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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크는데, 그것이 하찮은 풀뿌리라 서만 그렇겠느냐. 아무리 크고 좋은 유자라도 강을 건너 다른 나라 땅으로 가면 탱자가 되고 만다 하더라. 그래서, 저 적송, 귀문의 종자들이 한미하고 변변치 못한 민촌 어귀에 잘못 앉아, 하릴없이 그 격으로 되고 말았구나 싶었다. 주위 경관하고 격에 맞게 어우러지지도 못하고, 누가 제대로 알아보는 이도 없어, 자연히 마땅한 대접조차 못 받으니, 저 무성한 군송의 기개와 풍자가 참으로 속절없지 않으냐, 하였다. 사람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있지만, 용은 개천에서 살 수 없다. 개천에 빠진 용은 제 비늘도 다 못 적시는 개
골창 물 속에서 뒤척이며 몸부림치다 죽든지, 아니면 굳이 그렇게라도 살아야겠으면 미꾸라지가 되어야 하리. 눈에 보이는 세상살이도 그렇지만 안 보이는 정신 자리, 사는 자리도 똑같다. 그것을 천한 곳에 두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내 마음을 추리고, 추리고, 또 추려서 균형을 잡고, 훌륭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 그 자리를 밝혀 가는 수련을 하는 것이 바로 '공부'니라. 부디 이 갈고 닦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오직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숨 쉬는 일처럼 몸에 익어 일상이 되도록 자신을 건사하고, 이재를 하듯이 정신을 관리해야만 정신의 토양이 비옥해 질 것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세운 무릎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청암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하기는 무엇이 귀한 것이고, 무엇이 천한 것이랴. 또한 양반은 무엇이고 상늠은 무엇이겠느냐. 귀천에, 반상에, 격조와 운치를 아는 풍류나, 도무지 그런 것이라고는 모르는 몰풍이나, 모두다 사람이 만들어 낸 편견이요 생각의 오랜 관습일 뿐, 본디 그 사물이 가진 본성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도 모르지. 소나무는,
그 종자가 무엇이든, 그것이 어대에 떨어져 어떻게 뿌리 박고 서 있든, 그저 오직 소나무일 따름, 저한테 단아하고 어여쁜 정자를 지어 주든 소똥 깔고 앉은 황소를 누렇게 매어 놓든, 거기 따라 소나무 자체의 본성이 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면 사람은 또 사람대로 천연인으로서 다만 사람일 뿐, 무슨 무슨 분별이란 다 헛된 것이 아니겠느냐."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하오나, 소나무라 하지만 그것도 하나하나보면, 해송, 육송, 적송, 백송, 거기다가 다박솔. 성질도 다르고 생김새됴 다른데, 사람 또한 조상 따라 근본이 다른즉 후에 태어난 자손도 다 달라서 분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씨가 다르니..."
"씨라. 그 씨의 근원은 또 무엇일꼬. 어느 누구라도 선조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초에 미련한 선조가 어디 있겠느냐. 허나, 어진 현조의 자손들은 그 조상이 밝힌 정신의 등을 받어서 불을 댕기어다른 등으로, 또 다른 등으로 연방 옮겨 붙여 고금에 이어 내려오면서 훤하게 불울 밝힌 집안을 이루겠지만, 아닌 경우에는 상어오는 중간에 못난 사람이 생기고, 무식해지고, 선대와의 끈도 끊어지고 집안가지들도 흩어져 각동백이가 되면서 빈곤해지면, 발등 비출 등불조차 어두워져 상놈들이 되겄지. 그러다가 죄를 짓고 등불이 아주 꺼지는 일을 당허면 천인이 되고 말아 그 인생이 깜깜한 밤중을 헤맬 것 아니냐. 저 하나만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대손손 엄하고 혹독하게 서러운 굴레를 써야 하니, 불행히도 그런 사람을 선조로 둔 후손은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상고에서는, 살인한 죄인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몰수해서 노비로 삼었다는데, 백제에서는, 간음한 여자를 노비로 만드는 형법이 있었다더라."
그러니 죄의 씨가 종인가. 이렇게 죄를 지어 그 벌로 한번 노비가 되면 그는 종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신분을 물려받은 신분 노예가 생기고, 또 다른 곳에서는 지은 빚 때문에 몸이 잡힌 부채 노예가 생겨났으며, 나라가 멸망하면서 끌려 간 포로들이 노예의 멍에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역모를 꾀한 자의 집안 가솔들도 공천,사천노비로 곳곳에 박히었다. 심지어 몹시 곤궁한 집에서는 제 가족을 노비로 팔기도 하였으며, 일반 양인의 붙이라 할지라도 어쩌다 가족을 잃고 저 혼자 떨어져 궁글어 다니다가, 할 수 없이 누구네 종으로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다. 그 연우 곡절이야 어떤 것이든, 한번 사내 종 노와 계집 종 비가 되어 신분에 낙인이 찍히면 그들은 그날로 저의 주인 상전의 마소나 전답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세습되었다. 백 년, 이백 년이 아니고, 천 년, 이천 년만이 아닌 기나 긴 세월을 두고, 일찍이는 고조선에서 만든 법인 범금팔조에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하며
남의 물건을 도독질하면 그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 원칙인데, 만일 속죄하고자 한다면 매인당 오십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고 밝힌 그때로부터, 노비의 수가 크게 늘어난 고려에 이르러, 원래 양민이었다가 노비로 된 자를 해방시켜 주려는 노비안검법에, 해방되엇던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만드는 노비환천법이 엎치락뒤치락 하던 시절을 지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노비 제도는 깊고도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칠반천역, 팔반사천에 드는 천민으로, 칠천,팔천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이름만 사람일 뿐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들을 다시 공노비인 공천과 사노비인 사천으로 나뉘었다. 장례원에서는 이들의 호적을 철저히 조사하여 노비안을 작성해 두었는데, 공노비는 장례원에서 직접하고, 사노비는 지방의 수령이 삼 년마다 속안을 만들어 변화 정황을 적은 뒤에, 이십 년마다 정안을 기록하여 본조, 의정부,장례)원,사섬시,본사,본도,본읍에 보관하였으니. 이렇게 숨통을 조이는 신분의 족쇄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주먹속에서 뛰는 벼룩과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집안에 묶인 노비로 꼼짝못하는 사천보다는, 밖에 나가 살면서 제 식구와 가계를 꾸려 갈 수 있었던 공천은 처지가 좀 나았다.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 잡화와 노비 들을 맡아 보는 내수사에 속하였다 하여 내노비, 혹은 궁노비라 부르던 공노비를 비롯하여 관아에 소속된 관노비, 역에 박힌 역노비, 그리고 향교에 딸린 교노비, 또 고려의 사찰에 있었던 노비들을 조선 초기에 나라를 세우면
