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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환(李文煥)
[문과]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1위(11/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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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요장(堯章)(주1)
생년 임자(壬子)【補】(주2) 1432년 (세종 14)
합격연령 22세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乙3‧丙7‧丁30]
전력 진의부위(進義副尉)
관직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책문(策問):치무(治務)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희(李暿)
[조부(祖父)]
성명 : 이담(李擔)[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학림(李學林)
[외조부(外祖父)]
성명 : 안등(安騰)(주3)
본관 : 죽산(竹山[舊])【補】
[처부(妻父)]
성명 : 이근완(李根完)(주4)
본관 : 우봉(牛峰)【補】
[안항(鴈行)]
형(兄) : 이문형(李文炯)[文]
형(兄) : 이계반(李繼潘)【補】
제(弟) : 이문병(李文炳)【補】(주5)
[주 1]자 :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내의 급제 기록에는 자가 "춘장(春章)"으로 나옴.
[주 2]생년 : 『경주이씨파보(慶州李氏派譜)』(1860, 국립중앙도서관[古2518-62-658])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5‧39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4]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9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5]안항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5‧39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담(李擔)
[문과] 태조(太祖) 2년(139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探花]위(03/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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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경술(庚戌) 1370년 (공민왕 19)
졸년 을유(乙酉)【補】(주1) 1405년 (태종 5)
향년 36세
합격연령 24세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직예문관, 우부대언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제현(李齊賢)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이학림(李學林)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글씨를 잘 써서 항상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지냈으며, 1401년(태종 1) 직예문관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3년 의정부의 이방녹사(吏房錄事)를 탄핵하여 의정부 당상들이 시사(視事)하지 않는다는 물의가 빚어졌다.
그 뒤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이르렀는데, 자기 집 광견(狂犬)에 물려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담(李擔))]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대언(代言)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학림(李學林)
[조부(祖父)]
성명 : 이달존(李達尊)[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제현(李齊賢)[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오중경(吳仲卿)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남약생(南若生)(주2)
본관 : 영양(英陽)【補】
[가족과거]
손(孫) : 이문형(李文炯)[文]
[주 1]졸년 :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1405) 4월 2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5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달존(李達尊)
[고려문과] 충혜왕(忠惠王) 즉위년(133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을과(乙科) 3위(3/37)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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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천각(天覺)
호(號) 운와(雲窩)
생년 계축(癸丑) 1313년 (충선왕 5)
졸년 경진(庚辰) 1340년 (충혜왕 후1)
향년 28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감찰장령, 전의부령, 전리총랑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천각(天覺)이다.
문하시중 이제현(李齊賢)의 아들이다.
1323년(충숙 10) 음보로 별장이 되었으나, 1330년(충혜 즉위) 10월 과거에 급제하여 헌납·감찰장령·전의부령(典儀副令)을 역임하였다.
1339년(충숙 복위 8) 겨울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아버지 이제현과 함께 배종하였다가,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어 이듬해 6월 왕과 함께 귀국 도중 죽었다.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달존(李達尊))]
[이력사항]
선발인원 37명
관직 총제(摠制)
기타 향년 28(享年二十八)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제현(李齊賢)[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진(李瑱)[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핵(李翮)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부(權溥)[麗文]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백이정(白頤正)[麗文]
본관 : 남포(藍浦)【補】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이제현(李齊賢)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신축방(辛丑榜) 병과(丙科) 1위(4/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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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이지공(李之公)
자(字) 중사(仲思)
초자(初字) 정부(正夫)
호(號) 익재(益齋)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년 정해(丁亥) 1287년 (충렬왕 13)
졸년 정미(丁未) 1367년 (공민왕 16)
향년 81세
합격연령 15세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정당문학, 판삼사사, 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 학자, 문인, 문신.
이제현은 고려후기 정당문학, 판삼사사, 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문인이다.
1287년(충렬왕 13)에 태어나 1367년(공민왕 16)에 사망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연경의 만권당에 머물면서 원의 유명한 학자·문인들과 교유하고 중국 내륙 여행을 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관료로서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시정을 위해 노력했다.
