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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이 배우가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동안 김인권은 아주 살벌하거나 아주 웃긴 캐릭터로 기억되기 바빴다. 그러다가 2009년, 온전히 자신만의 스토리를 지닌 인물을 만났다. <해운대>의 동춘. 무너지는 컨테이너 박스 틈에서 살아남은 이 청년은, 지난 10년간 걸어온 김인권의 행보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이후 영화 <시크릿>과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를 거쳐, 최근 CF에서도 친숙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김인권. 그에게 2009년은 진화를 위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글 l 신민경(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 오한기 구성 | 네이버영화
10년 동안 다이어트를 해왔는데, <해운대>(2009) 끝나고 나서 살이 좀 쪘다. 정신병 비슷할 정도로 자꾸 먹게 되더라. 갑자기 몸이 확 불었다가 지금은 좀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뭘 하든 계속 몸을 혹사시켰다. 운동도 무릎이 시릴 정도로 많이 했다. 그땐 그런 게 열심히 하는 건 줄 알았으니까.
<미남이시네요>(2009, TV)의 매니저 캐릭터인 마훈이 실장 역도 초반 2~3회 때까지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껄렁껄렁하게 갔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밝고 편안한 모드로 가게 됐다. 그렇게 하니 중고등학교 여자애들이 좋아하더라.(웃음) 귀엽잖나? "자매님~" 이러는데.
처음엔 대본을 보고 "이게 뭐야?" 했다. 마 실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매번 무릎 꿇고 "자매님,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잖나. 알고 보니 그게 순정만화의 패턴인 것 같더라. 이를테면 만화 한 칸에서 '크흐흐' 웃고 있는 캐릭터? 약간은 단선적이고 정보 전달만 하는, 주인공을 계속 서포트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혼자 튀겠다고 사투리 쓰면서 리얼리티 연기를 하는 건 맞지 않았다. 만화 속 인물처럼 둥글둥글하게, 드라마 성격에 맞춰가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렇다. 캐릭터가 다르니까. 게다가 <해운대> 때는 부산에서 연기하는 맛이 있었고, <미남이시네요>는 그야말로 현장에서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20대 초반 배우들과 융화되어서 같이 G-드래곤 춤추면서 놀았다.(웃음)
<해운대>는 결과적으로 아주 잘돼서 더 그렇지만, 정말 출연시켜준 것만으로도 윤제균 감독님은 내게 은인이다. <숙명>(2008) 끝나고 1년을 쉬면서 갈급한 상태에 있었다. 영화계는 힘들지, 저예산 영화 한 편 들어가려고 했는데 엎어졌지, 드라마도 엎어졌지…. 그러다 보니 저 친구(곁의 매니저를 가리키며)와 '탁구장을 차릴까' '나가서 쥐포를 팔까'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던 차에 좋은 역할이 들어와서 너무 감사했다. 앞으로 윤제균 감독님이 제작한 영화는 무슨 역이든지 맡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출연하게 된 영화가 <시크릿>이다.
모르겠다.(웃음) 감독님이 날 아낀 것 같다. '널 어떻게든 출연시켜야겠다. 인권이 네가 <시크릿>에서 할 만한 걸 찾아보자' 이런 느낌? 그래서 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는데, 내가 스릴러 속 인물의 목적을 잘 몰랐던 것 같다. 포기할 부분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데, 인물을 너무 가져왔다. 그렇다고 영화에 크게 해가 된 건 아니지만, 스스로 반성하는 부분이다.
그 인물을 자꾸 자기화시켰다는 것. 내 정서를 다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 스릴러 영화가 재미있으려면, 용의자는 쿨하게 정보 전달만 하면서 관객에게 혼란을 줘야 한다. 그런데 내 감정과 석준의 히스토리를 합쳐 리얼리티가 있는 인물로 만들려고 과도하게 욕심을 부린 것 같다. 준비를 너무 많이 해간 것이 오히려 반성하게 되는 상황을 낳은 거다.
