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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하리라
눅 9:51-56 /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오래전부터 불화와 반목의 관계에 있었다. 왜 사마리아와 유대인들 사이가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되었는지는 열왕기하 17장에 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후에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이방인들이 사마리아에 살게 되면서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주해 온 이방인들 사이에 결혼하게 되고, 그러면서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혼혈인들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피가 섞인 백성이 되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싫어했고, 심지어 멸시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래서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대 지방으로 오거나 반대로 남쪽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려면 가운데 위치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면 가깝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해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 가지 않았다. 멀리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서 왕래했다. 그 땅에 들어가는 것도 싫고,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의 땅으로 들어가셨고, 사마리아인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까이하셨고, 사마리아 고을에 들어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온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마을에 들어와 머물기를 요청받으셨다. 다른 유대인들 같으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길을 가다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게 상각하던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어가서 먹고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걸린 사마리아 사람을 고쳐 주시기도 했다. 요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예수님은 친(親) 사마리아 사고를 가지셨고, 실제로 친(親)사마리아의 삶을 사셨다. 그랬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평소 같았으면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다는 것 때문에 영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을까?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정황으로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예수님이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하러 왔노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라고 물었을 것이다.
▶ 그때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라고 말했을까? 단언컨대 제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본문 바로 앞인 9:22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것을 마음에 새긴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 예루살렘에 가까이 갔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십자가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큰 영광을 얻기 위해 가시는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고 묻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했을지는 자명해진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임당하시기 위해 올라가신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한 것이다. 저들은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분명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러셨다.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부정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셨다. 자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고, 자기들을 품어주셨던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 제자들의 말대로 - 영광과 권세를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세속적인 욕망과 권력을 탐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영접하지 않겠다.’라고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다.
▶ 참고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언어와 행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너희는 세상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너희는 아무 데도 쓸모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마 5:13)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자신이 맛을 잃은 소금이 된 것은 아닌지 말이다.
뒤이어 나오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검증할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야보고와 요한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사마리아 마을을 멸해버리면 좋겠다.’라고 말을 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망각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이유로 영접하지 않는 그 배은망덕한 놈들을 당장이라도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오히려 책망하셨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이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라는 말로 끝나지 않았다.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러 왔지,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이어 나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들에게도 하늘의 복음과 생명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을 버릴 수는 없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멸해야 한다면 십자가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이 먼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렇거니와 제자들 또한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정보로 인해 누군가를 오해할 수 있다. 바른 이해와 판단력을 갖추지 못해서 누군가를 오해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이나 똑같다. 누가 누구에게 화낼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저런 못된 놈들’이라고 화를 냈다. 자기들이 잘못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해를 했는데도, 자기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화를 냈다.
우리도 종종 그렇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낸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누구로 인해 분노가 일어났는가’라고 말이다. 분노의 원인을 나 자신이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내가 한 잘못이나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질책하려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그렇다.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다. 살다 보면 화낼 일이 없겠는가? 그럴지라도 조금만 참아보면 화낼 일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부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상담을 통해 자초지종을 다 듣은 의사는 이 부부에게 처방을 내려주었다.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주면서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드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3분 동안 입안에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러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부부는 의사 말대로 화가 나면 물약을 입에 넣고는 3분을 기다린 후에 삼켰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얼마 후에 약이 다 떨어지자 부부가 다시 의사를 찾아가서 약을 더 조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부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물에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머금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가라앉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3분만 참아보자. 그러면 화가 가라앉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1분만 참으면 분노를 이길 수 있다.
▶ 본문에서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가? 예수님을 위해서 분노했는가? 아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분노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화를 낸 것도 아니다. 제자들이 화낼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자기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고, 자기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더 생각해 보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것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다. 그들이 오해를 하든 아니든,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다.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셔야 하는 메시아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자기들의 생각과 너무 다르다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만다.
우리도 종종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내 생각으로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자주 분노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 버린다. 여기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각이 뒤틀려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내 기준의 잣대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분노만 일어날 뿐이다. 잘못 판단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받아들지 않겠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셨다. 그저 조용히 다른 마을로 가셨다.
