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토라#콜 데마마 다카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
토라의 바미드바르는 보통 안식일 전날인 샤부오트에 읽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이 둘을 연결했습니다. 샤부오트은 토라를 주는 시간입니다. 바미드바르는 "사막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막과 토라, 광야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일까요?
현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메힐타(Mechilta)에 따르면 토라가 열린곳에서, 공개적으로,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장소에서 주어진 이유는 이스라엘 땅에서 주어졌다면 유대인들이 세상 나라들에게 "너희는 토라에 대한 지분이 없다"라고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토라는 누구든지 와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와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Mechilta, Yitro, Bachodesh, 1)
※메힐타(Mechilta): (아람어, 문자 그대로는 "요약") 3세기 미슈나 시대에 편찬된 출애굽기 주석서
또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토라가 이스라엘에서 주어졌다면 세계 각국은 토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핑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를 주시기 전에 다른 모든 나라에도 토라를 주셨고 각 나라에서 거절할 이유를 찾았다는 랍비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Ibid., 5)
또 하나는 광야에 들어가는 데 비용이 들지 않는 것처럼 토라도 무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수년 전 영국 텔레비전(BBC)에서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The Long Search를 방송하였습니다. 진행자 로널드 아이어(Ronald Eyre)는 유대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학문의 집인 베이트 미드라쉬에서 시끄럽고 논쟁적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랐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엘리 위젤(Elie Wiesel)에게 "유대교에 침묵 같은 것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위젤이 대답했습니다: "유대교는 침묵으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베이트 미드라쉬(בית מדרש) - 토라와 탈무드를 포함한 유대교 문헌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위한 전용 공간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예배는 침묵을 동반했습니다. 레위인들은 마당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제사장들은 다른 고대 종교의 제사장들과 달리 제사를 드리는 동안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하여 학자인 이스라엘 놀(Israel Knohl)은 "성소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anctuary)"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조하르는 침묵을 위의 성소와 아래의 성소가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라고 말합니다.
침묵을 영적 훈련으로 수련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브라쯜라프 하시딤(Bratslav Hassidim )은 들판에서 명상을 합니다. '말의 금식'인 타아닛 디부르(תענית דבור, ta'anit dibbur)를 실천하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가장 심오한 기도인 아미다의 개인 기도를 테필라 베라하시(תפילה בשלשת, tefillah be-lachash)라고 하는데, 이는 '침묵의 기도'입니다. 이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한나의 전례를 바탕으로 합니다.
※브라쯜라프 하시딤(Bratslav Hassidim)-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쉔 토브 의 증손자인 브라쯜라프의 나흐만 (1772–1810)이 창시 한 하시딕 유대교 의 한 분파.
※타아닛 디부르(ta'anit dibbur) 쇼바빔 기간 동안의 특별한 유형의 금식. 먹고 마시는 것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포함함.
하나님은 우리의 조용한 외침을 들으십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아들을 보내라고 말한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하갈은 물이 다 떨어져 어린 이스마엘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울부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창 21:16-17). 앞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라는 속으로, 즉 조용히 웃었지만, 하나님은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창 18:12~13). 하나님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을 들으십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중요한 침묵은 경청하는 침묵이며, 경청은 최고의 종교적 예술입니다. 경청이란 또한 다른 사람이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리라"고 두 번이나 말한 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듣겠다[베니쉬마(ve-nishma)]"라고 말했었습니다. 듣고,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것이 바로 니쉬마(נשמע, nishma)이며, 이것이 핵심적인 종교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행동과 말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경청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소음 아래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시편 19편이 말하는 천체의 조용한 소리가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늘은 그분의 손길이 행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말을 쏟아낸다, 밤낮으로 지식을 전하네.
언어도 없고, 말도이 없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시편 19)
선지자들이 들었던 역사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심연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네는 시나이의 명령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늘에서 온 토라'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 때문이 아니라, 초월의 소리(the sound of transcendence), 즉 단순히 인간을 넘어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습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유대교와 종종 갈등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에서 매우 유대적인 형태의 치유법을 창안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이를 '말하기 치료(speaking cure)'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듣기 치료(listening cure)입니다. 거의 모든 효과적인 형태의 심리 치료에는 깊은 경청이 포함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경청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결혼 생활에서 우리는 배우자의 말에 정말 귀를 기울일까요?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리더로서 우리는 우리가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언의 두려움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공동체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상처에 귀 기울입니까?
우리가 동료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든(W.H Auden)은 그의 시 'W.B 예이츠를 추모하며(In memory of W.B Yeats)'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의 사막에서 치유의 샘이 시작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의 소음과 소란에서 한 발짝 물러나, 마음속의 고요한 사막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고요하고 작은 음성인 콜 데마마 다카(קול דממה דקה, kol demamah dakah)를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으며, 우리 음성을 들으시며, 우리를 영원한 품에 안으시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콜 데마마 다카- קול דממה דקה, 열왕기 상 19장 12절에 언급된 "침묵의 소리(콜 데마마 다카(kol demama daka)“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만남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막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을 가리키는데, 폭풍의 소음과 소란 속에서가 아니라, 부드럽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침묵의 목소리 속에서입니다. 또한 광활하고 고요한 사막은 종종 콜 데마마 다카와 연관됩니다. 그곳은 경청과 자기성찰을 위한 공간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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