습니까? 만약 따로 행문이
있다면 무엇을 남종南宗의 돈오의 종지라 이름하며, 만약 깨닫는
즉시 모든 부처님과 같다면 어찌 신통 광명을 발하지 않습니까?
답변:얼음이 언 연못이 전부 물인 줄 알지만 햇볕을 빌어야 녹고,
범부인 채로 참[眞]이란 것을 깨달아도 법력法力을 빌어야 닦아
익힌다. 얼음이 녹으면 물의 흐름이 원활해져서 바야흐로 관개의
공功을 드러내고, 허망이 다하면 심령이 통하여 비로소신통 광명의 감응을 발휘한다.그러니 마음을 닦는이외에 다른행문行門은 없다.
다섯 번째 물음:만일 마음을 닦기만 하여도 부처를 이룬다면,
무슨 까닭에 모든 경전에서는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여야 비로소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고 설하였습니까?
답변:거울이 밝으니 그림자에 천 가지 차별이 있고, 마음이 맑으니
신통이 만 가지로 감응한다. 그림자는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을
비유하고, 신통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비유했다. 그러나 장엄이
면서도 곧 장엄이아니고,그림자이지만 또한 색色이면서 색이아니다.
여섯 번째 물음:여러 경에서 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라”고 하였으나,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수고롭게 제도하여
해탈케 해야 합니까?
답변:만일 중생이 실답다면 제도하기가 수고롭겠지만, 이미 스스로
말하기를 “곧 중생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제도하되 제도함이 없음을 예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곱 번째 물음:여러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상주常住하신다”고 하고, 혹은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신다”고 하였는데, 상주하시면 열반에 들지 않을것이요,열반에 들면 상주하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이 어찌 서로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변:온갖 모습을 여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하니, 어찌 세상에
나오거나 열반에 드는 실체가 있으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은
기연機緣에 달려 있는 것이니, 기연이 감응하면 보리수 밑에 나타
나시고, 기연이 다하면 사라娑羅 숲 사이에서 열반에 드신다. 마치 맑은 물이 무심해서 나타내지 못하는 영상이 없는 것과 같나니,
영상은 나의 것이 아니라 외적인 껍데기[外質]가 가고 오는것일
뿐이다.모습은 부처의 몸이 아니거늘 어찌여래께서 출몰함이있으랴?
여덟 번째 물음:부처님께서는 변화로 해서 태어나셨는데,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생겨
남이 없으니[無生], 그렇다면 생겨남[生]이란 무슨 뜻입니까?
만일 마음이 생기면 법도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법도 멸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겠습니까?
답변:이미 변화한 것과 같다고 했으니, 변화함[化]은 곧 공空이다.
공은 바로 무생이거늘 어찌 생겨남의 뜻을 따지는가? 생멸이 멸하고 나면 적멸이 참[眞]이 되니, 이 법의 무생을 인가忍可한 것을
이름하여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 물음:모든 부처님들께서 도를 이루시고 설법을 한 것은 다만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중생은 이미 여섯갈래 길
[六道]에 모두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인간 세계에서만 나타나서 머무르십니까?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가섭에게 법을 부촉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시고, 나아가 중국에 이르러서 7조祖도 매양 한 사람에게만 전하였으니, 이미 “온갖 중생에게 모두 외아들의 지위를 얻게 한다”고 하고서 어찌하여 두루 전해 주지 않았습니까?
답변:해와 달이 하늘에 떠서 6합合을 함께 비춰도 소경은 보지 못하고, 엎어진 동이 밑은 밝히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해가 두루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장애물의 탓이다. 제도하는 것과 제도하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이처럼 유사하니, 인간과 천상에만 국집해서
귀신과 축생을 가려내지 말아야 한다. 다만 인도人道에서만 경전을 능히 결집해서 끊임없이 전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인간에만 나타나 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가섭에게 부촉 해서 차례차례 한 사람씩만 이어받은 것은 그 당시의 교주敎主를 말한 것이어서, 마치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실제로 제도를 받은 이가 그것뿐인 것은 아니다.
열 번째 물음:화상은 무엇을 인하여 발심했으며, 어떤 법을 사모해서 출가 했으며, 지금은 어떻게 수행하며, 어떤 법의 맛을 얻었으며, 수행한 바가 어떤 지위에 이르렀습니까? 지금은 마음을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닦으십니까? 마음을 머물게 한다면 마음 닦는 일에 방해가 될 것이요, 마음을 닦는다면 생각이 움직여서 편안치 못할 것이거늘, 어찌 도를 배운다고 하겠습니까? 또 마음을 편안히 해서 하나로 정해지면, 어찌 성품이 결정된 무리와 다르겠습니까?
바라건대 대덕께서 대자대비를 베푸시어 이치대로 여여如如하게
차례차례 대답해 주십시오.
