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마리가 부른 'L`Amour De Mon Amoureux'의 원곡은 바로 '내 님의 사랑은'이다. 원곡으로 다른 샹송이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내 님의 사랑은'은 싱어송라이터 이주원의 작품이다. 그는 1970년대 특유의 감수성을 담아낸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같은 곡들을 작사·작곡해 명성을 날린 한국 포크계의 한 봉우리다.
서울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주원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양희은을 통해 획득되었다. 앞서 말한 곡들이 대부분 양희은의 목소리로 알려졌다. 김민기 이후의 양희은은 그와 콤비를 이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던 것이다. '옛 시인의 노래'로 유명한 한경애의 데뷔 앨범도 이주원의 작품이다.
이주원의 음악 데뷔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7년부터 밴드 블랙스톤을 결성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소위 미8군 출신 뮤지션이었다. 당시 그는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담당했다. 양희은의 히트곡 '내 님의 사랑은'은 그 당시인 1968년에 창작한 노래.
이주원은 "인생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존재하고 영위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늘 무언가를 사랑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이가 쓰다 물려준 만년필을 너무 사랑한 그는 그 만년필로 쓴 일기를 다 쓰고 나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 님은 사랑은'은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노래라기보다는 교회 다닐 때 만났던 여학생이나 짝사랑의 대상 때문에 경험한 외로운 정서를 그려낸 노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통기타 가수로 변신한 그는 재수를 하던 중 '세시봉'에서 윤형주과 송창식을 만났고 1971년 서울 YWCA 청개구리에서 양희은 김민기 서유석 투코리언스 이용복 백순진 이수만 4월과5월 홍민 등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포크신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함께 어울리면서도 그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음악작업 방식을 고집했다. 그래서인지 그룹 이름도 '따로 또 같이'였다. 3년 정도 뒤늦게 서울대 체육학과에 진학했던 이주원은 YWCA 청개구리에서 만난 양희은에게 히트 넘버를 선사하게 된다. 가수보다는 작곡가로 이름을 먼저 떨치게 되기까지의 사연이다.
당시 양희은은 이주원의 노래를 불렀다 하면 히트가 터져 이주원은 양희은의 전속작곡가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처럼 이주원은 작곡가로 대중에게 먼저 알려졌지만 1976년에 독집 <외로움에>를 발표한 가수이기도 했다. 이 1집 앨범은 꽤 희귀한 음반으로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콜렉터스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는 삶의 경험을 노래한 음유시인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포크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가사를 멜로디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티스트의 창작 방식은 각기 다르다. 멜로디를 중시해 가사를 붙이는 이도 있고 멜로디와 가사 모두를 중시하는 이도 있다. 이주원은 가사가 먼저 정리되지 않으면 일체의 작업 진도가 나가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곧 삶의 반영이었다.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였던 그의 음악적 정점은 1979년 전인권, 강인원, 나동민과 함께 결성한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라 할 수 있다. 따로 또 같이의 1집은 조동진 1집와 더불어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 유종의 미를 알리는 걸작이었다. 또 1984년에 나온 따로 또 같이의 2집은 1980년대 대중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알린 기름진 자양분이었다. 이들의 2집은 그때까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앨범의 완성도를 지향했던 한 차원 다른 개념의 앨범이었다. 2집에 담긴 곡과 연주의 탁월한 감각과 세련된 연주력은 적어도 그때까지의 대중가요 음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1985년에 발표한 3집 또한 명불허전이다. 불후의 명반 들국화 1집과 함께 탄생한 그 음반은 왜 따로 또 같이를 1980년대에 반드시 거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었다. 아마도 들국화 1집과 따로 또 같이 3집은 19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반일 것이고, 1930년대와 60년대를 이어 제3의 한국 대중음악 부흥기를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그의 음악 궤적에서 꼭 언급해야 하는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는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계열의 선두주자 격이라 평가할 만큼 대중적 파급력과 그들만의 음악적 감성을 토해낸 음악집단이었다. 포크를 기반으로 하지만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선보였다.
들국화 더불어 80년대의 라이브 공연 문화의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강인원이 빠진 3집에서 나동민과 함께 아트록 성향이 강한 '해는 기울어 어느 가슴으로','가네' 접속곡을 발표했던 이들은 대중성에 침전하기 보단 음악성에 몰입해 후배 뮤지션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의 멤버들은 탁월한 음악성과 맑은 감성의 보컬로 척박해진 1980년대 포크음악을 대중에게 선사했던 뮤지션들이었다. 당시 미완의 대기였던 전인권은 후에 들국화의 리드 싱어로 거듭났고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나동민은 '노찾사'에서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다. '내가 찾는 아이', '조용히 들어요', '잠못 이루는 이밤을' 등은 그가 남긴 좋은 노래들이다.
이주원의 부인이 바로 전마리다. 그녀는 1985년부터 프랑스문화원 '샹송 클럽'에서 샹송을 가르쳐 온 수준급 실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인천에서 카페를 함께 운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주원은 아내를 통해 문학적 자양분을 섭취했노라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우리 정서를 외국에 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말로 된 노래를 부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외국 가요의 일방적인 유입에서 탈피해 동등한 입장에서 가요문화의 교류의 장을 가져야 한다는 앞선 생각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 부부는 2년 간의 번안 작업 끝에 지난 1990년 국내의 주옥 같은 포크송들을 프랑스어로 바꿔 부른 우리가요 음반을 냈다. 프랑스에서 기대보다 큰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에 인천 강화도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들어 음악활동을 접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이주원은 안타깝게도 지병인 전립선 관련 질병과 우울증을 앓아오다 2009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 나이 불과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