서 모조리 몰수하여 공누비로 만든 사노비들은 공천이었는데, 이 공노비 공촌 중에서도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는 서로 일이 달랐다. '선상'은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사역에 종사시킬 사내 종을 지방 관아에서 뽑아 바치는 일이었다. 일년에 여섯 달씩 교대로 고되게 노역하는 이 경중 공천 선상 노비는, 일년에 일곱 번씩 교대하는 지방 관노보다 훨씬 무거운 일을 하는 셈이어서, 이들에게는 시중드는 봉족 두 명을 붙여 주었다. 이 봉족꾼은 선상 노비를 위해서 해마다 두 필씩 포를 바쳐야만 했다. 입역이 고달픈데다가 선상 노비들을 대부분 지방에 늙은 부모와 그리운 처자식을 떼어 놓고 온 처지라서 몹시 괴로워하던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을 하거나, 포 열두 필에서 열다섯 필이나 되는 막대한 선상 대립가를 치르고 피역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금액이어서 아주 특별한 노비의 경우말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몸으로 신공을 바치던 선상 노비가 아닌 납공 노비는 신역 대신 매년 자신이 노비인 값, 노비공을 사섬시에 현물로 바쳤다. 이 납공 노비가 짊어진 부담은 실로 무
거워서, 해마다 사내 종이 포 한 필에 저화 스무 장이고, 계집 종이 포 한 필에 저화 열 장씩이었다. 저화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불환 지폐인데, 정화와 바꿀 수 없는 이것을 사람들이 기피하여 나중에는 저화 석 장에 쌀 한 되로까지 그 가치가 떨어졌지만 처음에는 한 장에 오승포 한 필이나 혹은 쌀 두 말에 맞먹는 값이었으니, 저화 스무 장이면 오승포 스무 필이거나 쌀 네 가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제 몸뚱이 가릴 베 조각 하나 변변치 못하고, 제 입에 넣을 좁쌀 한 숟가락 넉넉지 못한 노비들에게는 연자맷돌같이 무거운 납공이었지만, 피할 수 없이 목을 조이고 있는 톱니이기도 하였다. 선상,납공말고도 공노비들은 제가 속한 관아의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공궤를 담당해야 했고, 노비 공물우 부가세로 작지를 납입해야만 했다. 작지는 호조나 광흥창같은 수세창고에서 징세 사무를 보는 데 필요한 종이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세를 받을 때, 공세미 한 말에 종이 다섯 장, 열 말에는 스무 장이 한 권인 종이책 두 권씩을 덧붙여 내게 하였다. 세금으로 내는 공세미에만 부과시키던 작지는 때로 논밭이나 임야, 가옥, 노비들을 사고 팔 때 증명 신청자로부터 수수료로 밭기도 했는데, 나중에 무당한테는 무격세, 산간의 화전민한테는 화전세같은 잡세와 더불어 공사노비공에도 부가 징수 하던 세목이었다. 이런 것을 못 견대어 도망하는 노비들은 추쇄도감을 두어 철저히 잡아서 막았는데 사노비, 즉 사천은 공노비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사액서원에 딸린 원노비와 양반가에 딸린 반노비도 사천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노비는 저의 주인인 상전의 집안에 붙박여 살면서 대를 물려 가내노복으로 잡살뱅이 온갖 일을 다 하였다. 사노비는 자신의 호적단자를 따로 가질 수가 없었다. 입적자는 반드시 호적을 가져야 하는 법령을 따라 삼년에 한 번씩 호구 조사를 할 때, 각 호의 가장은 본인의 거지와 성명, 본관, 나이, 직역, 그리고 부의 직역과, 위로 사대조에, 외조부의 성명과 본관을 적은 다음, 처의 나이와 본관, 처의 부,조부,증조부,고조부,사대조와 외조부를 쓰고, 그 옆에 함께
거느리고 사는 자녀의 나이와 이름을 적은 뒤. 말미 아래 한쪽 귀퉁이에 가내노비의 나이, 이름을 소상히 적은 호적단자를 관아에 보냈다. 관아에서는 이 단자 대장을 정리하여 호조,한성부,본도,본읍에 비장하였는데, 노비의 호적은 장례원의 노비안에 올랐다. 신분이 미천하여 이름 하나 사람답게 얻지 못한 채, 키가 건드렁하니 크다 하여 '키녜', 작달막하고 톰방하게 생겼다고 '돔발이', 얼굴이 넓적한 생김새 그대로 '넙댁이'라 불리던 노비들은 단자에 발음이 비슷한 글자 '기래', '동발', '여덕' 등으로 적히기도 하였다. "어미가 종이면 그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어미의 신분에 따라 종으로 삼는다." 는
종모법을 따라 세습되는 노비의 이름은 어미 아래 낳는 대로 적히었으니, 아들은 노가 되고 딸은 비가 되었다. 매안 이씨 선대의 문서에 적힌 종의 이름은 이 백 년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먹빛이 선명하다.
솔 비 귀매 년 경인생
일소생 노 영득 년 경신생
이소생 비 영근 년 갑인생
삼소생 비 삼매 년 계해생
사소생 노 귀득 년 병진생
오소생 비 계덕 년 계유생
경인생인 계집종 귀매가 낳은 소생은 아들 둘, 딸 셋 다섯으로 이들은 모두 종이 되었다. 그 첫 번째 소생은 사내종 영득으로 경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계집종 영근으로 갑인생, 세 번째 소생은 역시 계집종 삼매로서 계해생이다. 네번째 소생은 사내종 귀득으로 병진생이며, 다섯 번째 소생은 계집종 계덕으로 계유생이다. 그 중에 둘째 배에 낳은 갑인생 계집종 비 영근이 비부를 얻어 다시 자식을 낳으니, 그의 소생은 모두 또 종이 되었다. 그러매 숨 한 칸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서 그 새끼의 이름을 단자 끝에 촘촘이 단필로 적어 나갔다.
비 영근
일소생 비 명금 년 병신생
이소생 노 명길 년 을묘생
삼소생 비 명분 년 갑신생 부 사노 박흥대 계집종 영근이의 첫 번째 소생은 계집종 명금이로 병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사내종 명길이 을묘생이고, 세 번째 소생은 계집종 명분이로 갑신생이다. 명분이는 사내종 박흥대를 비부로 얻었다. 그러니 '귀매'라 하는 계집종 하나의 뱃속에서 다섯 노비가 나왔고, 노비의 자식은 또 노비가 되는 법을 따라, 귀매의 딸 영근이 한테서 낳은 자식 셋까지 모두 종이 되어, 새끼 종만 여덟으로 불어났다. 문서에 적히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여러 자손들이 분가하거나 출가할 때 딸려 보내 노나 주었을 것이다. 어미와 딸이 제 소생들을 데불고, 대를 물려 함께 한 집에서 종을 살고 있는 이 이름들 아래, 또다른 노비의 가족이 비끌어맨
발목을 붙들고 있다.
비 선임 년 경술생
일소생 노 일룡 년 갑신생
이소생 노 후룡 년 병술생
비 양례 년 갑인생
일소생 비 다옥 년 신묘생 부 사노 유승진
노 시능 년 무술생 비 만업 년 갑신생 계집종 선임이는 경술생인데, 그 첫 번째 소생은 사내종 일룡이로 갑신생이며, 두 번째 소생은 사내종 후룡이로 병술생이다. 또한 계집종 양례는 갑인생으로 그 첫 번째 소생은 계집종 다옥이 신묘생이고 다옥이의 비부는 사노 유승진이다. 또다른 사내종 시능이는 무술생이며 계집종 만업이는 갑신생이다. 그런즉 이 숫자는 모두 여덟이다. 도합하여 열여덟 명 종들의 이름을 이기채는 낱낱이 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을 짐작해 보았다. 그들을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 또렷또렷 생생하게 적혀 있는 이름들이 꼭 살아 있는 눈구녁들 같아서 그는 전율을 느꼈었다.
"그래, 나는 이 한 많은 세상에 종이었다."
