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월30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네팔 폭우로 산사태 발생 170명 사망 42명 실종
네팔에 최악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최소 170명이 사망하고 42명이 실종 되었다 지난 27일부터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하루 최대 322.2㎜의 폭우가 쏟아져 카트만두의 대부분 지역이 물에 잠겼다. 카트만두를 가로지르는 바그마티강과 많은 지류가 넘치고 둑이 무너지면서 일부 주택이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서 에너지 시설도 파손됐다. 네팔 당국은 수력 발전소 11곳이 손상돼 네팔에서 운영 중인 발전소 총용량의 약 3분의 1이 가동을 중단했다
2022년 학군단 출신 최초 합참의장 김진호 대장 별세(81세)
2021년 중국이 보하이(渤海)에서 1억톤 넘는 석유·가스전을 발견 2025년부터 채굴
2020년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신곡 ‘다이너마이트’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순위 차트 빌보드에서 ‘싱글 핫100’ 1위에 올랐다
2016년 국방부 사드배치 부지로 경북 성주 성주골프장 최종 결정
2009년 영산재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49재 의식의 하나인 영산재는 사망 후 49일 동안 중음계를 떠도는 영가를 천도하는 행사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김장 등 20개 종목 등재되어 있다
2008년 인도 라자스탄사원 압사사고 사망 최소 224명
2001년 일본 다카하시,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일본의 다카하시 나오코 (高橋尙子·29)가 2001년 9월 3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28회 베를린마라톤대회 여자부에서 2시간19분46초를 기록, 2년 전 이 대회에서 테글라 로루페(케냐)가 작성했던 세계최고기록(2시간20분43초)을 57초 단축하며 우승했다.
다카하시는 출발부터 결승선까지 스피드를 잃지 않았다. 레이스 중반인 20~25km, 25~30km 구간 기록(16분17초)이 초반의 매 5km 구간기록(16분40~46초)보다도 빨랐다. 다카하시가 최초로 마(魔)의 2시간20분 내의 기록을 세운 것은 2시간30분 벽이 무너진 1979년 뉴욕마라톤(그레테 와이츠·2시간27분33초) 이후 22년 만이었다.
1972년 5월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난 다카하시는 1m63㎝의 키에 47㎏의 체중으로 마라토너로서는 최상의 신체조건을 갖췄다. 열세살 때 육상을 시작해 오사카학원 대학 재학 때까지 5000m, 1만m에 주력했지만 성적은 별 볼일 없었다. 다카하시는 1995년 대학졸업 후 고이데 감독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한 끝에 리쿠르트팀에 입단했다. 다카하시가 마라톤에 데뷔한 것은 감독을 따라 세키스이화학으로 팀을 옮긴 직후인 1997년이었다. 1997년 1월 오사카마라톤에서 2시간31분32초로 7위를 한 게 그의 데뷔기록이었다.
2001년 티우 전(前) 베트남 대통령 사망
공산화 전 베트남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응웬 반 티우(Nguyen Van Thieu)가 2001년 9월 30일 밤 망명지인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78세로 사망했다.
베트남 남부의 닝투안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티우 전 대통령은 2차대전 후 민족공산주의의 시초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에서 활동하며 프랑스에 대항하다 전향, 베트남 군사령관이 됐다.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 딘 디엠 정권을 전복하고 1967년 대통령이 됐으며 1971년 부정 선거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선됐다. 1975년 공산 베트남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을 때 티우는 북쪽 영토 반을 포기했으며 평화협상을 위해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다가 결국 월맹군이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자 그 해 4월 21일 월남을 임시정부에 넘기고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 보스턴으로 도망갔다
2000년 박찬호 데뷔 첫 완봉승. 18승으로 시즌 마감
박찬호(LA 다저스)가 데뷔 첫 완봉승으로 2000시즌 마지막 등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박찬호는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퀼컴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프로야구 샌드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9이닝 동안 내야안타 포함, 2안타 무실점으로 팀의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시즌 18승(10패). 완봉승은 1994년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185경기 만이었다.
8회에 시즌 2호 홈런으로 승리를 자축한 박찬호는 삼진 13개를 추가, 시즌 217개로 메이저리그 3위(내셔널리그 2위)가 됐다. 방어율로 3.27로 끌어내렸다. 박찬호의 호투에 파드리스는 2루를 밟아 보지도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3회 볼넷 등 단 3명이 1루에 진출한 것이 전부였다. 투구수 조절도 잘해 9회 완투를 하고도 116개밖에 되지 않았다.
