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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24. 소책자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섬기는 일터
1. 감정 비움 (김민철)
2. 빈 배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노희송)
3. 사역의 결과를 내어 드려도 여전히 괜찮은 이유 (이용규)
출처 : 『비움』 빛과 소금 2024년 11월호
1. 감정 비움
글쓴이 김민철은 김민철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J 심리치료연구소 소장이다
세상은 많은 것으로 넘쳐난다.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무관한 것들로 홍수를 이루는 시대이다. 벌써 애통하고 가난했어야 하는 우리 마음도 그 외의 것들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더도 덜도 말고 꼭 필요한 것만 우리 마음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풍성할수록 당연히 좋다. 그 외의 것들은 더 많다고 좋지도 않고 부족해도 나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세상의 다양한 내적, 외적 가짜 풍성함은 우리 마음에도 침투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근심이 너무 많아도 생각이 불필요하게 많아진다. 근심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불필요한 생각들로 그 근심을 대신하므로 사실 유사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 해야 할 일들, 신경 써야 할 상황들과 사람들 등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 만한 일이 많다. 외부의 이런 자극도 잘 다뤄야 하지만 문제는 내부의 내 마음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 마음과 생각, 감정 등이 건강할수록 외부의 자극도 지혜롭게 잘 다룰 수 있다.
진료와 상담을 할 때 내담자의 마음에 대해 탐색하고 상담을 한다. 상담하다 발견하는 것은 정말 많은 경우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적절한 채움과 비움이 없다는 사실이다. 맞다. 우리의 감정은 건강하게 선순환해야 한다. 마치 날마다 집안의 쓰레기를 갖다버리고 청소를 하는 것처럼 마음도 건강하지 못한 것은 처리하고, 깨끗하고 건강한 생각과 감정을 새롭게 마음에 채워야 한다.
마음은 하루 단위로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루라는 단위를 주신 의미가 다양하겠지만 우리 마음도 24시간인 하루 단위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수면을 통해서 죽었다가 매일 아침 눈을 떠 새롭게 태어난다. 수면의 기능 중에는 전날의 감정적 찌꺼기를 처리하는 회복의 기능도 있다. 이 역시도 하루 단위로 처리된다.
마음에서는 감정의 역할이 매우 크다. 과거 인지심리학이 발달하면서 마치 생각이 감정보다 더 낫다는 인식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지적인 사람이 감정적인 사람보다 성숙하다는 시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생각 혹은 감정, 뭐든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면 미숙해지는 법이다. 생각과 감정은 각자의 역할과 비중이 있다. 생각이 우리 뇌의 CEO인 것은 맞지만 감정도 생각 못지않게 중요하며 우리 마음의 기초가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에는 감각과 감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각이 발달하지 못한 초기 영아기에는 감정이 모든 판단과 소통의 도구가 된다.
사람은 점차 자라면서 인지기능이 발달하며 20대 후반이 되면 전전두엽의 완성과 더불어 건강한 생각과 감정이 자리 잡게 된다. 뇌 발달의 순서를 보면서 감정이 우리 인생의 기초이자 기반임을 느낀다. 감정이 건강하지 않으면 생각이 건강할 수 없다. 물론 생각과 감정은 상호작용을 통해서 보완되고 성장하고 인격의 성숙을 이룬다. 기초가 부실하면 건물이 무너지듯 감정이 부실하면 도미노처럼 인격도 무너질 수 있다. 사실 감정은 기초이자 성숙에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교회내 성숙해야 할 리더들이 무너지는 경우도 생각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정의 미숙함 때문일 때가 많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강한 마음이 되려면 24시간 간격으로 날마다 자신의 감정적 찌꺼기를 처리해야 한다. 성경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감정적 찌꺼기를 마음에 수북이 쌓은 채 살아가고 있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감정을 처리하며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 험난했다. 감정은 생존이 보장되는 안전한 상황에서 건강하게 처리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에 긴장하고 살았다. 생존을 위해서 감정을 희생하고 살아온 기반 위에 우리나라가 세워진 면도 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감정은 억압되어야 했고, 그 희생으로 성공과 성취가 이루어졌다. 여유 있게 감정을 느끼는 대신 '빨리빨리' 경제 대국으로 가야만 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생존 혹은 성공이나 성취에 집착하면 여유로운 감정은 희생되어야만 한다. 다양한 이유로 나라로부터 물려받은 긴장감으로 인해 스트레스 과잉 국가, 도파민 공화국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중독과 쾌락이 득세하고 있다.