이름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은 어찌 종이 되었을까. 난신적자의 자녀 중에 아들은 목을 베고 딸은 관에 잡아들여 먼 변두리 고을 관아의 관비로 만들었으니, 이 관비가 낳은 소생들은 어쩔 수 없이 관노, 관비가 되지만, 그 핏속에는 세월을 잘못 만난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또 양민의 딸이라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체납으로 더 이상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부모가 밀린 세금 대신 울면서 딸을 관비로 바치기도 하였다. 관비는 비자와 기생으로 나뉘었다. 둘 다 관가에 매인 종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쪽은 용모와 재능에 상관없이 허드레 궂은일,잡일에 물일을 하는 계집과 아낙이고, 한쪽은 자색이 분통 같고, 가야금,비파를 타며, 교태 아양과 춤과 노래에 몸이 익은 관기, 기생이다. 그냥 기생이라 하여도 여덟 가지 천민 중에 하나라 그 신분이 미천한데, 그나마 종이면서 기생이니 관기는 비록 그 모습이 해당화 같이 아름다워도 한낱 창기로, 해당 주읍에 객이 올 때마다 객고를 풀라고 내주어 간하게 하였다. 관가에 출입하는 양반 중에는 이 관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투어 끝내는 틈이 벌어지고 마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관기가 낳은 아들은 관노가 되고 딸은 다시 어미를 이어 관기가 되는 것이 법이어서 모두 함께 관아에 매어 있을 때, 모녀,자매의 기생이 한 양반과 더불어 희롱하는 일이 잦아, 풍교를 말하기가 무색한 일이 많았다. 관기 가운데는 침기가 있었다. 보통
때는 기생 노릇을 하고 내아에서 부르면 대답하고 응하여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여염의 안살림을 해 본 일 없는 기생에게 바느질이 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웬만한 것은 게발을 건너뛴다 하더라도, 가는누비 같은 것을 맡기면, 그 누에씨보다도 작은 바늘 땀에 촘촘히 박아가는 선이 한 땀이라도 어긋나면 안되는 누비 바느질, 그 중에도 가는누비를 무슨 재주로 해낼 것인가. 솜씨는 그만두고 속에서 열불이 나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얌전한 기생이, 솜 놓은 저고리 나 바지나 두루마기 감의 온 바닥을 개미가 지나가듯 좁은 걸음으로, 한 줄도 아니요, 두 줄도 아니요, 석 줄, 넉 줄도 아닌, 수수 백, 수수 천 줄을 누벼야 하는 누비 바느질을 하고 앉아 있겠는가. 당치않은 일이었다. 그것을 알며서도 내아에서는 일감을 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 기생은, 행음을 해서 얻은 비녀나 노리개, 팔찌와 반지 같은 것을 주고 바느질 집에 가서 해 왔다. 이래서 원성이 높았다. 이들 관비 중에 양반의 눈에 들어 그에게 속신하게 되면, 양반은 그 관비를 집으로 데려가고, 대신 자기 집에서 부리던 사비를 보내 자리를 채웠
다. 그리고 양반에게 몸이 속한 관비는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그의 천첩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 관기를 데리고 나왔을 경우에는 집에 가두어 가비를 만들었는데, 노래 부르는 계집 종 가비는 사대부의 집에서 붙어 살며, 손님을 접대할 때 가창으로 봉사하였다. 이러한 공비, 사비들은
"날마다 지아비를 바꾸어 개, 도야지와 같으니, 소생은 단지 어미 있음을 알고 아비 있음을 알지 못한즉, 아비를 묻지 말고 어미를 따르는 수모의 법을 펴야 하겠다"
고 세종 13년에 말하여진 것이다.
노비의 신분 세습에 관해서 조선 전기에는, 부모 양쪽 중에 하나만 천인이어도 그 자손은 천인이 된다고 했다가, 한때는 종부법이 시행되어 양인과 비 사이의 소생은 양인을 만들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의 자식 신분이 바뀌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양반층의 반발로, 얼마 안가서 이 종부법은 폐지되었다.
그리고는 어미의 신분을 자식이 따른다는 종모법이 시행되었는데, 말하자면 아무리 사내 종이라 할지라도 만일 양민의 딸과 혼인하면 그들의 소생은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민이 되는 것이었고, 또 계집 종이 아무리 사대부의 자식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는 어미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외 모두 노와 비인 경우에는 할 수 없이 그 소생들도 모두 노비가 되었지만, 그 소생들 가운데 아들인 노는 양민의 딸을 만나면 그 자식들부터 양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노비의 딸은 아무리 양민의 남정네와 혼인한다 해도 하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아들을 낳으면 부디 양민의 새악시를 만나 그 자식 대에서부터는 부디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물론 그 간절한 소망대로 부지런히 일하거나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제 몫의 재산을 지니고, 머리도 깨어, 양녀와 혼인한 공,사노들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못한 경우들이 더 많았다. 그러니 나이가 차서 짝을 맞는다는 것은 종이 종을 만나 다시 더 많은 종을 낳는다는 말이나 한가지였다. 이만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도 높고 살림의 규모도 크
겠지만, 종모법에 따라 저절로 늘어난 노비의 수효가 이 사람의 재산을 늘려 주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논 열마지기를 주어야 살 수 있는 노비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곧 재산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노비들은 오직 저의 주인인 상전의 손발이 되어 일했다. 아무리 노비라 하여도 사람인지라 제각기 타고난 성격이나 재주가 다를 것인데, 어떤 사노는 상전의 농사를 맡아서 경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노는 상전의 이익을 위하여 장사판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농지의 장리를 관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노들은 농사짓는 일에 뼈를 바쳤고, 나무를 해 오거나 물을 긷거나,
집 안팎의 잡일 중에서 계집종이 할 수 없는 온갖 궂은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계집종들은 상전의 가까이에서 몸 심부름을 하는 몸종이 되거나, 혹은 침비가 되어 바느질을 하거나, 혹은 상전의 눈에 들어 천첩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정지 일과 빨래, 쓸고 닦는 소제며 끊임없이 생겨나는 일들에 손바닥이 나무 껍
질같이 터지고 갈라지기 예사였다. 그리고 혹 가다, 상전과 한 집안에서 살지 않고 따로 나가 밖에 살면서, 몸으로 일하여 바치는 신역 대신 노비공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노비공은 사노가 매년 면포 두 필이고 사비는 면포 한 필 반이었다. 그런데 사천의 노비공은 상전들의 월권으로 점점 부과액이 늘어나 드디어는 노비들의 살가죽을 벗겨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엄청나게 가혹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영조 31년, 무거워진 노비공에 깔려 빈사 상태에 이른 사천들의 공납
품을 반절로 줄여, 사내종은 면포 한 필, 계집종은 반 필로 감하는 노비공감의 영을 내린 뒤, 엄격하게 통제하여 절대로 더 받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계집 종의 노비공은 면제를 해 주어 버렸다. 뿐 아니라 영조는 노비의 호적인 노비안과 그에 관한 문서가 비치되어, 노비로 인한 송사를 맡아 보던 장례원을 끝내 폐지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평생 동안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외가의 피에 대한 뼈저린 증오와 저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의 아드님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어머니는 전라도 땅 임피의 천노 최씨의 딸로, 후일데는 임금을 낳은 숙빈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숙종비 인경왕후가 혼일할 때 교전비로 사가에서 따라 들어온 모종이었으니, 만일 노비 종모법을 따른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임금이라 하여도 자신은 종의 자식인즉 사노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 아닌가. 다만 천행으로 임금은 그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묻지 않는 무치여서, 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언제나 거꾸로 흐르는 외가의 피와 맞부딪쳐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하여, 비 정성 왕후를 일생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따님을 꽃 같은 배필로 맞이하여 마주앉은 첫날밤의 첫 마디 때문이었다.