2000년 .kr 도메인 50만개 돌파
2000년 9월 30일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50만개를 돌파했으며 IP 보유수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 중에서 최대규모인 1381만 176개인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는 .kr 도메인 등록건수가 2000년 7월말 49만 4074개에서 8월말 49만 3691개로 줄어들었다가 9월말에는 50만 1534개로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이중 co.kr은 43만 8892개로 전월대비 7931개 늘어난 반면, 개인도메인인 .pe.kr은 8월부터 계속 감소해 3만 2084개로 나타났다. IP 보유수는 8월말 1158만 1952개였으나, 9월말 현재 1381만 176개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아태지역에 배정된 주소규모 중에서 최대이며, 지난 10년동안 확보한 주소에 상응하는 규모로 전년대비 3배에 해당한다.
전용선 가입기관수는 8월 말 6만 8365개 기관에서 6만 9794개 기관으로 증가했으며, xDSL 가입자수는 143만 9674명, 케이블TV를 통한 인터넷서비스 가입자수는 70만 3798명으로 전달에 비해 모두 증가했다.
1999년 일본 도카이무라 핵연료공장 사고
1999년 독일의 귄터 그라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스웨덴 한림원이 1999년 9월 30일 오후1시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72)를 199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한림원은 수상 이유로 "그라스가 `양철북`을 통해 인간들이 떨쳐버리고 싶었던 거짓말, 피해자와 패자 같은 잊혀진 역사의 얼굴을 장난스러운 블랙 동화로 잘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독일 문단의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그라스는 인간적이고 보다 독일적인 문학작품으로 전 세계에 고르게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귄터 그라스는 문학을 뛰어넘어 현실 세계에서도 목소리를 적극 높이는 행동파 지식인의 대표주자이다.
폴란드계 독일인인 그는 발트해 연안 부두 단치히 근교 랑푸우르 태생으로, 아버지는 식료품 가게 주인이고 어머니는 빈농 출신이었다. 나치즘과 2차대전으로 얼룩진 유년시절을 보낸 그라스는 한때 미군 포로로 수감됐다 전후 갱부, 석공의 조수로 노동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어 뒤셀도르프 예술대학과 베를린의 조형 예술대학에서 각각 판화와 조각을 공부하기도 했다.
1959년 `양철북`에서 1999년 `나의 세기`에 이르는 40년 간 문학세계 외에도 베트남전 반대, 사회민주당 지지운동, 독일 통일 비판 등 그의 행적 역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또 전후처리, 과거 범죄 인식 부족 등을 지적하는 등 `독일인이면서 독일인을 비판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1999년 미국 AP통신 `노근리 학살사건` 첫 보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충북 영동에서 피란길에 오른 양민 수백명을 비행기 기총 소사 등으로 살해한 `노근리 학살사건`이 비밀해제된 미군 공군보고서와 참전 미군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AP통신은 이같은 사실을 담은 `노근리의 다리`라는 장문의 기사를 1999년 9월 30일 보도했다. AP통신은 "1950년 7월26일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위에서 피란중이던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들을 전투기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며 "피란민들이 철로밑으로 피신하자 제1기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뒤쫒아가 계속 사살했다."고 말했다.
이 통신은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고 전했다. 이 통신은 또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500여명이 사살된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사건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것"이라고 밝혔다.
`노근리사건`을 보도한 AP통신 한국 특파원 최상훈씨와 AP통신 본사 기자 3명은 2000년 퓰리처상 추적보도 부문을 공동 수상했다. 이 사건은 2001년 1월11일 클린턴 대통령이 양민살상 사실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한편 노근리 대책위원회는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미군의 의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건을 학살사건으로 규정하지 않은 데 대해 이 성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8년 제9호 태풍 `얘니` 전국 강타
1993년 인도 남서부 마하라수트라주에 진도 6.4 지진, 50년 만에 최악의 피해 사망 35,000여명 이재민 12만명
1992년 미국, 수빅만 해군기지를 필리핀에 공식 반환
1991년 아이티 쿠데타 장베르트란드 이리스티스 대통령 체포됨
1990년 한국-라트비아, 국교 수립
1990년 한국과 소련, 85년 만에 수교
한·소 양국이 1990년 9월 30일 낮 12시 유엔본부에서 역사적인 한소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이날 유엔본부내 안보리 의장실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공동 코뮈니케 서명식을 가졌으며,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과 소련은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제정 러시아간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85년 만에 다시 수교하게 됐으며, 이는 앞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 재편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됐다.