그래서 지금의 석준이 나온 거다. '김인권 저 친구, 잘생긴 건 아니지만 연기파 배우인 줄 알았는데 여기선 굉장히 소모성으로 끝나버리네?' 이렇게 인식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름대로 절충해서 간 것이 지금의 석준처럼 다정다감한 용의자가 된 거다. 지금 보니까 문제점이 뭔지 알겠더라. 계속 반성하게 됐다. 부끄럽더라. 어느 정도는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대로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게 배우의 임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주인공은 확실히 캐릭터가 살아야 하지만, 조연 입장에서는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 장면을 위해서 도울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아예 출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반성의 의미에서 <미남이시네요> 때는 대사를 더 또박또박 했다. 어떤 회는 단 하나의 대사도 틀리지 않고 했다. 그 동안 내가 그런 걸 못했던 것 같아서.
일단 <해운대>가 워낙 주목을 많이 받아서….(웃음) 윤제균 감독님이 "김인권이란 배우를 <해운대> 이전과 이후로 구분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예전에 윤제균 감독님이 <색즉시공 시즌 2>(2007)에 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결국 투자사가 반대하고 임창정 선배가 스케줄이 나면서 출연이 무산됐지만, 오히려 나는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무슨 주인공을 벌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해운대>에 불러줬고, 이 영화가 데뷔작 <송어> 이후 내 배우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있지 않나! 1년 동안 인터뷰를 한 번도 안 했다. 아예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도 안 찾았는데, 뭐. 해 뜨기 전이 어둡다고, 그러다가 (설)경구 형님이 윤제균 감독님한테 날 추천해준 거다. 아무도 날 찾지 않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매일 스케줄이 있고 할 일이 있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잘 될수록 잘 베풀고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것만 아니면 그냥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하고 빠지면 되지만, 그럴 때마다 존재감에 대한 고민, 생존의 욕구가 계속 제동을 건다. 연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고민들을 하지않나? 친구나 형제들 사이에서도 분명 영향력의 차이가 있고. 내가 생각한 부분들을 현장에 가서 포기해야 할 때, 그게 손가락 하나 꺾는 것만큼 아프다. 그렇다고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리면, 동기도 없어지고 배우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나 자신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하긴 하는데, 그 인물을 자꾸 시나리오 바깥에서 가져오려고 해서 안 좋은 결과를 낳을 때가 많았다. 특히 신인 시절에 연기에 자신이 없을 때 그랬다. 조연 캐릭터는 시나리오에서 다 설명해주는 게 아니니까, 나머지 부분을 자꾸 바깥에서 끌어와서 완벽하게 만들려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더라. 다른 스타일의 영화에서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물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예전 방식을 고수한 것도 있다. 이제는 좀 현명해져야 될 필요가 있겠다고 느낀다.
<해운대> 같은 경우도 그런 과정을 거쳐 준비를 다 해갔는데, 현장에서 윤제균 감독님이 '동춘이'로 다 바꿔주셨다. 내가 준비한 동춘이는 좀 더 건달스러운 '독고다이' 스타일이었다. <숙명>의 도완이 묻어있었던 거지. 그런데 윤제균 감독님은 더 사랑스럽고 호감 가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동춘이와 전혀 새로운 인물이 나왔다.
