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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진실과 겸손>
진실하고 겸손한 삶 자체가 힘이요 감동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 사랑의 은총은 우리 궁극의 울타리이자 봉쇄지역이요 안식처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마음의 순수요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이런 마음은 그대로 은총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역시 단호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요 인간은 인간입니다.
이를 깨달아 알아 믿는 것이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하여 주님은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도, 아니 그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십니다.
모두 우리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은 그대로 마음의 반영입니다.
단순한 마음에서 단순한 말입니다.
바로 이게 겸손이요 진실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자기를 알아 이런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자 말입니다.
진실과 겸손을 떠난 입에서 배설되는 무수한 헛된 말들이
공해가 되어 주변을 오염시키고 숱한 상처를 줍니다.
삶을 아주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초대교회 예비신자들을 위한 교리 교육 내용입니다.
세례를 받아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신자들을 위한 교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되어 진실하고 겸손해진 이들이 지켜야 할 교리입니다.
오늘 1독서 열왕기 상권의 짧은 일화는 엘리사의 성소를 묘사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대로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영이 엘리사를 사로잡음을 상징합니다.
은총이 작용했기에 엘리사의 반응 역시 아주 단순하고 진실합니다.
즉시 기존의 삶과의 결별이 이루어집니다.
완전히 내외적으로 새롭게 변모된 모습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엘리야를 통해 주님을 만난 엘리사의 변모된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의 성소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평생과정의 성소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끊임없이 내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진실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주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 모두를 당신 중심의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
(시편 16,5ㄱ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우리는 살다보면 거짓말을 참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의도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하게 될 때에는 참으로 당황스럽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친구는 약속을 자주 어기는 것을 내세우면서, 또 약속을 어기겠냐고 다짐을 받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그때는 내가 정말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지.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합니까?
또 갑자기 급하고 중요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침 휴대전화를 들고 나오지 않아서 친구와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을 최대한 급하게 처리한 뒤에 약속장소로 바삐 뛰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약속시간은 1시간 넘게 지났고, 친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거짓말입니다.
분명히 친구와의 만남에 대한 약속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예고를 하실 때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맹세가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순간 예수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을 했고 결국 거짓말을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거짓말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의도보다도 어쩌면 호언장담하는 맹세가 아닐까요?
맹세함으로 인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맹세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약속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정직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 아예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이르시지요.
바로 의도된 거짓말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맹세를 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게 되는 거짓말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도 이러한 맹세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얼마나 많이 어겨서 주님께 ‘거짓말쟁이’가 되고 있을까요?
이제는 주님께도 믿음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헛된 맹세를 하지 않고, 몸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말>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맹세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맹세를 남발하게 됩니다.)
'예'와 '아니요'만 말하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여라.", 또는 "진심으로 말하여라."입니다.
진실에 대해서는 "예." 라고 하고, 거짓에 대해서는 "아니오." 라고 하는 것은 진실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또 마음과 말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말이 다르다면, 그 말 자체는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라는 진실을 예로 든다면...
입으로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속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종교박해 때에 박해자들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안 믿는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라고 강요한 일이 많았습니다.
순교자들은 안 믿는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를 거부하고 죽었습니다.
믿고 있는데도 안 믿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가 되고, 공개적으로 안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세례를 받는다면 그 세례성사는 무효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그 거짓말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우리는 진실만을 말한 다음에는 (또는 진심으로 말한 다음에는)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거짓말이 됩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진정성 논란을 자주 일으키는 것은
그 말에 진심이 없기 때문이고, 또 실천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심이 아닌 말, 실천이 없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사제가 자신은 청빈하게 살지 않으면서 복음적 청빈에 대해서 강론을 한다면 그 강론은 거짓말이 됩니다.
자신은 '복음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면 그것도 역시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일이 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행동은 없고 말뿐인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혀는 우리 목을 치는 칼이요, 입은 우리를 지옥으로 가게 하는 문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야고 3,2)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야고 3,9-10)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면 그 두 가지 말이 모두 거짓말이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저자가 '죄' 라고 표현하지 않고 '실수' 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우리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 라고 해서 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명백한 죄이지만, 본의 아니게 말실수를 하는 것도 죄입니다.
('말실수'도 십계명 제8계명을 어기는 죄입니다.)
지옥은 거짓말의 왕국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곳은 헛된 맹세만 가득한 곳일 것입니다.
또 그곳은 하느님과 이웃을 저주하고 모독하는 악한 말만 들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진실만을 말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맹세 같은 것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또 그곳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축복하는 선한 말만 들리는 곳입니다.
(비위를 맞추기 위한 거짓 축복 말고,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만...)
우리는 말 한마디로 자기가 있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말'이 진짜로 '진실한 말'이 되려면 그 말에 악(惡)이 없어야 하고, 하느님의 선(善)과 사랑만 있어야 한다는 것.
말 속에서 진실과 선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요즘 애인이 변심했다고 하여 애인을 찾아가 보복을 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애인의 집을 차로 들이박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불과합니다.
정말 엽기적인 사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여 치과의사가 변심한 옛 남자친구가 치통을 호소하자 치아 32개를 몽땅 뽑아 보복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야하는데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나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을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이 잠깐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현찰,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억 단위를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잘 믿고 베푸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굳게 믿었는데 배신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합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못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의미는 그 맹세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맹세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꺾으십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맹세를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말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맹세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말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우리 힘이나 말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는 미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매일 읽고,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당신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에는 성모님께서 많은 일을 한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우리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기도에 관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위반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에 우리의 참여를 원하시지만 자연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중요한 일을 나누는 것이고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행복한 삶을 위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때로는 결혼, 독신, 권력, 건강, 명예,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원기도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하기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 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 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판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히브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정직성’ 또는 ‘진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사실 ‘정직’과 ‘진실’의 의무 또는 덕목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사회의 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무척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진실과 정직보다는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정직함과 진실함의 가치는
그의 성향이나 외적 태도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리’와 어떻게 관련하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됩니다.
그가 과연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에 따라
깊은 인격적인 차원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진실성’의 덕목을 가리키면서 ‘진리’와 같은 말을 사용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사람의 덕성과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와 닿아 있고, 인간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께 속할 때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헛되고 과장된 맹세가 아니라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을 강조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자신의 ‘진실성’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겸허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나의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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