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상은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한 상.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상을 주도록 명시한 유언장에 따라 노벨의 사망 5주기인 1901년 12월 10일부터 시상되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평화, 경제학 부문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리크스방크에 의해 추가 제정된 것으로 1969년부터 수여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장에서 스톡홀름에 있는 왕립과학 아카데미(물리학과 화학),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생리학 또는 의학), 스웨덴 아카데미(문학), 그리고 노르웨이 국회가 선임하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를 노벨상 수여 기관으로 지목했다. 왕립과학 아카데미는 경제학상도 주관한다. 유언장에 따라 설립된 노벨 재단은 기금의 법적 소유자이자 실무담당기관으로 상을 주는 기구들의 공동집행기관이다. 그러나 재단은 후보 심사나 수상자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그 업무는 4개 기구가 전담한다. 각 수상자는 금메달·상장·상금을 받게 되는데, 상금은 재단의 수입에 따라 액수가 달라진다.
노벨상 수여의 일반원칙은 노벨 자신이 유언장에 명시해놓았다. 노벨상은 국적·인종·종교·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한 사람이 1번 이상 받을 수도 있다. 조문(條文) 해석과 행정절차에 관한 부칙은 1900년 시상 집행위원, 수상기관 대표단, 노벨 가족이 함께 모여 합의했고 스웨덴 왕이 이를 승인했다. 이 원칙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지만 적용과정에서 다소 수정되었다. 예를 들어, 유언장에서 문학상 수상 조건으로 들고 있는 '이상주의적 경향' 따위의 모호한 어투는 처음에는 엄격하게 해석이 되었지만, 수상자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차츰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수상자 선정은 시상이 있기 전 해 초가을에 시작되며 시상 기관들은 노벨 정관에 비추어 추천 자격이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에게 후보자를 지명하도록 안내장을 보낸다. 선정기준은 전문적 능력과 국제 지명도이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이 상실된다. 추천서는 수상 결정이 있는 해 2월 1일 이전에 서면으로 해당 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2월 1일에 6개의 노벨 위원회는 접수한 추천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필요시 위원회는 국적에 관계없이 전문가들을 초빙할 수도 있다. 9월과 10월초 사이에 이들 위원회는 해당 상 수여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상을 주는 기관은 11월 15일까지 최종결정을 내려야 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이 결정된다. 심사와 표결의 모든 과정은 비밀에 붙여진다. 상은 개인에게만 주지만 평화상은 단체에 줄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될 수 없지만, 추천의 이유가 정당하면 상이 수여될 수 있다.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가 그런 예이다. 수상 결정에 대해서는 번복을 요청할 수 없다. 경제학상은 정치적·사회적 근거보다는 수학·통계학적 근거에 의해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노벨의 정신에 걸맞는 후보자가 없을 경우나 제1·2차 세계대전 때처럼 세계정세 때문에 정상적인 수상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을 때 수상은 보류된다.
과학상과 의학상 부문은 별다른 논란이 없었으나 문학상과 평화상 부문은 그 성격상 첨예한 의견대립이 많았다. 특히 평화상은 가장 자주 수상이 보류된 부문이다. 2018년 노벨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을 둘러싼 성 추문 사건으로 인해 선정하지 않는다고 발표되었다.
★노벨은 어린 시절부터 폭약에 관심이 많아서, 깡통에 흑색화약을 꽉꽉 채워넣고 터트려서 대폭발을 일으키고 온 동네를 난리나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노벨도 크게 다쳐서 한 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들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도 발명가로서 크림 전쟁 당시 동갑 친구 모리츠 폰 야코비와 같이 기뢰와 지뢰를 개발해 러시아 제국군에 납품한 바 있고, 염산화약이란 것도 개발했던 인물이었다. 1855년 영국군이 이 수중 기뢰로 어마무시한 피해를 당했고, 한동안 영국 해군 함대가 무수히 불타고 터진 그 바다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러시아 제국은 그에게 보상하지 않았고 승자인 연합군에게도 찍혀서 무기공장은 파산했다. 다행히도 노벨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무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계속 연구할 수 있었다. 채권자들이 공장을 인수받았으나 생산품이 워낙 전문적이고 고난도의 영역인지라 자기들도 뭘 어떻게 굴려야 할지 알수가 없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벨 형제들에게 채무의 일정 부분 변제를 조건으로 실질적인 경영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노벨과 두 형은[4] 유럽 각지에서 온갖 일을 하며 빚을 갚으면서 돈을 모아 공부해야 했다.