나도 예전에는 피 끓는 구석이 있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도 조용히 얘기하지 못했다. 하도 큰 소리로 강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싫어했다.(웃음) 무슨 말만 하고 나면 이상하게 심장이 벌렁거렸고. 그만큼 나서고 싶었고, 내가 더 강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가 단거리 선수였다면, 지금은 마라톤 주자에 비유해야 할까? 자꾸 부딪히다 보니 오히려 멀리 내다보게 됐다. 조연 배우들이 보통 그런다. 그래서 조연 배우들은 단역 배우들한테 정말 잘해줘야 한다. 현장에서 보조 출연자들이 뒤에서 대사 연습하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안쓰럽다. 나야 매니저라도 있지, 매니저도 없이 혼자 짐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정말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그래도 나는 연출부를 하다가 괜찮은 역할로 데뷔한 케이스다. 지금도 "역시 넌 <송어> 때 태주 역할이 최고야"란 말을 많이 듣는다. 예전에 <아나키스트>(2000)를 찍을 때 내가 존경하는 (이)범수 형이 한마디 하더라. "나는 옛날에 참 힘들었을 때 촬영장 건너편 건물 계단에 앉아서 기다려 봤다." 그 단계를 거쳐서 지금 최고의 배우가 된 거다. 그런데 나는 <아나키스트>에서 벌써 내레이션도 하고 주인공 비슷한 것도 했으니….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이것저것 많이 겪어 봐야겠구나'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배우들(장동건, 정준호, 이범수, 예지원, 김상중)도 그렇고. 박찬욱, 이무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고 이준익 감독이 제작자였으니.(웃음)
결과적으로 <송어>가 배우의 시작이긴 하다. 연출부 생활을 하다가 오디션을 보러 갔거든. 웃긴 게, 그때가 처음 영장이 나왔던 시기다. 예전 같았으면 '나 감독할 건데 무슨 오디션이야?' 이랬을 텐데, 막상 영장을 받고 보니 뭘 해서라도 군 입대를 늦추고 싶더라. 이것저것 도전하다가 <송어> 오디션 3차까지 갔다. 거기서 "떨어지더라도 연출부를 시켜달라.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눈도장을 찍어놓고 8개월 동안 연출부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청소하고, 의자 닦고, 밥상에 숟가락 놓고, 커피 나르고. 심지어 오락실에서 조감독님 오락 상대도 했다.(웃음) 그러다가 영화가 엎어지는 듯해서 군대에 가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영화가 들어간다고 오라더라. 그렇게 해서 태주 역할을 맡게 된 거다. 이창동 감독님은 나보고 '행운아'라고 하시더라. 그분은 배우들한테 좋은 얘기 안 해주시는데 말이다.(웃음)
맞다. 설경구 선배도 이창동 감독님 얘기를 많이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감독님은 아주 배우를 말려서 구운 다음에 찢어서 해체시키는 스타일이다.(웃음) <박하사탕>에서 나는 딱 한 장면에서 한 대사를 했다. "어디서 왔는데요? 서울? 서울이 다 아가씨 집인가?" 군대 말년 병장의 대사가 나와야 하는데, 군대도 안 가봤으니 잘 모르겠더라. 감독님이 그건 아니라면서 그날 촬영을 다 취소시키는데, 순간 잘렸구나 싶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사무실로 부르는 거다. 감독님이 3시간 동안 앉혀놓고 자기 군대 얘기를 해주는데,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불안해하다가 3시간 동안 군대 얘기를 들으니.(웃음) 눈앞에 있는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대사를 했더니, 감독님이 "이제 조금 비슷하네" 하고 나가시더라. 이후 2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딱 느낌이 왔다. 그래서 감독님 들어오시면 잘해야겠다 싶었는데, 감독님은 이미 집에 가셨다.(웃음) 결국 일주일 있다가 그 장면이 오케이가 났다.
내가 장동건이나 정우성이 될 순 없지.(웃음) <송어>의 태주를 연기할 당시에는 로버트 드 니로를 보면서 배우의 존재감, 카리스마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버지 장롱에서 꺼내본 성룡의 <프로젝트 A>(1983). 성룡이 시계탑에서 진짜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정말 충격을 먹었다. 영화배우란 저런 존재구나, 저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구나, 저 정도의 에너지와 용기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존재감이 있어야만 영화배우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진짜 시계탑에서 떨어지기 전까지는 배우가 됐다고 볼 수 없겠지.(웃음)
아, 그 영화 언젠가는 한번 풀어야 하는데….(웃음) 지금 내 컴퓨터에 담아놨는데, 사람들이 더 찾을 때쯤 풀 거다. <쉬브스키>는 내가 <송어>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외계인이 나오는 판타지로 극화시킨 거다. 그 당시 나는 아주 '골 때리는' 아이였다.(웃음) <쉬브스키>는 내 이야기이며, 나 스스로에게 정신 치료를 하는 이야기다. 그 영화를 찍으면서 응어리진 걸 많이 덜어낸 느낌이다. 뭐 그런 거 있지않나. 이른바 "작품 하고 있네… 예술 하고 있네" 이런 거.(웃음)
배우 해야지. 연출은 좀더 나중에 할 거다. 대학 다닐 때는 술술 이야기를 썼는데, 연기를 하면서는 한 인물에만 파고드니 이야기가 잘 안 떠오른다. 지금 연출을 하면 내 이야기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재미는 없을 거다. 연출은 두루두루 경험하고 난 뒤에 해야 할 것 같다.
