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我)·무아(無常) 바로 아는 것이 ‘연기’
공기는 무게가 있을까? 1640년 토스카나 대공은 집 뜰에 우물을 파서 펌프로 물을 퍼 올렸는데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갈릴레이에게 왜 물이 올라오지 않는지 해결하라고 했다. 갈릴레이는 제자 토리첼리에게 이 문제를 주었다. 유명한 토리첼리 진공관이 탄생하게 된다. 밀도가 큰 수은으로 실험을 한 결과 공기의 무게(기압)는 수은주 76cm를 밀어 올리는 무게임을 알았고, 물로 계산하니 10m 정도 물을 밀어 올릴 수 있는 무게였다. 공기 무게 1기압은 1013mb이며, 물의 높이 1013cm에 해당한다. 대부분 우물은 깊이가 10m 미만 이었는데, 이 우물은 물이 나오지 않아 계속 파다보니 깊이가 11m였던 것이다. 공기 1기압이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은 10m인데 깊이가 11m가 되니 물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공기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람이 되는 것이며, 2003년 135명의 인명피해와 약 50조 원의 재산 피해를 낸 태풍 매미가 부산에 상륙했을 때 기압이 910mb였고, 최대 풍속 53m/s의 태풍이었다. 그러므로 달과 같이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공기로 채워진 공간인 것이다.
부처님 ‘왜 죽는가?’ 고민해 출가
존재에 대한 고민과 수행 통해
온 우주의 존재 법칙을 깨달아
무아·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
▶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생에서 살아가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다음 생에서도 똑같이 원망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이다. 특히 원망하는 마음이 가장 지독한 것이고 강하게 남는다. 그 원망하는 마음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따지고 보면 다 본인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본인 중심의 생각에서 이루어진다.
부처님은 왜 출가를 하셨고 수행자가 되셨는가? ‘왜 죽는가’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몰두한 것이다. 바로 부처님께서 깨친 법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얻은 답인 연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기를 제대로 알아야한다. ‘왜 죽는가’에 대한 문제 해답은 연기인 것이다.
옆집에서 부부 싸움이 일어났나 보다. 그릇 던지는 소리, 물건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부부가 싸움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왜 싸움을 하겠는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이 잘났다고 하고 부인은 부인대로 자기가 잘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부부싸움하면 누가 손해를 보는가? 자식이 옆에서 싸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자식이 그 영향을 받는다. 그릇이 하나 깨져도 그 집 그릇이 깨지고 자식이 잘못되어도 자기 자식이 잘못된다.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조금만 내 범주 안에 들게 해보면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해관계가 상충되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 지옥에 있는 중생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존재한 모든 것이 무아(無我)라고 인식하는 만큼 내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 우주는 무아 속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법을 진정으로 가르쳐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가르침을 가르쳐줌으로써 부처님은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지옥에 가 있는 중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누가 마음이 불편한가? 지장보살의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누구나 무아를 인식하고 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즉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불교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 부처님께서는 도둑질하는 도둑을 보면 벌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도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부처이다. 바로 부처의 한 부분인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제대로 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내가 알아야 되고 내가 부처가 되어야 되고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나? 내가 행복함으로써 나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주위를 빛으로 만드는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힘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미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무아를 인식하는 힘으로 하나의 무생물에게까지 미치는 힘인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항상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상이라 했을 때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항상 끊임없이 변한다고 했다.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이해가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대부분 쉽게 감지하고 느껴온 부분이다. 내가 이러이러하기에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현재 몸을 받아서 지금까지 흘러오면서 느낀 부분이 무상이다. 나도 변하고 대상도 변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무상을 절절하게 표현한 티베트의 성자 말라레빠의 시가 있다.
이 세상 모든 것 덧없고 무상하여서/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내 나이 어렸고/ 내가 성인되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진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나는 집을 떠나 없었고/ 나 이제 돌아오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진 못할 것 /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경전이 있을 때 공부할 사람 없었고 공부할 사람 돌아오니 경전 이미 낡고 헤졌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진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독립적 존재는 없다.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라고 하는 실제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의 중요한 개념이다. 무아는 ‘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으로 연관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바로 무아에 대한 인식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인 무아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앞에서 뉴턴은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서로 힘이 작용한다고 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가 다 연관되어 있고 영향을 미치고 공동으로 존재한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말로써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얼마만큼 알고 이해하고 체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불교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부분들이 달라질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만 잘 인식하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자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했다. 아직까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범주에는 자식이 들어가고 남편이 들어가고 부모가 들어간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프면 아프고 부모가 편찮으시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 들판에 늘려있는 풀잎들/ 흩어놓으면 아무 것도 없는데/ 모아 엮으면 한 칸의 초가집
연기는 빨리어로 ‘빠띠짜사무빠다(Paticcasa muppada)’라고 한다.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언어이다. ‘빠띠짜(Paticca)’는 ‘~로 인하여’, ‘~을 원인으로 하여’라는 뜻이고, ‘삼(sam)’은 잘, 분명하게, 정확하게, 바르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우빠다(uppada)’는 발생이라는 뜻이다. 즉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정확하게 결과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의존하여 발생하는 법칙이다. 이것이 나타내는 의미가 ‘연기’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표현을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 생기고/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 없어지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고 했다. 이는 상응부 경전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연기를 설명할 때 ‘이것과 저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연기의 12지분이며, 응용으로 사성제 등 세상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무아와 무상에 대한 인식이 연기였고 왜 죽어야하는가? 결론적으로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가의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무아와 무상이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고(苦)인 것이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하는 그 순간 나한테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적정이다. 또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을 연기이고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내가 아는 만큼 내 것이 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다.
인과를 100% 확신할 수 있다면 완전한 믿음이 일어나는데, 100%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할 때 인과법칙이 성립한다면 100%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살아왔던 모습대로 지금 살고 있는 것은 60%가량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교하고 인연이 되어 좀 더 바른쪽으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우리는 공부함으로써 이것을 100%로 내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김성규 영남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