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종말 이야기(13장)에서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권력자들과 그들에게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제자의 공모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과 대비됩니다.
6-9절 여인이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그의 행동이 인류의 대속을 위한 섬김(10:45)이라는 십자가의 가치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행동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여인의 헌신처럼, 주님은 우리의 의미를 모르고 한 충성을 의미 있게 사용하시고, 우리의 헌신을 단 한 조각도 빠짐없이 다 예배로 받으십니다.
1,2절 유월절이 다가와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의 살해 모의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참조. 11:18). 마음이 급했지만, 이번에도 백성의 소요가 두려워 명절에는 피하자고 합의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직위에 있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무리의 시선이었습니다.
3절 저녁 식사 도중 한 여인이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순전한 나드가 지닌 가치보다 더한 사랑을 담아 경배합니다. 음모를 꾸미고 배반을 꾀하는 상황 속에서 오직 무명의 한 여인만 예수님을 위해 행동합니다. 헌신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일입니다. 무엇을 드려도 주께 아깝지 않은 사랑의 마음이 내게는 얼마나 남았는지요? 사랑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내가 드릴 향유는 무엇입니까?
4,5절 헌신을 귀하게 보지 않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여인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랑이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누군가에는 낭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헌신이 광신으로 보이는 건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모자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10,11절 종교지도자들이 잠시 미뤄둔 살해 계획에 불을 지핀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탐욕을 채워줄 분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미련 없이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언제든 주님께 드릴 마음이 아니라 언제든 주님을 버릴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닙니까? (매일성경, 2024.03/04, p.74-75, 살해 음모와 장례 준비, 마가복음 14:1-11에서 인용).
① 세상의 종말 이야기(13장)에서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권력자들과 그들에게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제자의 공모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과 대비됩니다. 여인이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그의 행동이 인류의 대속을 위한 섬김(10:45)이라는 십자가의 가치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행동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여인의 헌신처럼, 주님은 우리의 의미를 모르고 한 충성을 의미 있게 사용하시고, 우리의 헌신을 단 한 조각도 빠짐없이 다 예배로 받으십니다.
② 유월절이 다가와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의 살해 모의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참조. 11:18). 마음이 급했지만, 이번에도 백성의 소요가 두려워 명절에는 피하자고 합의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직위에 있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무리의 시선이었습니다.
③ 저녁 식사 도중 한 여인이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순전한 나드가 지닌 가치보다 더한 사랑을 담아 경배합니다. 음모를 꾸미고 배반을 꾀하는 상황 속에서 오직 무명의 한 여인만 예수님을 위해 행동합니다. 헌신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일입니다. 무엇을 드려도 주께 아깝지 않은 사랑의 마음이 내게는 얼마나 남았는지요? 사랑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내가 드릴 향유는 무엇입니까?
④ 헌신을 귀하게 보지 않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여인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랑이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누군가에는 낭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헌신이 광신으로 보이는 건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모자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⑤ 종교지도자들이 잠시 미뤄둔 살해 계획에 불을 지핀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탐욕을 채워줄 분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미련 없이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언제든 주님께 드릴 마음이 아니라 언제든 주님을 버릴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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