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10 - 카마모토
질문: 라이벌이자 친구인 김호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 카마모토: (웃으면서)김호? 김호는 친구가 아니다. 그는 경기 중에 나를 몹시 괴롭혔다. 발로 차고 또 때리고.... 질문: 고통스러웠나? 카마모토: 많이 아팠다. 질문: 보복할 생각은 안 했나? 카마모토: 그런 생각은 안 했다. 나는 무조건 골을 넣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하질 않았다. 그것이 곧 보복아닌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MBC에서 '韓日 축구 라이벌'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을 해주었을 때 담당 PD의 질문에 카마모토 씨는 이와 같이 답변했다. 이어서 현역 시절 韓日戰에서 카마모토의 전담 마크맨이었던 김호 감독과 대표팀 동료였던 서윤찬 선생께서 카마모토에 대한 회상을 해주셨는데 두 분 모두 카마모토를 극찬하셨다. 서윤찬 선생 말씀에 의하면 '당시 카마모토 마크 때문에 감독이 김호를 따로 불러서 점프 연습만 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카마모토는 한국한테 두려운 존재였다.
카마모토는 초등학교 시절에 여느 아이들 처럼 야구를 즐겼다고 한다. 가장 잘 했던 스포츠도 야구였고.... 그런 카마모토에게 이케다 선생은 이렇게 말씀했다. '야구는 고시엔(甲子園)대회 밖에 없다! 게다가 야구는 고작해야 미국으로 밖에 진출할 수 없다. 그런데 축구는 잘만 하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고 또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 축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하는 스포츠다!'라고...... 이케다 선생의 설득에 카마모토는 축구를 선택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카마모토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는데 이미 당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이며 일본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64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카마모토는 그 해 일본 대표 2진을 거쳐 대표 1진에 데뷔했고 도쿄 올림픽(일본 8강 진출)에도 출전을 했다. 도쿄 올림픽 때는 카마모토가 주전 멤버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게임인 유고와의 순위 결정전(6대1로 일본 대패)에서 1골을 터뜨렸다.
그 후부터 일본 축구계는 카마모토에 의해 완전히 접수됐다. 카마모토는 대학 시절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면서 와세다 대학을 대학 리그에서 세 차례 우승을 시켰고 득점왕도 무려 7회 씩이나 수상했다. 특히 카마모토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학 시절 그를 제대로 마크할 수 있는 수비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카마모토는 1967년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인 얀마 디젤에 입사했다. 멕시코 올림픽이 열리는 그 이듬 해(68년) 1월에 카마모토는 소속팀인 얀마의 주선으로 약 2개월 간 서독 살랜드주(州)살브류켄으로 축구 연수를 떠났다. 카마모토는 당시 그 지역 클럽팀 주임 코치였던 푸트 데어발에게 집중 지도를 받았는데 특히 슛 자세와 슛을 때릴 때의 마음 가짐 등에 대해서 깊이 배웠다.(푸트 데어발은 후에 서독 대표팀 감독이 되어 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이 기간 동안 카마 모토의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 됐다.
카마모토의 진가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64년 도쿄 올림픽에 이어 또 다시 서독의 저명한 지도자인 데트마르 크라머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한 일본은 멕시코 올림픽에서 당당히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 멕시코 올림픽에서의 일본 대표팀 전적. 對나이지리아戰 3대1 승(카마모토 헤트트릭) 對브라질戰 1대1 무승부 對스페인戰 0대0 무승부 對프랑스戰 3대1 승(카마모토 2골) 對헝가리戰 0대5 패 對멕시코戰(3-4위전)2대0 승(카마모토 2골)
보시는 바와 같이 카마모토는 이 대회에서 6시합에 출전해 7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득점왕에 등극했다. 당시 아시아권 나라가 월드컵은 둘 째 치고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 뿐더러 더욱이 아시아권 선수가 올림픽에서 득점왕을 차지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인데 그 위업을 카마모토 쿠니시게가 달성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자랑'을 넘어 '아시아의 자랑' 이기도 하다.