"참으로 손이 곱기도 하오."
신랑은 밀촛불 휘황히 타오르는 신방에 들어, 어루만지기에도 아까운 신부의 흰손을 잡고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찬탄하여 말씀하였다.
"본곁의 어머니가 저를 귀엽게 여기어, 시집보낼 때까지 곱게 기르노라고 일을 한번도 안 시켜서 그런가 보옵니다."
고개를 수그리며 말한 신부의 이 한 마디에 신랑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잡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저것이 내 어머니가 미천한 종인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구나. 저것이 내 어머니 갈라터진 손을, 제 말 하며 비웃는구나.
저것이 나를 모욕하는구나.
저것이 내 피를 조롱하는구나.
깊은 수모를 느낀 영조는 다시는 돌이켜지지 않는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공방으로 그 심정을 갚았던 것이다. 결국은 장례원을 폐하여 종의 명부를 다 치워 버렸지만, 수천년을 두고 내려오던 누습은 결코 없어지지 않아, 임금의 성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비 제도는 깊이깊이 뿌리를 박은 채 성 하였다.
노비와 상전의 관계는 마치 서리를 튼 나무 뿌리와 견고한 지반처럼 서로 엉키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나무의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져 뿌리를 벋을 때 버슬버슬한 모래흙이라면 빨아들일 수분도 넉넉지 않거니와 지반이 실하지 못하여 작은 바람에도 뿌리가 뒤집히며 지나가는 빗줄기에도 사태가 날 것이다. 또 너무나 박토여서 온통 메마른 흙투성이 큰 돌 작은 돌이 옹이같이 박혀 있는 땅 속에서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요, 만일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 남으려면, 제 앞을 가로막은 이돌멩이 저 바위덩어리를 비틀어지게 외틀어지게 감으며, 그것에 눌리며,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벋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썩은 웅덩이를 품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도 따라 썩기 쉽고, 우물 같은 암벽에 갇힌 뿌리는 벋어도 소용없이 저희끼리 뒤얽히고 꼬이다 말 것이다. 그뿐인가, 독충이 살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가 벋어 나가기는커녕 중독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지하의 어둠은 무궁하고, 토질은 비옥하여 풍요로운 물을 머금은 땅에 뿌리의 발이 닿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반촌이라면 반궁, 즉 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주변 동네를 말하는데, 이를 반중이라고도 하였다. 반촌은 큰 길을 경계로 동,서 반촌으로 나뉘었다.
동반촌 언덕 위에는 유생들의 선비다운 기상 배양을 위하여 숙종조에서부터 의논되어 영조 원년에 이루어진 숭절사가 있었다. 이곳은 불의에 저항하여 높은 기상과 절개를 보여 준 중국의 모범 태학생인 서진의 동양과 당의 하번, 송의 진동, 그리고 구양철을 숭모하여 제사하던 곳이었다. 또 동반촌의 큰 길가에는
병자호란 당시 오성 십철의 위판을 받들고, 남한 산성의 행재소(거둥때에 임금이 머무는 곳)로 들어간 성균관 수복 정신국, 박찬미 등을 표창한 정문이 영조 3년에 세워졌다. 수복이란 조선의 단, 묘, 능, 사, 원, 전, 서원 등에서 분뇨오 물을 청소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반촌에 살고 있는 반인들은 주로 성균관에 소속된 하예들로 흔히 '관 사람' 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대개 본시 개성에서 옮겨 온 고려 국학 소속 노비의 후손들이다.
고려 중기의 명신이요, 큰 학자였던 찬성사 안향은 일찍이 섬학전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을 낙성하여 학교를 크게 부흥시키고자 사재와 사노비 백명을 국학에 모두 들인 일이 있는데, 조선 성균관의 하예들이 바로 그 노비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 반인들의 인구가 날이 갈수록 점차 불어나 성균관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쇠고기 전매권을 주었다. 그래서 생긴 푸줏간을 현방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또 곡예와 가무, 음곡을 일로 삼던 재인 백정이기도 하여, 궁중의 잡희나 탈춤 광대놀이 같은 산디놀음에 우인으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반인들은 어음과 곡성이 송경(고려의 서울인 개성) 사람과 같아서, 여자가 슬프게 흐느껴 곡할 때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남자들은 의복이 매우 사치스럽고 혈기가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왕이 싸움을 벌일 때는 곧잘 가슴이나 다리를 찌르는 버릇이 있으매, 서울 본토막이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이들 중에 관비 소생은 성균관의 재직이 되고, 타비 소생은 서리가 되었으며, 재직이 장성하면
수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반촌 북쪽에 단을 모시어 두고, 해마다 안향의 기일이 오면, 가기 돈과 포목을 내어 제수를 융숭하게 차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으며, 안향의 후예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이가 있으면
"보라, 이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고들 했다고 한다.
실로 무엇이, 조금도 쉬지 않는 충정으로, 조금도 줄지 않는 수량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두고도 변함없이 그 상전을 그리워하게 하랴. 그리고 그 길고 오랜 강물을 혈온으로 따뜻하게 할 수가 있으랴. 연재 송병선은 구한말 사람으로, 소선 숙종조의 거유이며 노론의 머리인 우암 송시열의 팔세손이다. 그는 고종 임금을 가르친 왕사였는데, 아우 심석 송병손
과 나란히 그 인품과 학문을 널리 나라안에 떨치었다. 그러다가 광무9년,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나라의 자주권을 잃은 비분과 원통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연히 독약을 마시어 자결하였다. 의관을 정제하고 임금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 사배 무릎을 꿇은 채, 갈아입은 흰 옷 위로 선혈을 쏟으며 숨이 지는 연재 송병선의 발치에는, 맨 처음 이 자결을 준비할 때부터 소리없이 시중을 들던 사노 복남이가 애절하게 엎드려 있었다. 생시에야 어디 감히 차마 상전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었을까만, 이제 비장하고 의롭게 목숨을 끊은 주인 마님의 발을 어루만지며 오로지 눈물로 그 발등을 적시던 복남 이는, 드디어 터지는 설움으로 상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산발한 머리를 그 몸에 묻었다. 검붉은 원형이 송병선의 가슴을 물들이고, 복남이의 앞자락을 물들게 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상전의 몸을 제 두 팔로 감싸서 가슴으로 보듬어 안은 복남이는, 어질고 따뜻한 어버이를 잃은 애통으로 사뭇 서럽게 울면서 마지막 가는 원혼을 배웅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복남이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
송병선의 머리를 내려놓고, 피에 물든 옷자락을 여미어 드린 뒤, 그는 상전이 미처 다 못마신 약사발의 독약을 기울여 마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통곡으로 상전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릇에 묻은 약을 다 혀로 핥고 핥아 그는 상전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송병선의 시신 발치에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 복남이는, 죽어서도, 생전에 그리하였듯, 상전의 묘서 발부리 아래 이만큼에,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고개를 숙인 시늉으로 봉분도 나지막이 묻히게 되었다. 밤이나 낮이나 멀리 가지 않고, 꼭 부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상전의 존체를 우러르는 복남이 무덤 위로는, 그 상전의 손길같은 어질고 속 깊은 바람결이 언제나 흐르고 고이고 하였다.