나중에 러시아 제국 바쿠 현(Бакинская губернія)의 바쿠유전을 두 형과 함께 개발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쿠 유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다 타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좀 많이 입었다고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약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질을 제조하는 공장을 환영하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에 달군 쇠를 넣어 보이는 등 안전성을 홍보했다고 하는데 그다지 믿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게 공장을 지어 잘 돌아가는 듯 했으나, 1864년 9월 공장이 폭발해서 간부인 동생 에밀과 직원 4명 및 행인 1명이 사망하는 참사 이후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으며 보상을 치른 다음 할 수 없이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그곳에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에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다가 1872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벨은 폭약을 안전하게 만드는 연구를 해야 했고, 마침내 1866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초반에 약간의 저작권 분쟁도 있었지만 폭발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매우 안전하고 폭발력을 조절하기도 편하며 취급하기에도 편리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업에 쓰이는 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쟁터에도 투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로프로이센이 프랑스 군을 신나게 날려버릴 때 참 많이 썼다. 노벨이 프랑스군에게도 영업을 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거절했다는 썰도 있다. 어찌됐든 이 덕에 노벨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후 무연화학의 발명을 두고 특허권 분쟁으로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 시골에서 나머지 5년을 살다가 189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막대한 재산을 두고 친척들이 서로 차지하려 소송을 했으나 결국 그의 뜻대로 노벨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만든 다이너마이트의 군사적 사용에 회의감을 느꼈고, 인류에 공헌을 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부하여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정설이다. 반면 형 루드비그 노벨이 죽었을 때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고 오보를 낸 신문에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칭해진 것에 충격을 받고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해당 오보의 원본이 발견, 확인된 바가 없어서 근거없는 풍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벨 1829~1896>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란 의미로 스웨덴의 그룹 이다.. 1970년대에 기억하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을 발표하여 유럽의 음악 인기 순위를 장악했다. 그룹의 멤버들은 작사 및 건반 연주를 맡은 베니 안데르손(1946. 12. 16 스웨덴 스톡홀름~), 작사 및 기타 연주를 맡은 비외른 울바에우스(1945. 4. 25 스웨덴 예테보리~), 그리고 보컬을 담당한 앙네타 펠트스코그(1950. 4. 5 스웨덴 이왼쾨핑~)와 아니프리트 링스타트(1945. 11. 15 노르웨이 나르비크~)로 구성되었다.
그룹 결성 이전부터 수많은 포크와 팝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했던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가 1969년에 링스타트와 펠트스코그를 만나면서 그룹 형성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4인의 그룹 구성원들은 음악 작업을 함께하는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안데르손과 링스타트,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각각 데이트를 하면서 두 쌍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 남녀 혼성 4인조는 카바레 공연을 주로 하는 페스트포크(Festfolk)라는 그룹명으로 데뷔했다.
'페스트포크'라는 이름은 거의 동일한 발음을 가지면서도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채택되었다. 스웨덴어 'festfolk'는 파티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면서, 약혼한 커플들이라는 의미를 갖는 1970년대 속어 'fastfolk'를 뜻하기도 한다.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는 1971년에 결혼했고, 뒤이어 1978년에는 안데르손과 링스타트가 결혼했다. 패스트포크라는 그룹 이름으로 스웨덴에서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1972년에 '비외른과 베니, 앙네타와 아니프리트'라는 그룹명으로 녹음했던 노래 〈피플 니드 러브 People Need Love〉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 해에 이 4인조 남녀 혼성그룹은 싱글 〈링 링 Ring, Ring〉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할 스웨덴 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에 참가하여 3위에 입상했다. 그 성공에 힘입어 그룹 매니저인 스티그 안데르손은 그룹 구성원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ABBA'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밴드는 1974년 유로비전에 다시 출전했고 〈워털루 Waterloo〉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다.
유로비전에서 승리를 거둔 지 1년여 만에, 그룹은 1975년에 발표한 〈아바 ABBA〉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맘마미아 Mamma Mia〉와 〈에스 오 에스 S.O.S.〉 등의 싱글은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이 그룹은 4인조 그룹의 카리스마를 활용하기 위해 새롭게 떠오르던 뮤직비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했다. 1977년 발매된 아바의 앨범 〈어라이벌 Arrival〉이 디스코 열풍이 한창인 미국에 소개되었고, 그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하나인 〈댄싱 퀸 Dancing Queen〉은 미국에서 1위 싱글이라는 영광을 차지한 아바의 유일한 곡이 되었다.
그 곡은 따라 부르기 쉽고 디스코 클럽 분위기와도 잘 맞았다. 〈앨범 The Album〉(1978)은 일종의 일탈을 보여준 앨범이었다. 그 앨범의 곡들 가운데 돋보이는 싱글 〈테이크 어 챈스 온 미 Take a Chance on Me〉는 비록 직설적이면서 종교적 합창음악 같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매우 훌륭한 곡이었고, 같은 면의 다른 곡들은 아트록을 암시했다.