그동안 노력해서 성공했으니 당연히 즐기고 싶을 수 있고 쉬고 싶을 수 있다. 문제는 생존이나 성공과 성취, 부를 이루는 것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다 보니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감정의 찌꺼기가 되는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비워내고, 건강한 감정은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잘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물론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생존을 지켜내고, 풍요로운 시대를 만들어 주신 선조와 부모 세대에 마음 다해 감사를 드린다. 선조들의 노력과 헌신이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감정의 채움과 비움이 더욱 필요하다. 기초가 되는 감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감정이 건강해지면 이미 주어진 우리의 풍요로움과 성공과 성취는 더 이상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상하고 의미 있는 '열매'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도 너무 다양하다. 감정은 각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양과 질의 정도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정의 양이나 질이 풍성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사람끼리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성해야 마음이 건강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풍성한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상처, 결핍 등으로 인해서 감정이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고착되어 퇴행하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빈약한 감정 상태가 된다. 빈약한 감정일수록 세상을 살면서 겪는 세파와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결국 24시간 간격으로 반복적으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므로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된다.
감정의 찌꺼기를 제대로 처리해서 비워내지 못하는 이유가 앞서 언급한 몇 가지 이유도
있지만,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는 타락한 이 땅과 인간의 죄 된 본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죄를 짓고 난 후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감정적 고통을 다루는 것에 실패했다. 그들은 수치심과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 감정에 압도되었으며, 그 감정적 고통을 처리할 능력이 없으니 서로 비난했다. 뱀 탓으로 돌리고, 결국 하나님 탓이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감정 처리' 방법만 본능적으로 무의식에 장착한 채 태어난다. 그래서 그 누구도 감정을 제대로, 효과적으로 잘 처리하지 못한다. 결국 '성숙'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인기까지 점진적으로 자라가야 감정 처리 능력도 좋아지게 된다.
바울은 말세에 고통당하는 때가 오며, 무정해지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사나워지며,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위에서 말한 여러 이유로 인한 현시대의 타락한 감정에 대한 묘사이다.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복음으로 자기감정을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감정은 어떻게 건강하게 비우며, 채울 수 있는가? 감정을 다루는 무수한 방법과 심리적 기법, 상식적인 해결책이 많다. 세상도 사람들의 감정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중독으로 피하거나, 자기감정과 싸우거나, 감정의 찌꺼기에 눌린 채 살아가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감정의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중독에 빠지면 무감각해져서 그 순간은 마음이 편해지므로 중독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감정 찌꺼기를 눌러버리면 당분간은 위장된 평화를 누리는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참고만 지내기도 한다. 혹은 부정적 자기감정을 외부를 향해 파괴적으로 분출하면 뭔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외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세 가지 모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감정 처리 방법이다. 부정적 감정을 비운 것 같은, 기분 좋은 감정을 채운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미숙한 해결 시도일 뿐이다. 감정은 먼저는 채워야 그다음 비워진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비우고 나서 긍정 감정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채워야 무기력이 사라진다. 평안을 채워야 우울도 좋아진다. 마치 빛이 와야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유사하다. 부정적 감정이라고 해서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부정적 감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다만, 그 부정적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착되어 쌓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상하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고 고통스럽더라도 기쁨과 평안을 주는 마음의 고향으로 정서 상태를 돌릴 수만 있다면 오히려 부정적 감정은 긍정적 감정을 증폭시키는 재료가 된다. 다시 말해 부정적 정서에서 기쁨과 평안으로 돌아가는 정서 회복 회로가 뇌와 마음에 단단하게 건축되어야 한다. 부정 정서에서 긍정 정서로 가는 심리적 길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러면 이 땅의 수많은 고난과 고통과 스트레스와 낙심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의 고향인 기쁨과 평안으로 달려갈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가 아무리 많고, 그래서 고통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고통에서 기쁨과 평안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를 위해서 기쁨과 평안이라는 긍정 정서의 양이 많아야 한다. 즉, 앞서 언급했듯이 채움이 먼저다. 긍정 감정을 채워야 마음의 무게중심이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기울게 되고, 정서적 흐름의 방향도 기쁨으로 가기 쉬워진다. 부정적 정서에서 기쁨과 평안으로 자꾸 달려가다 보면 인격의 성숙이 이뤄지며 고통에 대한 회복도 훨씬 빨라진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쁨과 평안이라는 감정의 양대 산맥은 책이나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환경 사이에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주고받는 건강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장하는데, 필연 반복되는 연습과 시간이 요구된다. 