시공을 넘어 함께 있는 이 종을 위하여 송병선의 후손들은 연재의 묘서에 벌처를 할 때면 꼭 잊지않고 복남이 무덤도 돌보았다. 그리고 연재 송병선의 기일이 돌아오면, 제사가 한날 한시인 복남이의 제상도 조촐하게 보아 개다리 소반에 나물 몇 가지를 차려서 송병선의 제상 아래 들여놓았다.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마치 어미의 태안에 든 태아처럼, 상전의 제상 다리 아래 감싸이듯 놓여 복남이는 제몫의 조그만 개다리 소반을 받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주종의 혼백을 하자리에 모신 은진 송씨 송병선의 후손들은 엄숙한 감회로 제사를 올리었으니.
그들이 제상 앞에 기라성처럼 서서 의롭게 빛나는 조상 송병선에게 엎드리어 재배를 할 때, 살아서나 똑같이 죽어서도 그 옆에서 상전을 무덤을 지키고, 이렇게 제사에 혼백까지 따라 와 모시는 만고 충복 복남이가, 한자리에서 같이 그 귀한 절을 받는 것이었다.
3부에 계속
7 부디 그 땅으로
기차 천장에서 비추이는 불빛이 메마른 주홍으로 가루처럼 부옇게 내려앉은 강모의 얼굴은, 움푹 패인 눈그늘과 창백한 콧날 음영 때문에 핏기가 없고 푸석 푸석한 마분지 가면 같아 보인다.
"빗자루냐? 좀 풀고 편안하게 앉어라. 갈 길이 멀어."
강태는 부스럭거리며, 선반 위에 올려 놓은 가방과 짐보따리를 매만져 반듯하게 들이밀기도 하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어 앞뒤로 주소 확인도 하더니, 의자에 털썩 앉으며 어깨를 좌악 펴 등받이에다 부리고 기댄다. 그리고는 강모한테 농담을 던지듯이 한 마디 하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마치 이제부터 출발하면 봉천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을 사람처럼. 꾹. 날카롭게 감은 눈이 뜨고 있을 때보다 단호하고 예리해 보인다.
기차 안 풍경은, 전주 매안 간에 가까운 이웃집처럼 노상 통학차를 타고 다닐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여수에서 떠난 전라선 철도가 순천을 거쳐 구레, 곡성, 남원을 지나 전주에 이르도록 걸린 시간도 적지 않은 것이었지만, 전라북도 도경을 벗어나서 충청도와 경기도, 한강을 건너 경성까지만 간다 해도 여기서부터 열 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거리라 멀 터인데. 평양, 대동강, 신의주,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 봉천이라니. 거기는 얼마나 먼 곳일까.
"아마 온 하루 밤낮을 꼬박 잊어 버리고 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스물네 시간도 더 걸릴는지 몰라. 연착하고 연발하고."
"기차 속에서 밤을 새우며요?"
"세우기 힘들면 눕히렴. 느긋하게 마음 먹어. 만만디로 가는 길이니까. 떠나는 간다만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 않느냐. 이 한겨울 삭풍에 달 뜨는 만주 벌판을 달리면서 대륙의 정취를 한껏 맛보는 것도 좋겠지. 그 맛에 다 마적질도 하지 않겠냐?"
"마적이야 말을 타겠지."
"차나 말이나."
두 사람은 실없이 말에 서로 웃어 버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설렘과 두려움이 뒤엉킨 긴장을 감추기도 어려워 일부러 눙치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길이 멀 줄을 알았으면 아예 침대표를 끊을걸..."
아까 정거장에 당도하여, 강태한테서 만주로 가는 삼등 완행열차 기차표를 받아 들고, 선 채로 몇 마디 나누다가, 강모는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했다.
차표는 강태가 끊어 오기로 했던 것이다.
강태는 이 말에 강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부르조아지."
라고 일축해 버렸다.
"꼬딱하니 앉아서 그 먼 길을 어떻게 갑니까? 몇 시간도 아니고 몇 십 시간씩 걸리는 데를. 막대기라면 몰라도."
"서서 안 가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라. 이런 좌석조차 못 구해서 자리가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은 서서 간다."
"그거야."
"형편? 이제부터는 너도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니야."
걸어서 가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겠지.
맞는 말씀이오.
무엇을 타고 이렇게 가든지 멀리만 갈 수 있으면, 나는 좋습니다. 달 뜨는 만주도 해 지는 벌판도 나에게는 상관없습니다.
강모는 건네받은 기차표를 양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깊이 넣었다.
면죄부.
이것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다. 죄. 강모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한숨보다 깊은 그 말을 어둡게 삼킨다. 삼킨 말이 덩어리져 걸린 가슴을 누르며, 자리에 앉아 그는 비로소 사방을 둘
러보았다. 서로의 숨이 눅진눅진 묻어나리만큼 붐비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옷가지나마 그런대로 갖추어 입은 남자와 부인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행색들이 남루하였고, 낡은 양복 윗도리에 솜을 두실두실 둔 핫바지를 꿰어 입거나, 솜 놓은 미영 저고리에 몸뻬를 걸친 아낙네들이 추워서 팔짱을 낀 채, 둥덩산 같은 짐덩이 보퉁이들 틈바구니에 엉키어 앉고 서고, 두런두런 불빛 아래 이야기하는 모습들은,
왜 그런지 을씨년스럽고도 뒤설레는 것이어서 미묘하게 들떠 보였다. 하기야, 기차라는 것 자체가 길 위에 뜬 것이라, 그 안에 실려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인들 어찌 고요히 가라앉아 있으리. 비애도 희열도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이 당연할 일이다. 이런 중에도 어디쯤부터 오는 사람일까, 잠을 이기지 못한 더벅머리가 엄동의 얼음판자 기차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져, 비쩍 마른 새우처럼 꼬부린 채 자고 있었다. 바로 그 옆, 큼지막한 보따리에 걸터앉은 중늙은이 영감 하나도 꿉벅굽벅 조느라고 이마를 의자 손잡이 모서리에다 곧 부딪쳐 찧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렁 위의 바가지들. 이삿짐을 꾸린 듯 보이는 고리짝과 이불더미 짐꾸러미 끈에는 와그랑 다그랑,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조롱박이며 작은 바가지 쪽박, 쌀이는 이남박, 그보다 좀더 큰 함지박에 조그만 됫박들이 길떠나는 일가족의 중요한 세간살이로서, 마치 그 식구들 앞앞의 얼굴이기나 한 것처럼 둥그름히 누렇게 매달린 채 오롱조
롱 묶이어 있었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달아매어진 그 바가지들 형상은 우습고 엄숙했다. 그리고 눈물겨웠다.
별 신기한 것을 다 구경한다는 표정으로 기모노 입은 일본 여자 하나가 기차 선반을 올려다보며 키들키들 손가락질을 하는데, 저만큼 문간 옆 뒤쪽에 앉은 중년의 아얌 쓴 여인이 웬일인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뛔애애액.
희미한 새벽이 푸르스름 전주역 골기와 등허리 너머로 차갑게 트여 오는 시각, 기차는 어느결에 스스릉 미끄러지며 새벽빛을 뿌옇게 뒤덮어 가리우는 연기를 목메이게 내뽐는다.
