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듭
이 홍사
*
그리하여 매듭이 생겼다.
매듭은 바람의 가슴에 기어이 생채기를 냈다.
생채기가 난 가슴을 더듬었다.
*
매듭이 없는 삶이 있을까만 내 가슴에 생겨난 매듭 앞에서 또 잠을 설쳤다
어디든 매듭이 생기면 가위는 금물이다.
섣불리 가위를 댔다가는 자칫 본질이 잘릴 수도 있는 법.
뭐가 단단히 꼬였다. 이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어떻게 푸나? 방법을 모색하느라 깊숙이 몸을 던지지 못하고 며칠째 잠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매듭의 실마리가 없다. 단단히 꼬였다.
이걸 어떻게 푸나. 편안하게 숙면할 수가 없었다. 또 잠을 설치고 새벽이 아닌 오밤중에 사무실로 꾸며 놓은 거실에 나왔다.
이국의 새벽은 늘 창밖 야자수 나무에서 열리는데 아직은 창 너머 나무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는 새벽. 이 시점을 새벽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혼돈이 일었다. 아직은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 가정부 에모가 모닝커피를 가지고 올라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어제는 앞집에 사는 골목 안 반장을 불렀다.
그와는 서로 부라더,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이다. 이 나라에는 반장이나 동장의 위력이 대단한 나라다, 완장을 찬 놈은 잘 사귀어야 했다. 이번에는 관광비자로 들어왔다. 미얀마는 관광비자로 개인 주택에서 살지 못한다. 반드시 호텔이나 모텔에서 자야 한다. 개인 주택에 살면 이민국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데 내가 땅을 사서 지은 집이라 집으로 바로 왔다. 그래도 신고를 해야 마땅하지만, 골목 안의 사람들은 나를 다 알기에 누가 이방인이 불법으로 들어왔다고 신고를 하지는 않을 터이다. 신고하지 않으면 이민국에서 나올 리가 만무다
딱 삼 년 만에 물을 건너왔다.
코로나로 쫓기듯이 들어갈 때는 이만큼 긴 시간, 아니 세월이 흐를 동안 나오지 못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금방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그사이에 미얀마 쿠데타가 터졌다. 군부에서는 외국인의 발목을 묶었다. 외국인, 특히나 기자가 들락거리는 걸 군부에서는 무척 싫어했다. 비자 없이 들락거리던 나라에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어렵게 나왔는데 매듭이 단단히 꼬여 있었다.
어제는 반장을 불러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요지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잘 지켜주고 가정부를 잘 돌보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런 게 꼭 필요한 나라다. 반장에게 준 금액은 반장의 예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장은 꼭 삼 년 만에 동네 유지가 돌아와서 반갑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동네 유지였다.
나만 몰랐던 사실이다.
동네에 무슨 행사가 있어, 기부를 받게 되면 내가 낸 액수가 가장 많았다. 골목 입구에 커다란 칠판을 세로로 세워놓고 이름과 기부 금액을 적는데 내 이름은 항상 영문으로 적히고 기부 금액이 월등히 많아 눈에 띄었던 터라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이름 앞에는 꼭 코리아라는 국적이 영문으로 명기되어 더욱 사람들 눈에 더욱 띄게 만든 것이었다.
이국의 낯선 동네에 비집고 살려면 그렇게는 해야 한다. 현지인들 사는 골목 안에 자리를 잡은 이방인의 필수 품목이었다. 그런 건 잘했는데 내 재산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게 매듭으로 꼬여서 풀리지 않았다. 이 땅에 뿌려둔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에는 삼 년이란 긴 세월이었다.
삼 년, 나의 부재로 매듭이 생겼다.
미얀마에 집 장사를 시작했다.
그게 구 년이 넘었다. 몽골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칠 년간 중기 임대업을 하면서 외국으로 돌리는 눈과 간을 키웠다. 물론 지금도 한국의 중기 임대업은 현재진행형이다. 또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미얀마로 건너와 주택에 손을 댔는데 투자된 금액으로 미루어 아르바이트라고 단순하게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애초부터 있던 매니저 때쑤는 네피도에 있는 무슨 사립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들어갔다. 수학을 전공한 그녀는 수학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친다고 했다. 내가 주던 월급이 시들했던 모양이다. 그때는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왔으니 때쑤가 없어도 별문제가 없었다. 네피도는 내가 터 잡은 양곤에서 차로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행정상 수도였다. 그녀가 이제는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갔으니 그만둔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나를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녀가 그렇게 가고 나는 길에서 아이를 하나 주웠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만난 인도계 검둥인데 한국말을 조금 했다.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사 년간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쉬울 때 가끔 불러 잔심부름 보냈더니 곧잘 듣기 좋은 소리를 물고 왔다.