우리의 감정적 찌꺼기 중 스스로 조절해서 비워낼 수 있는 것도 있으나 훨씬 많은 경우 부정적 감정은 나보다 더 감정적으로 성숙한 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화가 나서 울고 있을 때 엄마가 그 아이의 분노에 맞대응해서 같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공감해 주고 다독여 주며 그 아이를 향한 기쁨을 표현할 때 아이의 분노가 잦아드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의 부정적 감정이 표현될 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감사한 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에덴을 상실한 후부터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두려움과 수치심, 분노 등의 핵심 감정을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얼마나 분노했고 수치스러워했으며,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전가했는지 십자가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부정 정서를 예수님께 쏟아내며 무시무시한 공격성으로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았다. 하나님도 인류의 죄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부으셨다. 모든 기쁨과 평안의 주님 되신 예수님은 그 모든 죄와 고통과 부정적 공격성을 밀어내지 않으시고 온전히 다 품고 죽으셨다. 그리고 다시 기쁨과 평안으로 부활하셨다. 그 모든 죄로 인한 감정적 찌꺼기까지 완전히 녹이시고, 어떻게 기쁨과 평안으로 회복하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 내면의 부정적 찌꺼기를 내 안에 그대로 품고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중독과 같은 가짜 안식처로 도피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서 억압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영원한 품속으로 달려가야 한다. 감사하게도 이 기쁨과 평안의 '품'을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있는 지체들의 마음에도 심어 주셨다. 사랑으로 상대의 감정적 가시를 서로 품어 줄 때, 복음의 능력으로 정서적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대신 공급된다. 부정적 정서로 공격하는 우리에게 벌이 아닌 사랑과 기쁨으로 되갚아 주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무한대의 넓은 품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2. 빈 배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글쓴이 노희송은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담임목사다.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였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는 배와 그물, 그리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기술뿐이었다. 지극히 단순한 삶을 살았다. 고기를 많이 잡은 날은 기분이 좋고, 허탕 치는 날은 낙심과 염려 가운데 무거운 발길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렇게 하루하루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이었다.
캐나다로 이민 온 후, 나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편의점을 운영하셨다.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셨기에 온 가족이 도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한동안 우리 가족은 가게 위층에서 살기도 했다. 매상이 많은 날은 기분이 좋아서 밤 11시에 문을 닫고, 근처 음식점에서 특별 외식을 하곤 했다. 그러나 매상이 적은 날에는 걱정을 하시던 부모님이 지금도 기억난다.
학생들은 성적이 오르면 기분이 좋고 낙제하면 앞길이 무너질 것같이 걱정한다. 아기를 키우는 젊은 부모들도 아기의 잠과 건강에 따라 자신의 컨디션이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들도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 받고 좋은 피드백을 주면 그다음 한 주 동안 기분이 좋다. 하지만 마음대로 말씀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거나 성도들의 반응이 미미할 때는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어쩌면 베드로도 그렇게 일희일비하며 어부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그날은 결코 베드로에게 좋은 날이 아니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눅 5:5). 우리의 삶에도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어 텅 비어 있는 배를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나 사업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자녀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만 도리어 자녀들이 방황하기도 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영혼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심령은 오히려 메말라 있을 때도 있다.
고기잡이에 실패하여 허탈함과 실망감에 젖어 있는 베드로의 빈 배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배를 찾아오셨을까? 물론 주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배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배가 물고기로 가득 차 있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세상의 성공이나 인간적인 풍요로움으로 꽉차 있어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공간을 막고 있을 때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때, 혹은 우리의 실력이나 과거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 삶은 오히려 더욱 분주해지고 가난한 심령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베드로의 빈 배는 예수님께서 들어와 앉으실 수 있는 축복의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텅 비어 있는 우리의 삶 역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빈 배에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우리의 빈 배가 축복의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여유가 없어지고, 오히려 강퍅해지기도 한다. 그물을 씻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밤에는 허탕을 쳤지만 그다음 날을 기대하며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그날도 베드로는 피곤한 모습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얼른 정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다음날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려는 베드로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그 옆에 요한과 야고보가 탄 또 다른 배가 있었는데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요한의 배를 가리키며 그쪽 배를 타시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빈 배에서 더 강퍅해질지, 아니면 주님을 모셔야 할지 마음을 살펴야 한다.