뛔애액. 이것은 비명인가, 기염인가. 부르짖어 대답할 리도 없는 그 무엇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도시의 새벽과 산야의 복판에 대고, 목이 쉬도록 부르는 소리, 외마디. 강모는 서서히 흐르는 기차 차창 바깥 건물과 기둥과 전송객들을 다급하게 내다보았다. 그들은 휘익 스치며 멀어진다. 기차의 허이연 입김이 그들을 지운다. 뛔애애액. 기적이 운다.
저 소리의 이름을 '기적'이라 지은 이는 누구였을까.
그는 어떻게 이 시꺼먼 몸뚱이에서 저토록 우람하게 토해 내는 증기의 산더미 구름을 보면서, 쉰 목소리로 토해 내는 저 엄청난 굉음 탁성을 가리켜 기적, 증기의 피리 소리라고 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피리나 대금, 단소, 또는 흔히 호적이라 하는 태평소 날라리와는 그 크기나 빛깔 모양새부터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 기차를 보고. 그러나 한편으로 두 물건이 생김새부터 서로 아주 다른 것만도 아니어서, 문자를 다루는 이들의 상상법이 엉뚱하면서도 딴은 그럴 듯한 한지라, 강모는 문
득 기가 막힌 심정으로 실소하였다. 순간, 자신이 타고 있는 이 기차가 운명의 검은 피리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너는 나를 입김으로 불어 내어 그 어떤 노래를 부르려느냐.
비가. 어쩌면 나는 지금 여지껏 살아오던 모든 것과 함께, 이 기차의 울음속에 증기로 기화되어 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형체도, 시간도, 관계도. 어린 시절 매안의 아랫몰 복사꽃 핀 냇물과 버들가지 꺾어서 불던 피리, 푸른 풋내 서투른 입김 속에 섞여 번지면 까닭도 알 수 없는 풀물이 가슴에 들어, 하루 종일 필릴릴리 판막이 떨리곤 하였는데, 버들피리 연두 물빛 아득히 흔들리는 아지랑이 너머로, 아아, 봄의 비늘처럼 하염없이 날리고 날리던 연분홍 살구 꽃, 꽃잎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러던 날, 어느 해 봄, 전주로 유학하여 고향을 떠나 왔을 때. 고등보통학교 음악선생이 유난히 강모를 기꺼워하며,
"자네, 음악을 공부해 보지 않겠나?"
하고, 애착어린 격려를 성심껏 해 주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기타, 플루트, 그리고 클라리넷 같은 악기 다루는 법을 방과 후에까지 남아서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강모는 그때 서양의 금속 은빛 피리를 처음으로 만져 보았다.
"자네가 지금 배우는 것은 모두 기초다. 겨우 악기의 문맹을 면하는 것이지. 나는 연주자가 아니라서 더 깊고 진정한 음악혼을 자네한테 심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허나, 그릇이 못돼. 나는 다만 안내판. 표지 역할은 할 수 있지. 그런데 자네는 세포에 음의 혼이 있으니, 꼭."
어느 악기가 나를 울려 부르는지 귀기울이고 들어 보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동경으로 떠나고 싶었다.
실핏줄 밑바닥까지 자신을 당기는 바이올린 네 가닥 현 위에 생애를 싣고, 그는 마음껏 떠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부서져 동강이 난 바이올린 중허리처럼 꺽이고 말았다. 참 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채, 앞이 보이지 않는 굴 속에 앉아 장님처럼 검은 시간의 벽을 더듬는 손. 강모는 파리한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흰 손등에 푸릿푸릿 돋아오른 정맥이 스산하게 비친다. 춥다. 그는 손을 오그리어 차디찬 주먹을 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는지도 몰라.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돌아올 수 없어다는 것은 어찌하여 같은 말인가. 두 말은 톱니같이 맞물리면서 강모의 뇌리에 송곳니를 박는다.
전주 이씨, 자신의 본향이어서 이곳에 입성할 때 감회가, 어린 나이에도 유달리 진진하고 유심하였으나, 이제 그가 껍질 벗는 배암처럼 허물을 벗어 놓고, 기차를 따라 몸만 빠져 나가려 하는 지금, 전주는 허연 껍데기 한 장으로 남아서 검은 기차의 꽁무니를 아연히 바라만 보고 있다. 그 서글프고 허전하게 벌어진
아구를, 버리고 달아나는 기차 증기가 허어옇게 메운다.
"제군들이여, 그대들의 관향은 어디인가?"
전주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심진학 선생은 말했었다.
"나는 청송 심가다. 아직까지 그곳에 가 보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꼭 나의 관향, 나의 본, 청송에 가 보고 싶다. 아마 가 볼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관향에 가 본 일이 있는가. 전주 이다. 김해 김이다. 밀양 박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왜 내 성씨 앞에 그러한 지명을 달고 붙여 부르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나의 성씨를 맨 처음 쓰기 시작하신 나의 뿌리, 최초의 거룩한 씨앗, 시조께서 나셨던 고을 관향에 가 본 이는 더욱 많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누구를 만나 수인사 통성명을 할 때
"본이 어디냐?"
고 묻는다. 그러면 으레 그 대답으로, 조선 팔도 삼천리 강산 어느 곳엔가 엄연히 실재하
는 동네 지역 이름을 대어 말하기 마련이다. 가령
"파평이요."
"달성이요."
"광산이요."
"안동이요."
"진주."
라고. '본'이란 글자 그대로 '근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한 몸 존재의 근본. 나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 내 성씨 앞에 붙인 지명의 땅에서
"인간적인 일을 했다."
하는, 기림을 이 말은 담고 있다. 가령, 그곳이 저 경기도 연천군의 북쪽에 있는 삭녕이라 할 때, 덕망 있고 훌륭하신 성씨의 맨 처음 어른이 여기
"삭녕에서 인간을 이루었다."
하는 것이 곧 '본'이다. 그러니, 단순히 시조의 탄생지를 기념하거나 다른 성씨와 구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한 성씨의 시조가 되실만큼 어질고 크신 어른의 덕행과 학문, 정신을 훼손 없이 이어받자는 각오로 관향, 본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본을 굳이 제 이름 성씨 앞에 밝히는 뜻은
"삭녕에서 그분이 사시던 모습을 그대로 이 몸에 이루리이다."
하는 결심과 다짐이요, 자신이 그분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표시다.
"이 세상에 근본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혹자는 훗날에 오다가 잃거나 잊어 버릴 뿐. 허나, 근본을 모르고서야 뿌리 없는 줄기가 어떻게 창창히 뻗어 나가며 가지는 또 어떻게 우거질 것인가. 하물며 열매야. 내가 오늘 우리 성씨의 수수만만 잎사귀 중에 한 이파리로서, 내 조상의 맥을 짚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나아가 곧 겨레의 맥을 짚는 일과 꼭 같은 것이다. 그 둘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바로 한 몸의 조직, 이 손과 저 손의 엽맥인 것이다. 그 맥들이 모여 우리 민족의 역사 세포와 모세 혈관, 힘줄, 근육, 그리고 뼈와 살을 이루느니. 우리는 자기 자신 하나하나에 대하여 진정한 존재 자각을 지엄하게 가져야만 한다. 제군들이여. 우리는 외톨이가 아니다. 또한 외톨이여서도 안된다. 기댈 데 없고 매인 데 없는 외돌토리는 생명의 유기체 속에서 그만 피돌기가 막히고 끊어져 겉돌아 버린다. 나만 그렇게 끊어지고 마는가. 내가 끊어지면서 불행히 남의 것도 끊어 놓는다.
