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송 시대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니, ‘당송의 영화(榮華)’니 하며 당나라와 송나라를 같이 일컫곤 한다. 이렇게 하고 보면 당과 송은 연속성이 매우 짙은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두 왕조 사이에는 획기적인 사회 변화가 발생했으며 이 변화들로 인해( 때문에 – 옮긴이) 당과 송은 아주 이질적인 사회로 되어 버렸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유럽의 르네상스(문예부흥 – 옮긴이)만한 격변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중국사(제하사[諸夏史] - 옮긴이)를 시대 구분할 때는 당대까지를 고대로, 송대 이후를 중세로 보는 설과 당대까지를 중세로, 송대 이후를 근세로 보는 설이 세계 역사학계 내에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나는 후자를 지지함을 밝힌다 – 옮긴이). 하지만 어느 설을 취하건 당과 송 사이를 시대 구분기로 보는 것에는 일치된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당과 송 사이의 사회적인 변화를 인식하고 그 이질적인 측면들을 주의하면서 역사(갈마 – 옮긴이)를 읽는다면 우리는 입체적으로 역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는 어떤 사회적 변화가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사회를 어떻게 규정했을까.
그 변혁의 시작은 8세기 중엽 당나라(제 2 당 왕조 – 옮긴이) 사회를 뒤흔든 안록산의 난부터다. 이때부터 그 동안 당을 지탱해 왔던 수취체계인 조용조(租庸調. 당 왕조의 조세법. 모든 사람들에게 일정한 너비인 땅을 나눠주는 균전제를 바탕으로 삼은 법인데, 조는 땅과 관련된 세금이고, 용은 사람에게 지워지는 노역 의무이며, 조[調]는 사람이 사는 집에 부과한 현물세를 뜻한다 – 옮긴이) 체제가 동요하기(흔들리기 – 옮긴이) 시작했고,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먼저 농업(여름지이 – 옮긴이)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마크 엘빈’이란 학자는 이때(서기 8세기 중엽 – 옮긴이)부터 12세기까지를 중국 중세의 경제혁명기라고 명명하고, 당시 중국의 경제력은 세계 제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개간과 수리관개의 개선으로 경작지가 확대된 것은 물론이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특히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것은 품종 다양화와 신품종의 도입에 의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된 점이다.
1012년경에는 남부 베트남(사실은 독립국가였던 ‘참파’ 왕국 – 옮긴이)에서 ‘점성도’라는 (벼 – 옮긴이) 품종을 도입했는데, 수확이 기존 품종의 몇 배(몇 곱절 – 옮긴이)가 되는 데다가 가뭄에 견디는 능력이 탁월한 종자로 쌀 생산량이 급증했다.
또 쟁기가 개선되었다. 이제까지는 소 두 마리가 끌어야만 하는 쟁기였는데, 소 한 마리로도 작업이 가능한 쟁기가 개발되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소 두 마리 정도를 갖고 있는 부농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쟁기를 소규모 경영을 하는 농민층에게까지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구실 – 옮긴이)을 했다. 게다가 이 쟁기는 심도(深度. 깊은 정도. 여기서는 ‘땅을 파는 깊이’ – 옮긴이)를 조절할 수 있는 고성능이어서 깊은 파종이 가능하게 되어 벼의 성장을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 이 쟁기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또한 써레가 등장해서 땅 고르는 과정이 효율적으로 되었으며, 이 밖에 많은 농기구들이 소량화/경량화되었다.
품종과 농기구의 개량이 밑받침되자 윤작(돌려짓기 – 옮긴이)이 점차 고도화했다. 이 때문에 화북에서는 조, 보리, 콩의 이년 삼모작이 성행했으며 강남에서는 벼,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 농업 생산력의 급격한 성장은 상업 발전의 전제 조건이다. 당조(제2 당 왕조 – 옮긴이)는 이미 이런 사회 변화를 간파하여 역전제도(驛傳制度, 교통제도)를 개선하고 운하 보수에 열성이었다. 또한 개원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통일하고 양세법을 시행, 세금을 (곡식이나 옷감이나 소금 대신 – 옮긴이) 돈으로 내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상인인 객상, 좌고 외에 갖가지 새로운 상업 조직이 태동했다.
