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를 생각할 때 그분의 본성적인 면과 품성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본성을 닮을 수도 없고 닮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전지전능과 완전하심 그리고 영원하심은 하나님만의 유일한 속성이다. 그분은 홀로 그리고 스스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자신이 가진 것처럼 기만하는 도전이 결국 사탄을 만들었다. 루시퍼는 자신이 가질 수도 없고, 가지려고 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냈고 그 자리에 앉으려고 반역을 꾀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백성들과 짐승들을 멀리 두고 그 산에 침범치 못하도록 명령하신 것만큼 경계하신 영역이다.
(출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그분의 품성 측면에서는 모든 백성과 피조물이 닮도록 요청하시고 그 거룩한 성품으로 초청하신다. 그분의 품성은 모세가 가지고 올라간 돌판 위에 기록하신 십계명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하나님이 영원하심 같이 영원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출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본 성경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인자하신)와 공의(진실하신)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자비는 공의에 우선한다. 자비의 기반에서 공의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자비와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고 과실과 죄를 용서하는 분이다. 그렇다고 벌을 면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형벌은 마치 우리 신체에 곪아 터진 부분을 외과적으로 수술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방치하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엄격하게 하신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벌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양식대로 광야에서 성막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또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분의 거룩하고 자비하신 성품으로 우리 몸과 마음을 건축해가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자체였다. 우리도 그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엡 2:22) 지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 본을 좇아 지”어야 하는데, 그 본은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히 8:5; 벧전 2:21)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께서 거하실 성전 된 우리로서 우리는 오늘도 그분의 사랑의 성품으로 지어져 가는 하루를 살아야겠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이 새벽 주님의 말씀으로 세우시고 주의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채우시길 기도드립니다. 마땅히 쫓아야 할 주님의 본을 따라서 살게 하시고 자비하심과 인자하심과 은혜로우신 성품을 닮아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안에 더러운 것들을 제하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스러울지라도 제거하여 주셔서 정결하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