한편 그 앨범의 뒷면은 〈금발머리 소녀 The Girl with the Golden Hair〉라는 제목의 '미니 뮤지컬'(mini-musical)로 채워졌다. 〈앨범〉이 그룹의 예술적 진전을 이루는 동안,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가 〈불레 부 Voulez-Vous〉(1979) 발매에 앞서 이혼함으로써 그룹 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울바에우스와 펠트스코그 커플은 자신들의 결별로 인해 밴드 활동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당시 발매된 〈슈퍼 트루퍼 Super Trouper〉(1980)는 이전 곡들에서 볼 수 없었던 침울함이 배어 있었다. 특히 그런 분위기는 〈위너 테이크스 잇 올 The Winner Takes It All〉과 〈레이 올 유어 러브 온 미 Lay All Your Love on Me〉 같은 곡들에서 두드러진다.
안데르손과 링스타트도 〈비지터스 The Visitors〉(1981)를 녹음하는 중에 이혼했다. 이 앨범에 담긴 노래 〈원 오브 어스 One of Us〉의 레게 리듬은 그룹에 만연했던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두 번째 결별은 아바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고, 1982년 밴드는 해체되었다. 아바의 그룹 해체 이후에 펠트스코그와 링스타트는 솔로 활동으로 제법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작사가 팀 라이스와 공동작업으로 〈체스 Chess〉(1984)를 만들었다.
아바는 1972년부터 1982년까지의 활동 기간 동안 《Ring Ring》 (1973), 《Waterloo》 (1974), 《ABBA》 (1975), 《Arrival》 (1976), 《ABBA - The album》 (1977), 《Voulez-vous》 (1979), 《Super Trouper》 (1980), 《The Visitors》 (1981) 등의 음반을 펴냈으며, <댄싱 퀸(Dancing Queen)>, <맘마미아(Mamma Mia)>, <위너 테이크스 잇 올(Winner takes it all)>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아바는 201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아바그룹>
심 산
스톡홀름 중심가 전경▼
스톡홀름 시청사▼
★스톡홀름 대성당 은 1279년에 건축되어 증,개축을 거쳐 148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원래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었으나 지금은 교회로 사용 스톡홀름에서 제일 오랜교회이다. 1527년 루터교로 개종해서 지금은 국교로 되어있다. 원래는 고딕 양식이었으나 나중에 왕궁의 건축양식에 맞춰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역대 스웨덴 왕들의 대관식이나 결혼식, 장례식을 올렸던 왕실 성당으로 최근에 거행된 대표적인 의식으로는 1976년 현재의 국왕 카를 16세 구스타프왕과 실비아 왕비의 결혼식을 꼽을 수 있다. 인근에 있는 왕궁과 대비되어 조금 소박해 보이는 성당 내부는 왕실과 귀족들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다가장 볼 만한 것은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94년에 만든 나무 조각상인 '세인트 조지의 괴물 퇴치상'이다.▼
세인트 존 괴물 퇴치상▼
스톡홀름 교회▼
시청사 전면 풍경▼
★스톡홀름 시청사- 라다르프예르덴의 제방위에 지어진 건물로서 노벨 시상식이 열리는 곳이다.북유럽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외벽은 붉은 수제벽돌을 사용하였고 내부는 열다섯 쌍의 어두운 대리석 기둥으로이루어져 있다.안뜰은 사무실과 의전용 공공기관을 연결해주고그 위로는 우아하고위로 갈수록완만하게 좁아지는 106m 높이의 탑이 서 있다.
★골드룸 - 1900만 개의 비잔틴 양식의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된 화려한 벽면이 있는 방으로 노벨상 시상식 후 무도회장으로 이용한다. 스톡홀름 시를 수호하는 멜라린 호수의 여신의 왼쪽에는 서양, 오른쪽에는 동양의 모습을 그려 넣어 동서양의 중심에서 화합을 이끌어가는 스웨덴을 상징한다. ▼
★바사 박물관(Vasa Museum)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해양박물관이다.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가 재위하였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이다. 침몰된 이후 1956년에 발견되어, 그로부터 333년만인 1961년에 스톡홀름 항구에서 인양되었다.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목재로 만들어진 호화 전함으로 침몰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총길이 69m, 최대폭 약 11.7m, 높이 52.2m. 배에 실려 있었던 대포나 기구류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바이킹의 후예답게 선박에 장식된 조각품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선박에 설치된 장식품▼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