답변:4대大가 허깨비 같음을 자각하고, 6진塵이 허공의 꽃 같음을 통달
하며,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고, 본 성품이 법성임을 보면 이것이 발심發心이요, 마음이 머무를 바 없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요, 머무를 바 없는데도 알면 그것이 바로 법의 맛[法味] 이다. 법에 머물러 집착하면 그것이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고, 이제 머무는 바가 없으면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눈이 있고 태양의 광명이 있으면 갖가지 법을 보는 것과 같다. 어찌 까닭 없이 결정된 성품의 무리라 하겠는가? 이미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어찌 장소를 논하겠는가?
또 산남山南의 온조溫造 상서尙書가 물었다.
“이理를 깨닫고 망상을 쉰 사람은 업을 짓지 않는데,
한 번 받은 수명이 다한 뒤에는 영성靈性은 어디에 의지합니까?”
“온갖 중생은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갖추지 않은 이가 없으니, 신령스럽게 밝고 공적함이 부처와 다름이 없다. 다만 비롯함이 없는 겁 이래로 아직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허망하게 몸을 집착하여 나의 모습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 따위의 정情을 일으키고, 그 정에 따라 업을 짓고, 업에 따라 생․노․병․사의 과보를 받아서 오랜 겁 동안 윤회한다.
그러나 몸 안에 있는 깨달음의 성품[覺性]은 일찍이 태어나거나 죽은 적이 없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남에게 이끌려 수고를 했지만 본래의 몸은 한가하고, 물이 얼음이 되었지만 습기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만일 이 성품이 곧 법신임을 깨달으면 본래 스스로 무생이니,
어디에 의탁할 곳이 있으랴?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워서 어둡지 않고 명료하고 명료해서 항상 알고 있으니, 좇아서 온 곳도 없고 또한 간 곳도 없다.그러나 많은 이가 허망한 집착을 내고 습기習氣로 성품을 이루어서 기쁨․성냄․슬픔․즐거움이 미세하게 흘러든다. 참된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달았으나 이 망령된 정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모름지기 오래오래 각찰覺察해서 덜고 또 덜어야 한다. 마치 바람이 단박에 그쳐도 물결은 차츰차츰 멈추는 것과 같나니, 어찌 일생 동안 닦은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역용力用과 같을 수 있으랴?
다만 공적空寂으로써 스스로의 체體를 삼을지언정 색신色身을 인정하지 말 것이며, 신령스런 앎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삼을지언정 허망한 생각[妄念]을 인정하지 말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도 전혀 따르지 않으면, 목숨이 다할 때에는 자연히 업業이 속박하지 못할 것이니, 비록 중음신[中陰]이 있다 하여도 향하는 바가 자유로워서 천상이든 인간이든 뜻대로 의탁하리라.
만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이미 없어지면 분단신(分段身:몸)을 받지 않아서 스스로 짧은 것을 길게 바꿀 수 있고, 거친 것을 묘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만일 미세한 흐름이 모두 적멸해지면 오직 원각圓覺의 큰 지혜만이 환해져서 홀로 존재하리니, 이것이 곧 기연의 감응에 따라 천백 억의 몸을 나타내어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서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삼가 대조하여 해석하건대,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백 가지 대승경大乘經의 종지를 모아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짓고, 그 논서 안에서 종지를 세우되 ‘온갖 중생의 마음에는 깨달음의 뜻과 깨닫지 못함의 뜻이 있는데, 깨달음에 다시 본각本覺의 뜻과 시각始覺의 뜻이 있다’고 하였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는 비록 이치를 비추고 마음을 관찰하는 곳에서만 말했으나, 법의 뜻은 도리어 저 기신론과 같다.
이른바 처음에서부터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고 한 곳까지는 본각本覺이요, ‘다만 비롯함이 없는’ 이하는 불각不覺이요, ‘만일 이 일을 능히 깨달으면’부터는 시각始覺이다. 시각 중에도 돈오와 점수가 있으니, 이로부터 다음에 ‘가는 곳도 없다’는 데까지는 돈오요, ‘그러나 많은 이가 허망한 집착을 낸다’ 이하부터는 점수이다.
점수 중에도 처음 발심에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세 지위의 자재함이 있으니, 이로부터 ‘뜻대로 의탁한다’는 곳까지는 생을 받는[受生] 자재함이요, ‘만약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 이하는 변역變易의 자재함이요, ‘만약 미세한 흐름’ 이하는 구경究竟의 자재함이다. 또 ‘다만 공적空寂을 스스로의 체體로 삼을 수 있다’에서부터 ‘자연히 업이 속박하지 못하리라’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이理를 깨달은 사람이 조석으로 마음을 행하고 지관止觀을 닦아 익히는 요긴한 대목이다.
내[宗密]가 먼저 여덟 구절의 게송으로 이 뜻을 드러내어 일찍이 상서의 처소에서 읊고서 명命을 받들어 해석하였다. 이제 여기에 다음과 같이 삼가 주석注釋을 하니, 게송과 주석은 다음과 같다.”