코로나로 쫓기다시피 들어가면서 다급하게 녀석을 불렀다.
녀석에게 집을 지켜주면 푼돈이나 주겠다고 했다. 내가 짓던 집을 낱낱이 다 알려주기 전이었다. 금세 나올 줄 알았는데 미얀마 쿠데타까지 겹쳐 이제야 나왔다. 그동안 나는 포기했다. 미얀마 재산은 물 건너갔다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길이 뚫렸다. 다시 나오니 이곳에 두고 간 재산이 덤으로 얻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잊고 있었던 녀석은 골조만 세워진 흉물스러운 집을 보듬고 있었다. 이곳에 집을 짓던 현장은 다섯 군데인데 급해서 녀석에게 가까운 곳 두 현장만 알려주고 돌아갔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녀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와보니 녀석은 두 현장을 제가 낳은 알처럼 품고 있었다. 먼저 완성된 단독주택을 사무실 겸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지만, 녀석은 매일 출근했던 모양이다. 가정부 에모 혼자서 지키는 숙소였는데 이 녀석이 뒤에서 관리한 모양이다. 한국에 있으면서 한 번도 에모에게 월급이라고 부쳐주지 못했다. 쿠데타가 터지자 송금 루트가 철저히 차단되었다. 그런데 녀석은 잘 견뎌냈다. 무슨 돈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타던 오토바이가 사라졌다.
녀석에게 물었더니 하도 돈이 궁해서 팔아서 썼다고 했다.
그 오토바이는 미얀마에서 보기 드문 고가품인데 내가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다. 녀석도 그걸 알고 있었다. 마음은 쓰렸지만 잘했다고 했다. 이 긴 세월을 버티는 동안 그 오토바이 하나 팔아서 썼다면 용서가 되는 일이다.
오밤중에 도착하는 비행기에서 내려 다음날, 밀린 푼돈을 셈해서 목돈으로 주고 정식 매니저로 채용한다고 선언했다. 선언하면서 잊고 있던 이름을 다시 물었다. 그동안 내 기억에는 녀석의 이름이 사라졌다. 부르던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긴 세월을 비웠다.
아웅 살린이라고 했다.
미얀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이 없는 나라다. 그냥 이름만 존재한다. 그래서 신분증에 아버지의 이름을 기재한다. 변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아버지의 이름. 나도 무슨 문서를 만들면서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넘는 아버지의 성함을 영문으로 표기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웅 살린. 발음이 어려운 녀석의 이름을 줄여서 살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녀석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순진한 인도계 검둥이는 유난히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살린은 이제 내 직원이 되었다.
녀석을 정식으로 채용하면서 명아주 지팡이를 떠올렸다. 지팡이는 자고로 가볍고 단단해야 했다. 그래서 옛 노인들은 명아주 지팡이를 머리맡에 두고 잠들곤 했다. 녀석에게 제시한 월급의 무게로 따지자면 녀석은 가벼웠다. 그러나 녀석은 단단했다. 내 명아주 지팡이가 되었다. 여태 이 땅에서 지팡이도 없이 비딱한 길을 절룩거리며 왔는데 이제는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때쑤는 한 번도 명아주 지팡이가 되지 못했다. 나를 두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삼 년간 비웠더니 집은 고장이 여러 군데가 났다. 그게 눈에 들어왔다. 가장 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문제를 제시한 에모는 그게 가장 급하다는 눈길을 던졌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과 가정부 에모의 방, 문고리가 망가진 문이 셋, 에모가 세상을 내다보는 창구인 텔레비전은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었지만, 돈이 없어 그대로 방치했고 화장실 변기는 물을 내리는 고리가 떨어져 물을 내릴 적마다 물통 뚜껑을 열어야 했다. 주방의 타일은 떨어져 보기에 흉했고 내부 페인트는 세 번의 우기를 거치면서 얼룩이 졌다.