빈 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들조차 내려놓게 만든다.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아예 배를 육지에서 떼라고 말씀하시고, 본격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셨다(눅 5:3).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배를 육지에서 떼었다. 그 순간 그는 배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다. 이러한 상황을 영어로 'stuck(갇히다)'되었다고 한다. "Peter was stuck!"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어렵거나 상황적으로 힘든 경우, 우리의 힘으로 뛰쳐나가 보려고 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 같을 때 쓰는 말이다.
빈 배는 우리를 어려운 상황에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갇혔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뛰쳐나가 보려고 애써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막막함을 느낀다. 우리는 옵션(선택)이 많은 삶이 행복하고 여유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여유로움에 취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기 일쑤다. ‘비즈니스를 축복해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정작 비즈니스가 잘되면 너무 바빠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했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여러 교회 집회에 초청받는 인기 강사였다. 한번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궁금해서 그 친구가 설교하는 집회에 참석했는데, 정말이지 부러울 정도로 말씀을 잘 전했다.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제법 큰 교회 고등부 전도사로 있던 이 친구는 사역한 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사역지를 옮기겠다고 했다. 교육부 담당 장로님과 불편하던 차에 다른 교회에서 계속 와 달라는 요청이 그 이유였다. 함께 기도하고 그 친구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1년이 채 안 되어 또 그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옮긴다고 했다. 이번에도 어느 장로님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사역지를 옮겼고, 그렇게 설교를 잘하던 친구는 졸업 후 목회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 친구에게 옵션이 너무 많아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말씀의 옵션, 교회의 옵션이 많다. 온라인, 유튜브만 봐도 수많은 설교와 예배를 접할 수 있다. 갈 교회도 많고, 들을 설교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옵션이 있어도 그 말씀 안에 사로잡히지(stuck) 않으면 우리 안에서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영혼의 문제는 옵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빈 배는 이렇듯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리처드 포스터는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피상성(Superficiality)은 깊지 못한 얄팍한 신앙을 의미한다. 변화한다고 무조건 다 좋은 게 아니라 내용이 있고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변화는 말씀의 능력에서 온다.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 베드로는 바로 옆에서 'stuck' 되어 말씀을 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오롯이 예수님께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선택의 여지가 점점 사라질 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 영적인 축복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즉시 그물을 내린 것은 말씀에 반응하는 순종이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목수이지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기에, 그 분야의 전문가였던 베드로의 자존심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말씀이었다.
누가는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5:5).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 집중할 때 순종할 수 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된다. 빈 배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목적과 의미를 얻게 된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해 깊은 물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우리의 시선은 '많은 물고기'에 가 있지만, 베드로는 물고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눅 5:8). 베드로는 자기의 죄를 깨달았다. 그는 무엇을 회개했을까? 가장 심각한 죄는 자기 의지(Self-reliance)의 죄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 자기를 위한 인생의 방향과 의미가 죄임을 그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깊은 물 속도 보시는 예수님은 나의 깊은 마음도 보시는 분임을 새삼 깨닫게 된 후, 이전에는 단지 선생님, 치유자, 선지자로만 알고 있던 그분을 이제는 구세주로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이다. 외적인 성공과 성취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 마음의 방향이 바뀔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선포하신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빈 배를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 후 베드로는 인생의 의미와 방향이 바뀌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어부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로 새롭게 태어났다. 베드로는 그 많은 물고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물고기는 그에게 재물이며 생계였다. 평생 의미를 두고, 간절히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이끌림의 시작이다. 더 이상 물고기가 보이지 않고, 배나 그물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 보이는 것.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깊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다. 그곳은 배, 그물이 아닌 예수님만 보이는 곳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새롭게 만나기 원한다면, 주님의 손을 잡고 순종의 깊은 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깊은 물은 어디일까? 평생 갈릴리에서 어부로 자라, 안 가본 데가 없었던 베드로에게 깊은 물이란 밤새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관계의 실패, 일의 실패를 경험한 곳이 깊은 물이다. 우리는 한 번 실패하거나 거절을 당하면 두려워한다. 다시 시도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실패에서 회복되려면 다시 들어가야 한다. 간밤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들어간 베드로처럼 말이다. 간밤에는 자기의 경험과 실력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말씀에 의지해 예수님과 동행해 들어간 베드로처럼 말이다. 그리고 비로소 베드로는 깊은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는 "가치 있는 성공들은 주로 실패와 실망을 극복한 후에 찾아온다"라고 했다.