뜻[義] 있는 일을 하면 깨달은 마음이요
[뜻<義>이라 함은 의리義理를 말함이지, 인의仁義나 은의恩義를 말한 것은 아니다. 뜻인즉 대체로 작위作爲한 바를 밝힌 것으로서 먼저 이해利害를 상세히 하였는데, 이로써 도리에 맞는 바가 있은 뒤에 행해야만 바야흐로 똑같이 취하고 미친 사람을 면하게 된다. 불법佛法에 나아가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이는 곧 행할 만한 것이다.
첫째는 색신色身을 자량資糧하는 일로서 옷․음식․의약품․
방사房舍 등 세간의 뜻이요,
둘째는 법신을 자량하는 일로서 이른바
계․정․혜․6바라밀다 등의 제1의第一義요,
셋째는 바른 법을 널리펴서 뭇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는것이다. 나아가 법을 위하는 온갖 반연의 일은 세간과 출세간에
다통한다.]
뜻이 없는 일을 하면 미친 마음이니
[이른바 대체로 작위하는 바가 위의 세 가지 일을 반연치 않으면 곧 뜻 없다<無義>고 한다.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가령 세간의 취하고 미친 사람이 어디를 가든 처소를 분간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어떤 뜻과 이로움이 있는지 분간하지를 못한 채 다만 정情과 망념을 따라 하고자 하면 그대로 하기 때문에 미친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위의 4구句는 업인業因을 서술한 것이며, 아래의 4구는 과보를 받음을 말한 것이다.]
광란狂亂으로 정념情念을 따르면 임종할 때 업에 이끌리고
[이미 망념에 따라서 하고 싶으면 곧 할 뿐이지 이理를 깨달은 지혜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니, 마치 미친 사람과 같다. 이 때문에 임종할 때에 업의 길에서 업에 이끌리게 되어서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말하기를 “무명의 서방님과 탐애貪愛의 마왕이 몸과 마음을 부리기를 종을 구박하듯 한다”고 한 것이다.]
또렷하게 깨달아서 정情을 말미암지 않으면 임종할 때에 업을 바꿀 수 있다.
[정情 속에 작위하고 싶어도 이理를 살펴서 감응하지 않거든 즉시 멈추어야 하고, 정情 속에 작위하고 싶지 않아도 이치에 비추어서 상응하면 즉시 해야 한다. 다만 시비의 이理를 말미암아야지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임종할 때에 업이 능히 속박할 수 없고 하늘과 인간을 뜻대로 자재하게 된다. 결론지어 말하건대, 아침저녁에 하는 일이 망정의 티끌에 이끌리면 임종할 때에 업에 이끌려서 태어남을 받게 되고, 만약 작위하는 바가 자각의 지혜를 말미암고 망정의 티끌을 말미암지 않으면 임종할 때에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태어남을 받아서 업을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험 삼아 임종할 때 태어남을 받는 것이 자재로운가, 자재롭지 못한가를 알고 싶다면, 다만 티끌 경계에 대한 평소의 행심行心이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못한가를 시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사가 상당上堂해서 말했다. 신수대장경 주註에 의하면, 이 부분부터 13권 끝까지는 명본明本과 원본元本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부기附記해 놓은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 내용은 앞의 여주汝州 풍혈風穴 연소延沼 선사에 나온다.
“조사의 심인(心印:마음 도장)을 오늘 온전히 제시하겠다. 가면 심인이 머물겠지만, 머물면 심인이 파괴되리라. 다만 가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면, 인印을 쳐야 옳은가, 치지 말아야 옳은가? 대중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때 노피盧陂 장로가 물었다.
“학인學人에게는 무쇠 소의 기용이 있으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도장을 그냥 두지 마십시오.”
대사가 말했다.
“원래 고래를 잡기 위해서 맑고 큰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달팽이 걸음을 하며 진흙 모래 위를 헤매는구나.”
노피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대사가 불자로 입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앞서 한 말을 기억하는가?”
노피가 말했다.
“기억합니다.”
대사가 말했다.
“말하여 보라.”
노피가 입을 열려고 하자, 대사가 또 한 번 불자로 때렸다.
대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하였다.
“대개 참학參學하는 안목이라면,
모름지기 기용에 임해서 곧바로 대용大用이 현전해야지
소소한 예절에 스스로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설사 말 이전에 얻었다 해도 오히려 껍질에 막히고 미혹된 것이며,
비록 언구 아래 정밀히 통했다 해도 길에 이르러서는 미친 견해를
면하지 못한다. 여러분들을 살펴보건대,
예전에 남에 의지해 배우고 이해한 것으로 양 갈래
길에서 헤매고 있으니,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일제히 쓸어버리리라.
그리하여 저마다 큰 사자가 되어 땅에 버티고 선 채 외마디
포효하고서 천 길 벼랑에 서면, 누가 감히 정안正眼으로 엿보겠는가?
만약 엿본다면 당장 그의 눈을 멀게 하리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집안의 곡조를 노래하시며,
종풍宗風은 누구를 이으셨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위음왕불 밖으로 아득히 초연하게 벗어났거늘,
공연히 발돋움하고 서서 수고롭게 저사底沙를 찬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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