오밤중에 도착해서 다음 날 새벽에 파악한 문제들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기다렸던 눈치였다. 그 목 타는 기다림 속에서 나는 젖줄이 되어야 했다. 다음날부터 살린을 데리고 직접 불편했던 것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고쳐주어야 할 집은 셋. 그것을 다 고치고 칠을 다시 하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다음부터 멀리 있는 현장을 돌아보며 점검을 해야 했다.
그 현장들은 살린에게 미처 알려주지 못한 현장이었다. 짓다가 중단되어 마무리하지 않은 건축물은 보기에 흉했다. 세 곳의 현장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한 곳은 기초공사를 마치고 중단된 현장이 있는데 그곳에 찾아가니 멀쩡한 이 층짜리 단독주택이 지어져 있었다. 그 집을 보자 입에서 모래가 버적거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불렀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현관문은 열려 있었는데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가서야 건축업자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미얀마말로 없어진 전화번호라는 기계음이 나왔다.
뭐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외국인 명의로 땅을 살 수가 없어 건축업자의 이름으로 사고 뒤에 변호사의 공증을 받아 내가 산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아 두었는데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이 사라졌으면 그 공증이 무슨 소용이랴.
살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인도계 검둥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문이 열린 옆집으로 들어갔다.
이 나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어처구니없음은 여전히 건재한 나라였다. 제 명의로 된 남의 땅을 팔아먹고 충분히 날아버릴 수도 있는 나라다.
뭐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삼 년간 나오지 않았으니 이 자식은 쿠데타로 세상이 바뀌어 내가 영원히 못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살린이 옆집 아저씨를 붙들고 한참을 얘기하고 있었다. 단독주택이 지어진 땅은 육 층짜리 빌라를 지으려고 허가를 넣고 기다리던 중이던 땅이다. 미얀마는 건축 신청을 넣으면 심사를 하고 허가가 떨어지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린다. 일 년 그것도 담당자에게 뒷돈을 좀 줘야 가능한 나라다. 미얀마 공무원 입에 달린 삼무라는 말이 있다. 무슨 단어든 앞에 무가 들어가면 부정을 뜻하는데 거기서 따온 세 가지 무라는 말이다. 무야부, 안돼! 라는 단정적인 말이고 무시부, 없어! 라는 매정한 뜻이며, 무띠부, 몰라! 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공무원으로서는 친절하지 못한 말이다. 이곳 사람들도 공무원은 다 그렇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그런 나라이니 건축허가를 넣으면 당연히 뒷돈이 따라붙는다. 그렇게 해도 일 년이 걸린다.
엉성한 단독주택은 동네 반장과 이장을 통해 신고하고 도면도 없이 바로 지으면 되는데 아파트나 빌라는 달랐다. 그사이를 못 참고 공무원 눈에 뜨이지 않는 기초공사, 공사 기간을 줄이겠다고 기초만 미리 해두었던 땅인데 공사대금은 그 자식이 조르는 통에 이미 절반이 건너갔다.
그게 삼 년이 넘었다.
골목에서 기다리는 데 땀이 줄줄 가슴골을 타고 흘렀다.
마음도 덥고 몸도 더웠다. 미얀마는 5월과 11월이 가장 더운 시기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과 우기가 막 끝난 시점, 우기에는 하루에 한두 번 비가 오기에 여름이지만 오히려 시원하다. 지금이 가장 더울 때인 11월. 한국에서 찬바람이 내리는 걸 보고 나왔는데 몸과 마음이 잔뜩 더웠다.
그래도 실낱같은 기대, 그 자식이 이 집을 지어서 제가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빼앗아 팔면 된다.
그늘이 없었다. 땡볕 아래, 땀에 범벅이 되어 골목에 서서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 나니 살린이 나왔다.
그 땅은 제 앞으로 명의를 가진 건축업자 팔았다는 설명. 살린은 건축업자의 이름을 댔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이 뱀의 혓바닥처럼 여겨져 잠시 몸서리를 쳤다. 얼마에 언제 팔았으며, 지금 주인은 변호사라는 말까지 했다.