실패와 실망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외형적인 것을 자꾸 바꾸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배나 그물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텅 빈 배는 오히려 예수님이 들어와 채우시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의 경험, 기술, 지식을 초월하여 새롭게 역사하셨던 예수님이 우리가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간적 기대, 실망, 심지어 과거의 성공적 경험 등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할 때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삶을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
3. 사역의 결과를 내어 드려도 여전히 괜찮은 이유
글쓴이 이용규는 몽골국제대학교 부총장으로 사역했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국제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붙들고 가는 사역과 사명은 자칫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되고 정체성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받은 비전이 우리 인생의 너무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부름 받은 더 중요한 가치인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의 온전한 성장을 훼손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너는 여기까지야'라고 우리 인생 가운데 선을 그으시는 경우가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모세 이야기다. 모세는 '하나님, 저 가나안 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 죽고 싶어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라고 구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꿔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족하니 더 이상 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죽은 많은 사람의 대표로서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멈춰 서야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모세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확인하게 된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 땅을 딛고 서서 예수님과 대화했을 때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소원이 가장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타이밍을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해 놓으셨던 것이다.
2024년 6월 우리 가족은 13년 만에 몽골 땅을 다시 밟았다. 이번 몽골 여행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다. 14년 전에 몽골 땅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선교 대학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을 인도네시아로 보내셨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이 열리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몽골에서의 초청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이 몽골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못을 박으셨다. 내가 몽골에서 양육했던 제자들과도 교류하지 말고 인도네시아에만 집중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퇴로(路)를 차단하고 새로운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올해는 우리 가족을 파송한 오병이어선교회의 몽골 선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기도 가운데 편한 마음을 주셔서 이제는 몽골에 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순종 가운데 몽골을 떠나기는 했지만 왜 떠나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왠지 사역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중간에 뜯겨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있는 질문을 알고 계셨고 이번 몽골 여행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계셨다.
우리 가족이 몽골에 처음 선교사로 들어가자마자 아내는 몽골과학기술대학교 안에 오병이어선교회가 세운 몽골 영양개선연구소에서 2대 소장으로 섬기게 되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사역하며 박사학위논문을 쓸 계획이었지만 결국 박사 논문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내가 연구소에 들어가서 바로 시작해야 했던 프로젝트는 몽골의 영양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교 급식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몽골인들은 고기만 먹는 식습관에 익숙해져 있어서 어려서부터 채소를 잘 먹지 않는다. 이 식습관 때문에 노년층 질병이 너무 많아 당시 평균수명이 50대 후반에 머물 정도였다. 이것을 바꾸려면 전 국민적 계몽이 필요한데,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어려서부터 학교 급식을 통해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고 식습관을 바꾸는 것이라 보았다. 아내는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리더로서 무언가를 주도하고, 끌고 가는 것을 힘들어했다. 특히 많은 정부 관계자를 만나고 설득해야 하는 일을 어려워했다. 아내는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제 순종이고 순교입니다.’
아내는 그 후 2년 임기를 마치고 소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011년 나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2020년경 몽골 정부가 학교 급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회에서 학교급식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전체 학교에서 급식을 바로 시작하기에는 몽골 정부의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의 코이카에 요청하여 단일 국가 지원 프로젝트로는 사상 최대의 금액을 지원받기에 이르렀다. 이 일로 아내를 이어 3대 소장으로 섬겼던 선교사님이 올 6월에 몽골 정부가 외국인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학교 급식 이후 몽골인의 평균수명은 계속해서 올라가 이제 70대 초반으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아내 밑에서 일했던 연구원들이 현재는 국립대학의 학장, 학과장 등 중요 포지션으로 가게 되었고 몽골에 아주 많은 영양사가 배출되어 학교 급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내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고 그저 그 자리를 지키는 순종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을 아름답게 사용해 주셨다.
이번 몽골 여행에서 나는 내가 섬겼던 이레교회 청년부 출신 지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장성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일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이고 소망 없이 살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과 호주 등지에서 유학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들은 내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삼아서 성장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내가 떠났기 때문에 이들이 나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께 직접 구하고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남기고 간 사역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마무리하고 열매 맺어 주셨다. 그저 하나님께 내 사역과 짐을 내어 드리고 그분을 신뢰하며 걷는 여정 중에 우리는 평안과 자유 그리고 성장을 얻는다. 내가 다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 내 짐을 맡기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며 걸어가도 나는 여전히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