공동 코뮈니케는 정치적 결단의 성격이 강할 때 택해온 수교합의 방식이라고 양측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두 나라 외무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수교문제와 함께,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교환방문 문제도 협의, 상호 편리한 시기에 방문을 실현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이날의 한·소 수교는 그야말로 역사에 한 굵은 획을 그은 신기원적 결사였다. 흔히들 단절 85년 만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쓰러지는 대한제국과 혁명 전야의 제정러시아와의 관계였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과의 수교는 사상 처음이있고, 그만큼 의의도 컸다.
1990년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 사망
1988년 김수녕 서울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 우승
1987년 전화 1000만회선 돌파
1985년 미국의 물리학자, 지진학자 리히터 사망
기호 M으로 표기되는 ‘리히터 진도(Magnitude)’의 창시자이자 지진학자 찰스 프랜시스 리히터가 85세의 나이로 1985년 9월 30일 사망했다.
리히터는 미국 오하이오주 해밀턴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이론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캘리포니아대학 지진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해, 교수로 재임했다.
리히터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기 위한 척도인 매그니튜드의 정의를 내렸고, 베노 구텐베르크와 함께 지진에너지를 연구하며 ‘리히터 지진계’를 개발했다. 35세 때인 1935년이었다. 1975년에는 제2회 미국지진학회상을 받기도 했다.
리히터 지진계는 캘리포니아의 한 지방에서 지진의 규모를 측정하기 위해 개발한 것으로 지진 기록의 최대 진폭과 진원으로부터의 거리를 계산한 지진계이다. 가장 약한 지진은 0에 가까운 값으로 표시되고 척도가 1단계 올라갈 때마다 지진의 규모가 10배 증가한 값이 된다. 또, 이 지진계는 지표에서 진동이 자동으로 기록되도록 했다
1985년 고리원자력발전 3호기 상업운전
1982년 미국-일본 국방장관 회담
1982년 서울신탁은행 민영화
1981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서울을 88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
“쎄울 코리아!” 1981년 9월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목소리가 독일 바덴바덴의 IOC 총회장에 울려퍼졌다. 서울이 52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27표를 얻은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 유치단은 만세를 불렀고 전 세계 체육인들은 이 극적인 반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가로서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이 됐고 아시아에서는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 올림픽 개최국의 영예를 안았다.
1979년 9월에 결정됐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타계로 무산될 뻔한 올림픽 유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난 것은 2년 뒤였다. 개최지 결정을 정확히 1개월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지시한 것이다. 설사 이 지시가 5공 군사정권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이라 해도 우리 민족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다.
9월20일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을 때 현지 분위기는 이미 나고야로 기울어 있었다. 북한의 방해도 성가셨지만 1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이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최대약점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미 한반도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날까지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1981년 대만, 중국의 대화제의 거부
1978년 김성준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6년 한국-브라질 통상협정 체결
1970년 해운대 간첩사건
1966년 베추아날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보츠와나로 국명 변경
1966년 광화문 지하도 개통
1965년 인도네시아 9.30사건 발생(수하르토 정권 장악 )
신생독립국가들의 반식민, 반제국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9월 30일과 10월 1일 밤사이에 혁명-반혁명-반반혁명의 연쇄혁명이 일어났다.