예수님인들 왜 화가 나지 않으시겠는가?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화를 내실 수도 있다. 당장이라도 그 마을로 들어가서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화가 나는 상황을 피해 가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게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1.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인내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들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로 가셨다. 본서를 기록하는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꾸짖었는지 내용을 생략하였다. 고대의 사본에는 이런 말씀이 55절에 이어 삽입되어 있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라는 말이 들어있다. 다만 참고할 뿐이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잘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불벼락 요청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삼년이나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정신이 있었다. 저쪽에서 돌을 던진다고 이쪽에서도 돌을 던지면 돌 던지는 저 사람들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희생과 섬김으로 사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회를 향하여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제자들이 보복하고 더 저주를 퍼붓겠다고 할 때 예수님은 다만 제자들의 하는 말을 꾸짖으셨다. 어떠한 비난이나 고난이라고 달게 감수하면서 다른 마을로 향하셨다.
우리는 사랑으로, 섬김으로, 기다리고 용납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욕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잘 믿지 못하였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당신들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해주셨는가?’ 하며 감사도 해야 한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권한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해달라고 하는 것도 월권이요,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심지어 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를 반대하는 저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힘쓰자. 언젠가는 ‘예수 믿는 이들이 달라도 정말 다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 분노를 성경적 방법으로 조절하는 법
분노를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이 따르는 유일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그러나 분노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특히 심하게 잘못한 일이 생기거나 무언가 끔찍한 혼란이 일어났을 때는 더욱 어렵다. 성경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보자.
잘못되었거나 불쾌한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대해 화가 난다. 때때로, 일어난 일이 고통스럽거나 약간의 손실이나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할 때 그렇다. 우리는 언어적 또는 육체적인 싸움에 들어간다.
화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표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잠 29:11 / 어리석은 자는 벌컥벌컥 화도 잘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속으로 그 화를 삭인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에 용서를 갖지 않으면 몇 년 전에 우리에게 행해진 나쁜 일의 기억조차도 여전히 분노로 폭발할 수 있다. 우리를 불쾌하게 한 사람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분노를 불어 넣고 우리의 피가 머리끝까지 몰려들게 한다.
엡 4:26-27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3.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시 109:1-10)
요즘 어디를 가나 화가 나서 힘들다고 말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망가트리는지 우리는 그 해악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분노라는 감정을 조절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출애굽부터 40년 광야 생활하는 내내 백성들의 온갖 불평과 불만을 잘 참고 견디던 하나님의 사람도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랴?’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두 번이나 내려치며 분노하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로 분노하지만 분노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분노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잘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1. 분노의 감정이 생겼을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윗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분노의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성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해치게 된다..
2. 분노하되 마귀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분노하되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하며, 그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우리는 분노의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나를 분노하게 한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직접 분을 표출하여 나의 마음도 상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심히 상하게 했다면 이것은 분명히 마귀에게 틈을 내주는 죄를 짓는 것이다. 분을 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이것이 바로 분노가 생기고 죄가 되는 것이다.
4. 내 성질 극복하기
우리의 나쁜 성질을 극복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노를 조절하지 않으면 습관적 분노가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분노를 습관적으로 하는 많은 사람은 늘 모든 문제를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늘 남의 탓을 한다. 이러한 행동이 습관이 되면 자신을 발전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은 늘 하나님 말씀은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며 회개하고 진정한 기도로 성령님께 의지함으로 경건하지 못한 분노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분노의 가장 올바른 대처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인에게 허용된 '혐오(嫌惡)'는 없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유다를 앞세워 예수님과 일행을 잡으러 왔다. 함께 있던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하고는 말고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뜨렸다. 예수께서는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며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권능을 사사로운 분노와 증오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장한 병사들의 힘에 맞서 칼을 쓰고자 했던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라고 반문도 하셨다. 쓸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 내부에 이런 주님의 길이 아닌 힘의 논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작동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하나님과 이웃을 더불어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라는 주님의 음성을 함께 새기자. 2천 년 교회사의 신앙 증인들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이 음성을 듣고 따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