잘한 건 아니었다. 공부 체질이 아니었음에도 열심히 한 거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산에 있던 나를 서울 8학군에 넣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굉장히 쿨하고 냉정하셨지만 교육자로서는 최고였다. 예쁘다고 안아주는 일은 거의 없었고, 방안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놓고 "심심할 때마다 이거 보면서 머리에 집어넣으라"고 하셨다.(웃음) 머리 좋아진다고 항상 등 푸른 생선 먹으라 하셨고. 학교 다닐 때는 집에서 떨어져 외할머니와 고모 밑에서 자랐는데, 공부를 하라고 날 여기 갖다 놨으니 정말 안 하면 안 되는구나 싶어 죽어라 했다. 당시로서는 내 인생을 다 건 마지막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공부하는 게 워낙 싫어서.(웃음) 그때부터 배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약간 아카데믹하면서도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과를 찾고 싶었다. 당시엔 신문방송학과 가서 방송국 PD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 많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연극도 했으니,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목표를 세워서 가야겠다고 생각해 연극영상학부를 선택했다. 지금 매니저도 그때 교회에서 같이 연극했던 친구다. 한 열세 편 정도 같이 올렸을 거다. 도화지 오려서 로마 병정 만들고. "제 눈을 파가셨습니까!" 그때 연기가 더 좋았던 것 같네, 하하하.
부모님과 오랜 기간 같이 있지 못해서, 혼이 많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들한테 더 많이 혼나지 않았나 싶다. 오늘 문득 든 생각인데, 우리 딸이 어딜 가서 친구 엄마한테 혼났다고 하더라. 그 얘길 듣고서 '이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내가 혼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마 그러지 않았나 싶다. 학교에 가면 그렇게 선생님들이 날 때렸다. 이유 없이 맞은 적도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배우가 되어서도 계속 맞는 역할이다. 어렸을 때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뭐랄까… 사회화가 덜 된 상태로 지금까지 야생마처럼 자라오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제멋대로 배우를 하겠다고 한 장점도 있었지만.
흠… 그런 것 같은데?(웃음) 아내가 학교 동기고, 내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이해해준다. 그 문구는 내가 젊었을 때 올린 건데, 당시에 그거 쓰면서도 얼마나 심장이 벌렁벌렁했는지….(웃음)
그렇지. <해운대>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연기하면서도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완벽하게 내 역할을 좋아해본 적은 많지 않다. 가정이 있으니 생활 때문에 연기한 적도 있다. 그때는 내 욕심과 싸워가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10년이고 20년이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단지 돈 문제만이 아니라, 일이 없으면 스스로 너무 지루해진다. 1년간 산에 다녀 봐서 안다.(웃음)
물론이다. 그건 빨리 지워야 한다. 베이스를 다 바꿔버려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게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럴 때는 오히려 정반대되는 상황에 날 가져다 놓는 게 좋은 방법이다. 토할 거는 다 토해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해도, 나 역시 예리한 사람들이 봤을 때는 '김인권은 어떤 영화의 누구로 계속 살고 있네'라고 생각할 거다.
처음에는 배역과 관계없이 살도 빼보고 근육도 키웠다. 어떨 때는 머리 손질도 해보고 성형외과에 가서 "어딜 고치면 더 좋아질까요?" 고민도 해봤다.
성형 직전까지 갔다가 관뒀다. 고등학교 친구가 "성형수술을 하면 넌 배우 생활 끝이다. 이렇게 생겼으니까 역할이 들어오는 거다"라고 하더라.(웃음) 하여튼 그때는 그 정도까지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그저 잘 살려고 노력한다. 집 청소하고 애들 돌보고. 평범하게 잘 살아야 연기도 평범하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쎄…. 하나님이 내 유전자 속에 어떤 역할을 넣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그걸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푸근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배우, 출연하는 작품마다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꾸준히 관객들과 인생의 동반자로서, 공인으로서 관계를 맺고 싶다는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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