첫 혁명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반미, 친중국경향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육군의 `장성평의회`가 지도한 것이었다. 이것을 30일 예방혁명으로 분쇄한 수카르노 경호대장 운통 중령은 그들이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운통 중령은 예방혁명에 성공하자 즉시 4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급진적으로 공산당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혁명위의 구성은 반공 민족주의적 세력의 중추였던 나수티온 국방상이하의 육군지도자들을 거의 완전히 제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일 저녁 7시 나수티온 국방상과 투하르토 육군준장이 이끄는 육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일으켜 약 한시간의 충돌 끝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와같은 사태는 수카르노 정권의 군부, 종교세력, 공산당이 내정에 있어 격심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부안에서도 대체로 혁명적인 공군, 보수적인 육군, 중립적 해군의 격심한 반목과 집권투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963년 이준 열사 유해 네덜란드서 56년 만에 환국
1963년 알제리아군 일부 반란 (벤 벨라 대통령정부 명령에 반대 모한트 우 엘 하즈대령 등)
1962년 미국 대학에서 흑백인 공학분규로 학생들 폭동
1961년 시리아 독립선포
1961년 군사재판, 4.19의거 당시 발포관련자 곽영주에 사형선고
196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식 발족
재정금융상의 안정유지 및 고도의 경제성장-고용증대-생활향상,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의 건전한 경제발전 지원, 세제통상의 다각적-무차별적 확대 등을 협약의 목적으로 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961년 9월30일 정식 발족했다.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의 약자인 OECD는 선진국이 국제경제 전반에 관해 협의하기 위한 기관으로 그 목적은 고수준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며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원조하고 세계무역의 확대에 공헌한다는 것 등이었다. 2차대전후 유럽의 부흥경제협력을 추진해온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개편해 개발도상국 원조문제 등 새로 발생한 경제정세변화에 적응시키기위해 1960년 12월에 OECD 조약이 서명되어 이날 발족됐다.
하부기관으로 각종 위원회가 있는데 그중 OECD의 3대 목적에 대응한 경제정책위원회, 개발원조위원회, 무역위원회의 3개 주요위원회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 12월 12일 OECD에 가입, 29번째 정회원국이 됐다.
1961년 시리아, 쿠즈바리 전(前)국회의장을 수상으로 신내각 구성
1959년 흐루시초프 중국방문. 중국-소련 대립 격화
1958년 소련, 핵실험 재개
1957년 인천 판유리공장 준공식
1955년 제임스 딘 사망
첫 영화 ‘에덴의 동쪽’(1955)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나 1년도 채 피지 못하고 갑작스레 팬들의 곁을 떠나야 했던 제임스 딘. 1955년 9월 30일, 그가 죽었다. 애차(愛車) 포르셰 스파이더를 몰고 캘리포니아 교외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망자(亡者)는 말이 없지만 평소 연기를 천직으로 알고 스피드를 즐겨왔던 그였기에 3번째 영화 ‘자이언트’ 촬영을 모두 끝내고 자동차 핸들을 잡은 상태에서 맞은 죽음은 어쩌면 현실과 화합하지 못했던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남성상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엄격한 아버지상에 첫 반기를 든 그의 등장에 허무와 저항과 냉소에 빠진 젊은이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가 영화에서 선보인 모습들은-때로는 유약한 모습으로 모성본능을 자극하고 또 때로는 우수어린 눈빛으로 기성사회를 응시하는 아웃사이더 역-사실 그의 실제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9세 때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숙모집을 전전해야 했던 유년기의 기억이 그를 자꾸 외진 곳으로 몰아간데다 그 역시 세상살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1950년 유엔총회, UNCURK(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설치안 가결
1950년 네루 인도총리 유엔군의 38선 돌파 북상을 반대
1949년 태국,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9년 중국공산당, 주석에 모택동 수상에 주은래 선출
1948년 한글전용법 국회가결
1946년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시자 라엘 태어남
1938년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뮌헨협정 체결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자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안전보장을 호소했다.
9월 15일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향후 1주일간 무력 침공을 자제하겠다는 언질만 받아냈다.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체임벌린은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와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체코를 독일에 넘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소리만 했을 뿐 영·불의 합의를 따라야 했다. 힘 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2일의 두 번째 회동에서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즉시’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체코와 영·불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함대까지 동원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최후 통첩을 보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영·불은 꼬리를 내리며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29일 당사국인 체코를 제외시킨 채 뮌헨에 모인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는 밤샘 협상 끝에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영국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함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1932년 충남도청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김
1932년 대일(對日)전선통일동맹 조직
1929년 영국 BBC방송, 첫 텔레비전 실험방송
1927년 베이브 루스, 60홈런 기록
1925년 서독, 동독과 경제 단교
1925년 그리스, 공화국헌법 공포
1914년 『서유견문』 쓴 유길준 세상 떠남
1910년 일제, 토지조사사업 착수.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관제 공포
1908년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출생
1906년 영국의 소설가 스튜어트 출생
1859년 황성신문 주필·상해임시정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출생
1849년 폴란드의 역사가 보브진스키 출생
1751년 영국 극작가 셰리단(1751-1816) 태어남
1472년 왕양명 출생
1227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