그 외톨들로 가득 찬 강토는 단 한 톨의 씨앗도 품을 수 없고, 실뿌리 하나 뻗을 수 없는 박토, 각동배기로 떠글거리는 삭막한 돌짝 자갈밭에 불과할 터인 즉. 비옥한 미래를 어이 꿈꾸랴.
내 조상을 잊지 않는 것이 나를 잇는 길이다.
우리는 조상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 훗날, 어느 누군가의 조상이 될 때, 자손에게 어떤 존재로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우선 이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군들, 각자의 관향이나 고향, 혹은 시방 살고 있는 주거지의 내력과 설화를 조사해 보도록 하라. 마을의 유래, 유적을 찾아보라.
조상의 땅에까지 갈 수 없는 사람은 멀리 갈 것 없이 자기 동네 우물가 버드나무는 누가 언제 심었는지, 저절로 났는지, 지금 이 동네 이름은 왜 그렇게 지었으며 언제부터 불리기 시작했는지, 또 이곳에 예전에는 무엇을 하던 어떤 곳이었는지, 맨 처음 이 동네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그는 어느
곳에 터를 잡았는지, 그가 살던 그 집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섬세한 지도를 그려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 놓아라. 실없이 보이는 이 면밀한 그림이 바로 당대의 기록이요, 후대한테는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대들의 성씨 관향에 가 보기 바란다. 그곳이 그대들이 성지이다. 그 성지를 순례해 보면, 오늘보다 더 구체적이면서 절실한 이야기가 얼마든지 생생하게, 질기게, 거룩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웅혼하고 지혜로운 지형의 기맥과 울분의 용틀임, 들꽃 같은 어여쁨, 아쉬워 고개 숙인 인생의 애잔함, 그리고 끝없는 좌절과 소망의 회오리 숨결들이 점점 이 고을 고을 새겨진 골목길들을 결코 놓치지 마라. 붙잡으라. 그 이야기와 삶의 흔적들을 지금 우리가 놓치면, 이제는 아무도 못 찾는다. 끝내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국토와 마을과 집안마다 흘러내리는 이 숨결과 이야기를, 갈피마다 주워 담아 품고 길러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태로운 외나무 다리다. 보라, 이제 세상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부서지리라. 우리는 이미 나라마저 잃지 않았느냐. 물려주신 조상의 강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 짓밟힌 채 오늘날 나라는 없어져 뜻밖에도 식민지의 백성이 되어 버린 우리.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군들은 제군의 자손들에게, 식민지의 조상으로서 이 더럽고 서러운 식민지를 또 다시 물려줄 것인가. 원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그리하여 영원히
못난 굴욕의 조상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심진학 선생은 그때, 목이 꺾인 채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학생들도 따라서 묵연히 고개를 떨어뜨리었지.
"제군들이여, 그대들은 조상의 간절한 염원이 어리고 어려서 그 정혈로 생긴 사람들이다. 좋은 자식을 낳고 싶은 제군의 부모 양위께서 합심하여 정성으로 합일하시고, 그 부모 두 분을 낳으신, 그대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대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 조부모와 외조부모님, 네 분의 염원
이 제군의 부와 모를 낳으시고, 그 부와 모께서는 또 제군을 낳으셨는데. 제군 하나의 몸에 벌써 숨소리 닿는 조상 여섯 분이 직접 작용하시거늘, 증조와 고조, 또 그보다 더 윗대조로 아득히 더듬어 올라가자면 그 수를 다 어이 헤아리리. 이 모든 조상의 지극한 염원으로 자식들을 태어났고, 이제 드디어 제군이 세상 에 났다. 자, 제군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기의 머리터럭과 얼굴, 가슴, 그리고 손이며 손톱들을 한번 스스로 만져 보라."
아이들은 웃지 않았다. 다소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킥 소리를 터뜨린 놈도 있었지만, 힐끔 옆의 친구를 곁눈질하며 어쩐지 떨리는 손으로 쑥스럽게 까끌까끌한 머리통을 어루만지거
나 가슴을 쓸어 보는 표정들은 자못 진지했었다.
"제군들은 이윽고 그대 자손들의 조상이 될 것이다."
이 몸이, 지금은 다만 남의 자손 된 몸에 머무르고 있지만, 미구에는 남의 조상이 될 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라.
나는 청송으로 가리라.
"가서, 우리 시조 할아버지 기식하시던 자취를 찾아가 흠숭하고,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께서 어이한 연고로 언제 청송을 떠나, 어느 길을 따라서 지금의 이곳 전주에 입향하시었는지, 꼭 그 어른 오신 그대로 발자국 밟으며 따라 걸어와 보려 한다."
아름다우리. 오는 길에는 새도 울겠지. 그 옛날 고개 마루 언덕을 넘을 때 잠시 앉아 쉬시던 너럭바우며 붉은 비늘소나무 둥치, 그리고 고불고불 황톳길, 길섶에 강아지풀 석양을 받고도 있었을 것인데,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은 세월보다 멀리 누워 아득하였으리라. 그 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을지. 아니면 속절없이 무너졌을지. 하다못해 토막진 한 뼘 길 촌단이라도, 가시덤불 쑥굴헝 그 어디 남아 있기만 하다면 나는 가서 내 가슴에 끌어안아 주고 싶다. 그리고, 그 옛골 그리운 관향에는 아직 누가 어떻게 남아 있으며, 다른 혈족붙
이들은 또 어디로 나뉘어 떠나갔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이삭을 줍듯이 한 톨 한 톨 주워 알아보려 한다.
"제군들이여, 그대들의 본은 어디인가."
심부재하면, 시이불견이요, 청이불문이라.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것이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려 해야 비로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느니.
"이 세상에 사람이 몇 억 년이나 살았는지 몰라도, 귀와 눈구녁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로 듣고 바로 본 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개가 삼밭 지나듯이 핵심 속으로는 못 들어가고 바깥에서만 빙빙 돌다 마는 경우 허다하리라."
우선 조선, 비록 국호는 없어졌다 하나, 나라는 여전히 백성을 품고 있으니, 우리가 제 핏줄과 성씨를 확실히 간수 건사하고 있노라면, 성씨들이 켜켜이 성을 지어 지키는 나라를 누가 감히 파고들어 오겠는가. 정치적으로는 멸망했을는지 모르나, 결코 귀화 승복하지 않은 성통과 정신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등걸 죽
은 자리에 또 새순 날것인데. 이 나라 조선의 성씨를 가진 사람 중에서 반상과 빈부를 막론하고, 본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군들이여. 부디 그 땅으로 찾아가 보라. 그것이 바로 나를 찾는 첫걸음이다. 대저 우리가 나라를 어디 가서 찾을 것이냐. 정객은 정치를 통해서 찾으려 할 것이요, 군인은 싸움을 통해서 찾으려 할 것이다. 정객도 군인도 아닌 일개 학생이나 시민 백성은, 공염불 같은 구호로만 나라를 찾자고 부르짖을 뿐, 아무런 대책도 방법도 없지 않은가.
나는 생각한다.
나를 찾는 길이 곧 나라를 찾는 길이라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조국을 알 것 아니냐.