상업이 이처럼 발전하자 상업의 중심지인 도시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이제껏 도시의 중심적인 기능은 정치/행정적인 것이었고 기껏해야 군사도시가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도시에서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상업 구역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고, 영업 시간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상업혁명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이러한 도시 구획은 무너져 버렸다. 백수십 개의 ‘방(坊. “동네”라는 뜻)’으로 구획되어 있던 당의 수도 장안(오늘날의 서안[西安 : 시안]시 – 옮긴이)과는 달리 송 왕조의 수도 개봉은 방이 철폐되고 성 안 대부분이 번화가를 이루었다. 장안에서는 도로 쪽으로는 상점을 낼 수 없도록 했으나, 개봉에서는 대로 변에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수공업 단체들도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조직되었고, 도시민들의 독특한 문화가 탄생했다. 특히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서적이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 새롭게 나타난 풍속도였다.
한편 한대(漢代)이후 뜸했던 동전이 많이 주조되었다. 송대에는 동전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던지 지금도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지에서 송나라의 동전이 하도 많이 발견되어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을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사천성(泗川省. 쓰촨성 – 옮긴이)에서는 지역 부호들이 ‘교자’라는 지폐를 발행했는데, 나중에는 정부가 직접 이 지폐를 발행했다. 이것은 실로 세계 최초의 지폐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 화폐는 농촌 구석구석에 침투해 들어가게 되었다.
또 하나 기억해 둘 만한 중대한 변화가 있다. 지배층의 성격이 크게 변화하고 이에 따라 황제권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수(隋)대에 처음 시작된 과거제도로 당대에 들어서 과거 출신자들이 관직(벼슬 – 옮긴이)에 많이 진출했으나 당대까지는 여전히 귀족 세력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권력을 장악한 송 왕조의 지배층은 당송 간의 경제혁명기에 지방을 중심으로 경제력을 키운 신흥 지주층이었다. 이들은 귀족 문벌이 없는 서민계급 출신자들이었다. 이제 문벌적 배경은 출세하는 데 더 이상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과거만이 유일한 출세 코스였다. 이 때문에 과거에 합격할 수 있을 만한 지식과 교양을 중요시했다. 이들이 바로 송대 사대부다.
이들은 당의 귀족층과는 달리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실용적이고 소박한 기풍을 갖고 있었다. 문장에서도 그 같은 기풍이 반영되어 당대까지 유행하던 형식을 존중하는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은 점점 쇠퇴하고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고문을 부흥하자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구양수(歐陽修),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坡. 본명 ‘소식[蘇軾]’ - 옮긴이) 등이 그 핵심 멤버들이다.
새 시대의 지배자인 사대부는 황제에 대한 관계에서도 당대의 귀족과는 판이했다(달랐다 – 옮긴이). 당의 귀족들은 전통과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황제에 대해 독자성을 갖고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황제조차도 고귀한 가문의 귀족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송대 사대부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황제가 주관하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었고, 그 이외에는(그 밖에는 – 옮긴이) 별다른 사회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황제에 종속된 존재였다.
따라서 송대에 이르러서야 문자 그대로의 전제군주체제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당 이전에 빈번히 발생하던 안록산의 난과 같은 (귀족이나 호족이나 군벌의 – 옮긴이) 무력 쿠데타가 송 이후 중국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 상식 밖의 동양사 』(‘박윤명’ 지음, ‘도서출판 새길’ 펴냄, 1994년)에서
- 음력 6월 26일에, 아사달이 올리다
첫댓글 고조선역사에 관심있는 분들께 <고조선역사 17편>을 올려 드립니다. 복사하여 주시고 자유로히 전재, 인용하여 고조선의 바른 역사를 널리 알려주시기 요청드립니다.
방금 전에 글을 올리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읽어보고 나서 판단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