멕시코 올림픽이 끝난 후 카마모토는 독일, 프랑스, 우루과이 등의 클럽팀으로부터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러나 카마모토는 유럽 진출을 거부했다. 이유는, '당시엔 "프로"라는 게 어떤 건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더러, 솔직히 유럽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존경하는 크라머 감독이 ‘프로 선수가 될지? 아니면 일본에 남을지?는 네 마음이다. 그런데 만일 프로 선수가 되려고 한다면 1류 클럽팀에 가도록 해라. 무명팀에는 절대 가지 말아라!'고 어드 바이스 했고.....그래서 결국 카마모토는 해외 진출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마모토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마모토 쿠니시게는 전형적인 센타포오드다. 현대 축구로 말하자면 '타겟맨'이라고 볼 수 있는데 득점 감각이 탁월한 대형 스트라이커였다. 대신에 가마모토는 문전 앞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주워 먹는 골'을 장기로 삼는 스트라이커가 아닌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득점을 하는 타입의 스트라이커였다. 카마모토의 주무기이자 특기는 페널티 에이리어 안, 45도 각도에서 때리는 슛인데 이 슛은 카마모토의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어 있다. 181cm의 큰 키에서 뿜어대는 헤딩 능력도 탁월했고..... (카마모토의 프로필에는 신장이 179cm로 나와 있는데 실제 신장은 181cm라고 한다. 신장을 줄여서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엔 180cm이 넘게 되면 둔해 보이는 인상을 줬기 때문에 일부러 줄여서 기록한 거란다.)
사실 필자는 현역 시절의 카마모토 플레이를 정확히 기억하질 못한다. 너무 어릴 적에 본 선수라서...... 그런 필자가 95년 5월에 도쿄 요요기에서 열렸던 사커 심포지움(후지 텔레비젼 주최)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심포지움에 카마모토-가와부치 사브로-오쿠데라. 이렇게 세 분이 게스트로 나왔었다.
그 날 주최 측에서 특별히 카마모토의 현역 시절 화면(명장면 하일라이트)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그 화면을 보고나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카마모토의 45도 각도에서 때리는 슛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강하고 또 정확했다. 마치 반 바스텐-바티스투타의 슛을 연상케 했으니까..... 그 외 다른 플레이도 수준급이었는데 종합적으로 봤을 때 카마모토는 아시아 레벨을 넘어선 선수임이 분명했다.
축구인들 말에 의하면 다른 포지션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스트라이커 만큼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된다!'고 말을 한다. 카마모토 역시 스트라이커로서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못지않게 노력을 많이 한 선수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 좋은 예가 카마모토의 '슛 연습'이다. 카마모토의 특기인 강력하고 정확한 슛팅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일본 축구 협회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서독의 크라머 코치를 초빙했는데 당시 크라머는 카마모토 슛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른 발 슛은 인터네셔날! 왼 발 슛은 하이스쿨!’ 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카마모토는 크라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왼 발 슛팅과 헤딩 기술을 배우고 또 몸에 익혔다고 한다. 동료 선수들 조차도 카마모토의 연습량에 혀를 찼다고 하니까......
카마모토의 일본 대표팀 A매치 기록이 59시합/51골인데 A매치 외에 비공식 시합까지 합치면 240시합/157골이다. 일본 리그에서는 251시합/202골을 기록했고. 대학 시절부터 은퇴 시합 때까지 총 671시합/537골을 기록했다. 이 정도면 카마모토의 실력에 대해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카마모토가 일본 대표팀에서 활약할 당시에 한국과도 여러차례 맞붙었다. 그럴 때마다 김호를 비롯한 우리 수비수들이 카마모토를 철저하게 마크했는데 '정상적인(젠틀한)'수비로는 마크가 불가능해 할 수 없이 담그는(?)수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발로 차고, 때리고, 꼬집고..... 한국 문전 쪽으로 높게 센타링이 올라오면 골키퍼인 이세연이 튀어나오면서 볼을 펀칭하는 척하고 카마모토 머리를 펀칭했고.....
그 시절 韓日戰은 지금 분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예전에 이차만 감독 인터뷰를 들어보니까 당시 일본과의 게임 때는 우리 선수들 몇 몇은 그라운드 안에 못을 숨기고 들어가 시합 도중에 일본 선수들을 쿡쿡 찌르고 못을 잔디에 버렸다고 한다. 그 피해를 카마모토 쿠니시게가 가장 많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마모토가 세계 클라스 스트라이커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선천적 재능, 좋은 신체적 조건, 부단한 노력 등..... 그렇지만 무엇보다 크라머 감독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한다. 지금도 카마모토는 ‘만일 크라머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카마모토 쿠니시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카마모토가 크라머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고 2 때인 1961년이었다. 크라머는 1960년 경부터 일본에 자주 와서 대표팀을 포함한 각급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인재 발굴 안목'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크라머 감독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카마모토를 보자마자 대성(大成)을 예견했다고 한다.