그건 덤덤하게 듣고,
녀석에게 내 앞에서 그 건축업자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 업자는 살린이 처음 듣는 이름이고, 처음으로 입에 올리는 이름이었는데 녀석은 눈치도 없이 이름 뒤에 존칭을 붙였다.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부르거나 존칭을 붙이면 죽여버리겠다며 죄도 없는 녀석에게 화풀이를 했다.
알 것은 다 알았다.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
살이 떨렸다. 그 정도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 업자라는 녀석을 당장 죽이고 싶었다. 그냥 단칼에 죽이는 게 아니라 사지를 찢어가면 아주 극심한 고통을 주고 죽이고 싶어 이빨을 갈았다.
그 업자라는 녀석에게 맡긴 현장은 세 군데였다.
하나는 골조만 올라간 상태로 중단되어 있었고 하나는 이미 팔아먹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주와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었는데 그건 건물을 다 지어 건축허가만 남겨두고 있었던 현장이었는데 일 층에 그 지주인 사람이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 현장마저 돌아보기에는 내 심신은 너무 지쳐 있었고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가 두려웠다.
녀석에게 택시를 부르라고 했다.
숙소로 돌아가 눕는 게 간절했다. 미얀마의 택시는 미터기를 돌리는 게 아니라 다 흥정이다. 그것조차도 짜증스럽게 여겨졌다. 흥정에 따라오는 것이 실랑이다. 그 실랑이가 귀찮고 실랑이를 할 기운도 어어 뒷전에 기다렸더니, 녀석이 흥정을 마치고 타라고 했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일본 야쿠자를 불러 청부살인을 하겠노라고 했더니, 녀석은 미얀마에도 청부살인업자가 많다고 했다. 그 말은 한국어로 했기에 택시 기사가 알아듣지는 못했다. 정말 그런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누웠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업자라는 놈이 얼굴이 수시로 떠올라 곤혹스러웠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했다. 급기야 분노가 극에 달해 손에 집히는 대로 던진 것이 머리맡의 물병. 그때 나는 보았다. 내 안에서 단단히 얽힌 매듭.
이 매듭을 어떻게 푸나?
이 자식을 어떻게 찾나? 찾더라도 돈은 돌려받기 힘들 것이다. 경제적 손실은 이미 지나갔으니 잊어버려야 할 문제이고 이 매듭이 내 안에서 나를 얼마나 옥죌까? 내 건강이나 정신을 해치지는 말아야 할 것인데, 매듭을 보며 나는 나를 걱정했다.
그 자식을 기어이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
내 안에서 수시로 떠오르는 그 자식을 기억에서 죽이려 애를 썼다. 그날 내린 결론은 내 기억에서 그 자식을 무참히 살해하고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결론이었다. 내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채택한 선택이었다. 그날 밤 기어이 신경성으로 인한 위경련을 경험했다.
새벽에 일어나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내가 전생에 그 자식에게 진 빚이 있거나 아니면 다음 생에서 돌려받게 될 거라고 마음을 먹고 잊어버리자. 결국 나와 타협했지만, 손해가 왕창 나는 타협이었다. 그렇게 타협했지만, 나는 나를 가누지 못하고 며칠간 기우뚱거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시로 떠오르는 그 자식의 얼굴,
용서해야지.
용서라는 말을 입에 주문처럼 달고 다녔다.
뭐부터 풀어야 하나?
어제도 종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가 저녁에 반장을 불렀다. 가정부 에모를 보내, 오라고 전갈을 넣자 냉큼 달려온 반장에게 고맙지도 않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순전히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한 표시였다.
그런 표시는 해야 골목을 들락거리는 마음이 편했다.
지난밤에도 잠을 설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고 나니 바람의 모서리에 앉은 나를 발견했다. 바람의 모서리에서 나는 매듭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매듭.
매듭을 지닌 새벽은 각이 졌다.
마음을 찌르지 않을 둥근 문장이 가슴 속에는 절실했다.
모서리가 없는 자모를 끌어와 억지로 둥근 문장을 만들었다.
용서해야지. 용서
금세 책상 앞에는 둥근 문장이 가득했다. 모가 없는 둥근 문장은 가슴을 찌르지는 않았으나 공허했다. 모가 난 문장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찔렀었다. 둥근 문장이 필요했지만 이젠 거실에 발을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둥근 말들이 넘쳐났다.