성리학 도입에 공이 컸고, 『익재집』을 남겼으며 시·사에 뛰어나 고려 한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아버지 이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딸은 공민왕과 혼인하여 1359년(공민 8) 4월 혜비(惠妃)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짓는 데 있어서도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 27) 4월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5월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제현은 만권당에 출입한 조맹부(趙孟頫), 원명선(元明善), 장양호(張養浩), 우집(虞集), 탕병룡(湯炳龍), 주덕윤(朱德潤) 등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이제현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이제현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 7)은 이제현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6월 과거를 주관하면서 시부(詩賦)를 폐지하고 책문(策問)으로 시험하였으며, 7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9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이제현의 원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우도록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왕고(瀋王 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도 격화되었다.
이제현은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옮겨진 데에는 이제현이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24년 2월 밀직사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 부자가 중조(重祚:왕이 거듭하여 즉위하는 현상)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했을 때는 이제현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충혜왕을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이제현이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1342년(충혜 복위 3) 6월 조적 난 때 호종한 공으로 김해군(金海君)으로 1등공신에 봉해졌으며, 1344년 4월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11월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공민 2) 5월 김해군(金海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11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이듬해 5월 치사(致仕)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1367년(공민 16) 7월 세상을 떠났다.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346년(충목 2) 10월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제현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정치가로서의 이제현은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원과 고려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은 없었다.
문학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를 저술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되면서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이색이 이제현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또한 이제현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볼 때도 성리학에 있어 이제현의 위치는 지대한 것이었다.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들이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현은 중국의 성리학을 직접 접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제현(李齊賢))]
[고려사마]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2위(2/77)
[이력사항]
선발인원 33(주1)명
관직 정승(政丞)
타과 1301년(충렬왕 27)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진사(進士) 1등(一等) 2위
기타 동년감괴(同年監魁)(주2)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진(李瑱)[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핵(李翮)(주3)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득견(李得堅)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인육(朴仁育)
[처부(妻父)]
성명 : 권부(權溥)[麗文]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2]
성명 : 박거실(朴居實)
본관 : 춘천(春川)【補】
[처부(妻父)3]
성명 : 서중린(徐仲麟)
본관 : 평당(平當)【補】
[주 1] 등급 : [계림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李穡)을 참고하여 시험 등급을 "병과(丙科)"로 확정. "公又中丙科"를 참고.
[주 2] 기타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에 "益齋墓誌曰鄭常侍僐試成均擧者負其能相頡頑聞公所作消縮莫敢爭先公果爲魁云 鳳龍似是益齋礿名"이라고 나옴.
[주 3] 조부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내의 부 이진(李瑱)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조부를 “이사(李嗣)”에서 “이핵(李翮)”으로 수정.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이진(李瑱)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5년(1279) 기묘(己卯) 기묘방(己卯榜) 병과(丙科) 2위(5/4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74C9C4FFFFB1244X0
초명(初名) 이방연(李芳衍)
자(字) 온고(溫古)
호(號) 동암(東菴)
시호(諡號) 문정(文定)
생년 갑진(甲辰) 1244년 (고종 31)
졸년 신유(辛酉) 1321년 (충숙왕 8)
향년 78세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상의도첨의사사찬성사, 검교첨의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초명은 이방연(李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으로, 이제현(李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摠郎)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가, 1298년 사림학사시우산기상시(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진사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이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이제현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를 탈취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과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東庵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진(李瑱))]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6년(1280) 경진(庚辰) 문신친시방(文臣親試榜) 을과(乙科) 2위(2/9)
[고려사마] 원종(元宗) 5년(1264) 갑자(甲子) 생원시(生員試) 1등(一等) 1[壯元]위(1/47)
[이력사항]
선발인원 43명
관직 정승(政丞)
봉호 임해군(臨海君)
기타 연벽(聯璧[兄弟同榜]):弟 李世基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핵(李翮)
[조부(祖父)]
성명 : 이득견(李得堅)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승고(李升高)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金○○)【補】(주1)
본관 : 김해(金海)【補】
[처부(妻父)]
성명 : 박육화(朴育和)(주2)
[안항(鴈行)]
형(兄) : 이인정(李仁挺)[麗文]
제(弟) : 이세기(李世基)[麗文](주3)
[가족과거]
자(子) : 이제현(李齊賢)[麗文]
[주 1]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4쪽)을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주 2]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4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대릉직(戴陵直), 대릉은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비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1092)의 능이다. 자 이제현의 문과방목에는 박인육(朴仁育)으로 기록되어 있음.
『경주이씨대동보(慶州李氏大同譜)』(1984) 권1, [6쪽]에도 "박인육(朴仁育)"으로 나옴.
[주 3] 안항 : 『씨족원류(氏族源流)』 [경주이씨]편(33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