카마모토는 멕시코 올림픽 후, 간염에 걸려 선수 생명에 큰 위기를 맞은 적도 있으나 간염으로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던 수 년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인 얀마와 대표팀에서 언제나 멋진 플레이를 보여줬다. 특히 가마모토는 198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노우 캄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 올스타 축구 대회에 아시아 대표로써 참가하는 영예도 누렸다.(이 대회엔 차범근(당시 프랑크푸르트)도 16번을 달고 출전했다.)
카마모토는 40세의 나이로 은퇴를 했는데 카마모토의 은퇴 시합이 열린 1984년 8월 25일 도쿄 요요기 국립 경기장에는 6만이 넘는 대관중이 운집했다. 얀마VS일본 리그선발팀의 경기로 치루어진 이 시합에는 '축구황제' 펠레와 서독의 수퍼스타 볼프강 오베라트(스타 클래식 4. 참조)가 우정 출전해 카마모토와 함께 얀마 소속으로 뛰었다.(경기 결과는 얀마의 3대2 승리였는데 카마모토는 은퇴 시합에서도 한 골을 기록했다.)
카마모토 쿠니시게 이후에 일본 축구는 좀처럼 대형 스트라이커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 90년대 미우라 카즈요시라는 '기교파 스트라이커'가 나타나긴 했으나 카마모토와 비교하기엔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다. 현재 네덜란드 리그 헤라클레스 알메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히라야마 소타가 '제 2의 카마모토'로 성장해주길 일본 축구계에선 간절히 바라고 또 기대하고 있는데 과연 히라야마가 카마모토의 벽을 넘을 지 아니면 그에 견줄 수 있을만큼 성장을 할 지는 한국 축구 팬들로서도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의 스타급 선수 중엔 냉정히 말해서 거품이 들어간 선수가 꽤 많다. 그러나 카마모토 쿠니시게 만큼은 일체의 거품이 들어가지 않은 '오리지날 실력파'라고 단언할 수 있다. 카마모토는 2005년 4월 일본 축구협회 선정 명예의 전당에 선정됐다.
카마모토 쿠니시게 국적: 일본 나이: 1944년생 포지션: 센타포오드 신장: 179cm 출신교: 와세다 대학 소속팀: 얀마
일본 대표팀 데뷔: 1964년 A매치 기록: 59시합/51골
주요 개인 타이틀 68년 멕시코 올림픽 득점왕(6시합/7골) 일본 리그 득점왕 7회 일본 리그 통산 득점 1위(202골) 일본 리그 통산 어시스트 1위(70회)
참고: 데트마르 크라머(Dettmar Cramer)감독에 관해서. 1925년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담배 제조 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크라머는 제 2차 세계 대전에 낙하산 병사로서 이태리 전선(戰線)에 참전했다. 전후(戰後)인 1946년에 보르시아 도르트문트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했으나 1951년에 무릎 부상을 크게 당해 조기 은퇴를 했다. 이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64년 서독 축구협회 주임 코치, 67년~74년까지 FIFA 전임 코치로서 세계 80개국을 돌며 폭넓은 활동을 했고 서독 대표팀 어시스턴트 코치도 역임을 했다.
크라머와 일본 축구가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이다. 그 해 8월 일본 대표팀이 서독 전지 훈련을 갔을 때 당시 뒤스부르크 주임 코치였던 크라머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일본 축구협회가 대표팀 전력 강화(도쿄 올림픽을 앞두고)를 위해 서독 축구협회에 코치 파견을 의뢰했는데 그 때 서독 축구 협회에서 크라머를 추천해줬다.
그 때부터 크라머가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 각급 선수들을 지도했고 일본 대표팀 대표팀 기술고문으로써 도쿄 올림픽(8강)과 멕시코 올림픽 3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크라머는 일본 리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크라머는 그 후 바이에른 뮌헨 감독(75/77)으로서 챔피언스컵 2회 우승을 차지했고, 프랑크푸르트(77/78)- 레버쿠젠(82/85)감독도 역임 했다.(레버쿠젠 시절엔 차범근도 지도를 했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 축구협회에서 크라머 감독을 올림픽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영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삼락 감독과의 심각한 불화로 인해 아시아 지역 예선을 마친 후 경질되고 말았다. 데트마르 크라머는 축구 감독이 아닌 교육자 타입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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