모국이라는 말에는 어미가 들어가고, 조국이라는 말에는 할아비가 들어가는 속뜻을 곰곰히 짚어 보기 바란다. 자신의 성씨 시조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본관은, 달리 관향 혹은 향관, 성관이라고도 한다. 물론 우리가 단군조선 개국 이래 본관을 써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는 풀과 나무 같은 우리말 본디의 생래적 이름이 저마다 있었을 것이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한반도와 중국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적극적으로 한화를 꾀하였던 신라 정책을 따라 중국 성과 본관의 제도는 유입, 수용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정착된 시기는 대개 신라 말엽부터 고려 초기로
본다.
박, 석, 김 신라의 3성에, 이, 최, 정, 손, 배, 설을 비롯한 진골 육두품 계층이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비로소 확실한 성을 가진 것이 이때였다.
"그러다가 고려에 들어서는 지배 계층에 널리 성이 보급되면서 본관 제도 역시 함께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전국의 군과 현이 명칭을 바꾸고 각읍 토성을 나누어 정리한 다음, 유이민들을 정착시켜 살도록 했다.
그러면서 신라의 유물인 폐쇄적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신 왕조를 이끌어 나갈 기틀로서 새로운 지배, 지도 계급으로 지방의 호족을 기용하며, 그 성씨가 살고 있는 지역을 밝혀 매기는 본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백성을 지역별로는 군현제로, 계층별로는 호적제도로 편성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분이 질서를 유지하고, 이 질서를 통하여 중앙 집권의 손이 미처 닿을 수 없는 지방을 통치하면서, 징세와 조역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바탕은 기본적으로 동서고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혈연과 지연이였다. 이 중에 성은 부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징표로서, 한 조상의 줄기와 가지 아래
끊임없이 지며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면, 본관은 조상이 어느 한 때 그곳에 머물러 몸소 거주하며 살았던 땅 지역을 가리키는 바 '공간'의 의미가 더 크다.
"따라서 성이 같고 본관도 같으면 거의 본능처럼 부계 친족 혈속의 친근감을 남달리 밀접하게 느끼는 것이다."
허나, 만일에 성과 본관 중 어느 한 가지가 다르다면 이는 이미 혈연은 아니어서 서로의 대인 상관에 판이한 차이가 생긴다. 이 성과 본과의 관계를 좀더 살피어 본다면, 성도 본도 같은 동성동본, 성은 같으나 본이 다른 동성이본, 성도 다르고 본도 다른 이성이본이 있다.
본래 성씨와 본관은 아무나 쓸 수 없었으므로, 그 시대 사회 속에서 계급적인 우월성과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제도는 왕실에서 귀족과 일반 지배 계급으로 파급, 확산되었으며, 나아가서는 드디어 양민, 천민에 닿기까지 두루 씀에 이르렀다.
"맨 처음 성을 쓰기 시작할 때, 스스로 정하여 쓰는 자칭성도 있고, 나라에서 내려 준 사성도 있다. 본관도 마찬가지다."
이 가운데 나라에서 붙여 준 본관은, 그 본관을 받게 된 연유와 성격, 또 그것을 쓰는 사람의 신분과 직역에 따라 서로 격차가 있었다. 의미 또한 현격하게 달랐다. 여기서도 신분의 차이는 확연하였다. 말하자면 본관의 고을 읍격이 높은 성씨나 이미 명문이 된 가문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하였고, 외딴섬이나 향, 소, 부곡 또는 역과 진을 본관으로 한 계층은, 어떻게 하든지 기회만 있으면 이 미천한 본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처럼 신분과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했던 본관도 고려 후기를 지나 조선에 이르면서,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일대 변혁을 겪게 되는지라. 신분 구조가 엄청나게 뒤바뀌어 기왕의 본관은 획기적으로 개편, 변질되었다. 이에 속현의 승격과 소속의 이동, 군과 현의 구획 폐합 등으로 촌과 향이 새로이 정리되니, 이를 따라 신분 이동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관향을 제정하던 당초에는 성의 본관과 거주지가 서로 일치하였지만, 후대로 올수록 차츰 달라져서 고려나 조선 시대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간 귀족과 관료층은, 대체로 이 둘이 서로 같지 않았다. 이는 지방의 토성이 상경하여 벼슬에 임하기도 하고, 서울의 관료가 낙향하기
도 하며, 조정에서 백성을 이주시키기도 하여, 유이민들이 생겨나기도 하는 탓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이미 뿌리와 얼개가 그물코처럼 촘촘히 얽히어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는 성을 바꾸려고 하는 일은 극히 적은 반면에, 본관을 변경하는 경우는 매우 많아졌으니. 이는 관향이라도 바꾸어 신분 상승을 꾀해 보고자 하는 편법이었다. 그만큼 조선은 성씨를 중심으로 엄격히 이루어진 사회였다.
세종실록에 보면 벌써 이때 우리나라의 성씨 수는 약 이백오십 개, 본관의 수는 일천오백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양반 지배 체제가 존속하는 동안, 성과 본관을 감히 가지지 못한 천인들고 있었으나, 한말에 근대적인 호적 제도가 시행된 뒤부터는, 조선 사람이면 누구라도 성과 함께 본관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씨와 본관의 우열에 대한 관념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본디 성씨와 더불어 본관 제도는 계급적은 우월성과 신분의 상징으로 대두되었던 만큼, 그것에 입각한 신분 관념은 오랜 세월 음으로 양으로 층층이 뿌리를
내려, 좀체 쉽게 떨치거나 바꾸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므로 본관은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어떤 성원들의 혈통 계열을 표시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의 높고 낮은 구분을 좇아, 그에 속한 성씨들의 등급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를 더듬어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였겠지만, 성과 본관의 등급은 동성동본의 성원들을 내적으로 결속시키고 범주화하여, 그들이 가진 지체를 굳게 유지해 나가게 했다. 그런즉, 같은 등급의 성씨와 본관을 가진 성원들은 자기들 무리끼리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고, 그 계층의 벽은 우열이 견고해서 감히 타파하거나 넘나들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혼사를 할 때면 이 벽은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토록 오랜 우리의 성씨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무도하게도 깡그리 부수고 근거를 말살하여, 창씨 개명하라한다. 저희들 일본식으로 바꾸라 한다. 안 바꾸면 죽이겠다 하니, 목숨이 더러워 어쩔 수 없고, 후손을 보존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시국을 원망하며 창씨하는
경우, 자신의 본관을 성씨로 세우는 사람도 많다. 그나마 참혹한 마음 한 자락을 눈물로 비빌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군들이여.
사람의 한평생에 길떠날 일이 많다 하나, 일본으로, 중국으로, 아라사로, 미리 견으로, 구라파로, 드넓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활약하고 다닐지라도, 한 점내 존재의 씨앗이 비롯되었던 본관 근원지에 못 가보고 만다 하면, 이 아니 허퉁한 일이겠는가. 씨앗 없는 과일 같은 것이리라.
자두, 사과, 복숭아, 수박, 그 맛난 과육을 사람이 다 먹어 치운다 해도, 씨앗을 먹히지 않는 한 그것들은 다시금 온전히 나무와 넝쿨로 살아나 번창할 것이다. 잃은 것은 살, 잠시일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씨앗 속으로 돌아가 보라."
고 심진학 선생은 말했었다.
"부디 그 땅으로."
라고도.
강모는 전주 이씨 관향을 찾는 대신 지금 그 땅과 고향을 버리고 타향 만리, 객창 천리, 아득한 만주 삭방, 아는 이 하나 없는 남의 나라 남의 땅으로 실려 감에 만감이 착잡하다.
8 거멍굴 근심바우
서산 노적봉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벋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을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