용서!
용서는 분명히 둥근 말이었으나, 공허했다. 용서. 다시 곱씹어 보지만 공허한 말이었다. 공허해서 불편한 문장을 새겨서 읽지 않고 외면하며 매듭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쩌다가 예까지 왔을까?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새벽에 내쉬는 한숨은 자신을 불쌍하고 처량하게 만들 뿐, 매듭의 고리를 찾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 어렵게 나올 적에는 여기 있는 것을 모두 헐값에라도 정리하고 들어가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삼아서 했던 거, 이제 전을 거두고자 싶었다. 손해 금액은 한국에서 생각하기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살아가면서 누가 이런 노름 한번 못할까?
노름으로 탕진한 건 아니지만, 손해액은 아버지께 물려받은 게 아니다. 그게 마음에 드는 사항이었다. 모두가 내 손으로 일군 것들이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잊어버리자.
한국에서 발이 묶여 있을 적에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나와서 달러 가격을 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어 고개가 저절로 흔들렸다. 쿠데타로 미국에서 돈줄을 죄었든지 달러 가격이 곱절을 뛰었다. 지금 헐값에 정리하더라도 미얀마 돈으로 팔아서 달러를 바꾸어서 쥐고 나가야 한다. 헐값에 전부를 정리하고 달러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 대충 환산해도 터무니가 없다.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처절한 입장,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떠올리면 또 가슴을 찌르는 일이지만, 한 덩이를 팔아먹고 날아버린 자식보다 달러 가격이 폭등해서 보는 손해가 더 크다. 세상은 변했다. 멀쩡하게 앉아서 이렇게 손해를 보는 경우도 다 있다. 계륵이라고 했던가? 닭갈비, 먹으려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물건,
이걸 어쩌나?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상의하거나 발설할 일이 아니었다.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아내에게 섣불리 이야기했다가는 약값이 더 드는 문제다.
그렇다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막연하게 손을 튼다고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달러 가격을 보고 쥐고 들어갈 금액을 생각하니 이건 아니다 싶어, 서서히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아, 어처구니없는 나라에서 나의 종점은 어디인가?
이 더운 나라에서 왜 가슴이 이렇게 시릴까?
책상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생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항상 그 말씀이 가슴을 둥글게 적시곤 했는데 또 떠오른 것이다.
얘야! 해외는 돈을 들고 놀러 가는 곳이지 돈 벌러 가는 곳이 아니란다. 혹여 기회가 닿더라도 절대 마음먹지 말라.
할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담배 농사를 대대적으로 짓다가 땅도 돈도 다 버리고 일본 순사를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걸 보신 아버지께서는 물 건너 있는 돈은 재산이 아니라는 인식, 당시에 할아버지께선 장질부사라고 불리는 장티푸스에 걸려 몸만 상해서 겨우 돌아오셨다. 그게 아버지 뼈에 사무쳤던 모양. 아버지 살아생전에 자식이 중장비 하는 것을 보셨으니 그 점을 염려하셨던 것일 터, 당시에 중동에 건설 붐이 한창 일 적이었다. 그쪽으로 나가 목돈을 탐하다 몸이 상하는 걸 염려하신 아버지, 기어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이렇게 물 건너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숙연해진다.
기분이 찹찹한 새벽,
오만가지 망상이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와 한가지 생각을 올곧게 정립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겹치는 생각, 혼자서 부산스럽고 혼란스러운 생각의 새벽.
에모는 언제 일어나 모닝커피를 가져오려나?
아버지 말씀은 차치하더라도,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했다.
지금 물이 들어오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돈을 가져오면 예전의 곱절이다. 지금은 투자의 적기이지 빼서 철수하는 시기가 아니다.
형편이 되는 대로 더 가져와서 물타기를 해?
역발상도 때론 괜찮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 남을 따라가면 성공하지 못한다. 가끔은 거꾸로 가야지. 뒤를 돌아서 거꾸로 가는 길에 첩경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지금 더 투자해서 물타기를 하면 조금만 유리해져도 이길 수가 있다. 지금 철수하는 점수가 형편없다. 분명한 패배다. 후반전이라 생각하고 한탕 더 뛰어볼까?
