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찬송가 384장 1절입니다.
그런데 정말일까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가 형통한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있나요?
혹시 만사가 형통하지 못하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만 이상한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받는다고 했는데, 왜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형통한 사람한테는 위로가 필요 없지 않은가요?
대학 떨어지고 취직 안 되고 장사 망한 사람한테 위로가 필요하지, 원하는 대학 합격하고 원하는 직장 들어가고 장사 대박 난 사람한테도 위로가 필요할까요?
‘형통’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감”이라고 설명되어 있네요.
설명이 마음에 듭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과 같이 잘되어 감”이라고 했으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저한테 있는 <히브리어 직역 성경>에는 이 말씀이 “그러므로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들을 지켜 행해야 하니 이는 너희가 행할 모든 것에 지혜롭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형통하리라’로 번역된 단어가 ‘사칼’인데, 뜻이 다양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지혜롭다’, ‘깨닫다’, ‘명철하다’, ‘슬기롭다’, ‘주의하다’ 등으로 나옵니다.
신 32:29에도 ‘사칼’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분별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라는 얘기는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분별 있게(지혜롭게, 하나님 뜻대로) 처신합니다.”라는 뜻입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9,000여 편에 이르는 찬송시를 남긴 사람입니다.
찬송가 384장도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천국에서 처음 뵐 분이 주님인 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찬송가 384장에서 “For I know, whatever befall me, Jesus doeth all things well.(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이 모든 것을 유익하게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로 번역한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형통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는 것이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 계획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처신합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합니다.
찬송가 가사를 쓴 작사자가 이런 생각으로 썼을까요?
혹시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가 형통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처신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