이거 재미있는 발상인걸?
나이도 있고, 모든 걸 정리하고 철수하러 들어온 내가 아니었던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이런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 에모가 가져올 모닝커피도 기다려지지 않았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천원을 가져오면 여기서는 곱절이 넘는다. 달러는 폭등을 했지만, 여기의 땅값은 오르지 않았다. 신이 내린 기회다. 이 기막힌 기회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외국에 의존하는 공산품 가격이 좀 올랐고, 인건비와 땅값은 예전 그대로다.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는다. 위기가 바로 기회라는 말도 있는데.
아니다.
이건 기회가 아니라 유혹일 수도 있다.
발이 더 깊이 빠지면 노후가 처참해질 수도 있다. 정리하자. 모든 걸 깔끔하게 잊고 이 땅을 떠나자.
갈등의 골에 빠진 생각의 새벽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갈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어야 하나?
마침표를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의심 한 구절.
내가 나를 잘 견딜 수 있을까?
갑자기 내가 두려워졌다. 나를 배신한 건 시간이 아니라 나였었다.
무슨 공식이 이래?
혼란스러웠다. 뭔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줏대를 지니고 견고하게 품목별로 정리해야지 꼬인 매듭의 실마리가 보이는 법인데 이건 너무 혼란스럽다. 이렇게 줏대 없이 흔들리다간 스스로 생각의 스텝이 꼬여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담배를 껐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A4용지가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생각이 정리하지 못한 거 적어가며 손익을 계산하고 하나하나 적어보는 게 객관적인 대차대조표가 될 것이다. 판단은 대차대조표가 할 것이고 결정은 거기서 나온다.
가슴에 퇴적된 한숨을 한 웅큼 토해놓고 용지를 볼펜으로 메워가기 시작했다.
A4용지 위에 가장 먼저 적힌 것이 나이였다.
그게 숫자상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무리 기회라지만 나이가 허락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이를 적어놓고 그 숫자를 힐끔거리면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내려갔다.
A4용지에는 깨알 같은 손글씨가 빼곡하게 적히고 있었다. 전부가 현란한 숫자였다. 대차대조표에 적힌 손실 금액을 보니 가슴이 따가웠다. 그래도 공정하게 재투자와 철수라는 항목을 메워나갔지만, 나도 모르게 재투자에 점수를 후하게 주고 있었다. 그게 단박에 표시가 났다.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 아주 객관적인 시각으로 비교해야 한다.
A4용지를 구겨서 던져버리고 새 용지에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어가는 대차대조표가 반성문이 될 줄은 몰랐다. 적다 보니 반성해야 할 지난날이 마구 떠올라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뭐가 이래?
차분하게 생각하고 객관적인 사실로 분석해야 하는데 지난날이, 잊어도 좋은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곤혹스러운 A4용지.
도대체 허투루 쓴 돈은 얼마인가? 여기저기서 뜯기고 손해 본 금액이 얼마인가?
이거 도대체 이 나라는 배우는데 수업료를 얼마나 낸 거야? 차근차근 적어나가다 보니 지나치게 과중한 수업료를 내고 이 나라를 배웠다.
수업료로 여겨지는 숫자를 보니 내가 섬뜩할 정도로 큰 숫자였다.
에모가 언제 올라왔다가 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에모가 다녀간 모양이다. 눈을 돌리니 책상 귀퉁이에 커피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김이 오르는 커피 한 잔, 이국의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표였다. A4용지에 매듭이 생겼다. 그 매듭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손실이 너무 커서 생긴 매듭이었다. 이 매듭을 어떻게 푸나?
작성하는 대차대조표에는 철수보다 재투자의 항목이 훨씬 많은 점수를 얻고 있었다. 공정성을 기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성한 것인데 그랬다. 나는 나도 모르는 재투자에 발목을 담그는 내 발을 보았다.
후반전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뛴 것은 전반전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매듭은 푸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녹이는 것이다. 나에게는 후반전이 있다. 전반전 점수는 잊어버리자. 매듭은 가슴으로 녹이고.
어디에 있는 돈을 어떻게 끌어오나?
구체적으로 궁리하는 내가 무서워지는 새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