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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경쟁’ 섹션에 공식 초청돼 월드프리미어로 상영된 <구럼비에 바람이 분다> 스틸 컷 -
1997년 10월.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남포동 아카데미 극장.
한 편의 영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를 위해 한 영화감독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막 상영을 마친 영화는 바로 제주 4·3 항쟁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은 바로 그 영화의 연출자 조성봉 감독이었다.
당시 <레드 헌트>는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었고 감독은 부산경찰청 공안수사대에 의해 지명수배 중이었다.
당시 이용관 한국영화프로그래머(현 집행위원장)는 어려운 상황인데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조성봉 감독을 소개했다. 마이크를 잡은 조성봉 감독은 긴장한 듯 보였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레드 헌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제주 4·3 다뤘다고 영화는 상영금지, 감독은 지명수배 <레드 헌트>는 4·3을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97년 첫 상영이 예정돼 있던 한 다큐영화제에서는 심의를 이유로 상영이 취소됐다.
또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레드 헌트>를 상영했던 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준식씨는 구속돼야 했다.
조성봉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영장이 기각돼 간신히 구속은 면했다. 그렇다면 <레드 헌트>는 어떤 내용일까?
<레드 헌트>는 제주 4·3 항쟁의 과정을 차근차근 담아내고 있다.
1948년 3월 1일 관덕정에서의 발포사건, 그리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의 포악성,
4월 3일 제주 각 오름에서 올랐던 봉화, 오라리 방화사건의 진실 그리고 대량 학살 등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한다. 그리고 각종 문서와 자료 등을 통해 4·3의 진실을 말한다.
서청의 잔인함과 무소불위 권력은 궁극적으로 이승만이가 잘못했다는 당시 서청 출신자의 증언과
미군정이 채용한 일제 경찰 출신들이 지배세력으로 전개했다.
미국이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당시 서귀포 경찰서장의 말,
오라리 방화 사건을 공중에서 촬영한 미군의 필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청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제 때도 경찰이 강하지 않았는데 해방되고 더 심해졌다."
"제주도 나이든 노인들 지금도 경찰이라면 부들부들 떤다. 덮어놓고 아들 내놓으라고 경찰이 노인들을 팼다.
" 영화 속 노인은 상기된 표정으로 당시 거칠었던 경찰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또 당시 신문 자료를 통해 경찰의 고문으로 여러 사람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군인과 민방대가 우리 마을을 포위했어"
<레드 헌트> 속 사람들은 여전히 치떨리는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군인들과 민방대가 마을을 포위했어. 숨었을까 봐 창이나 칼 같은 걸로 천장을 찔렀다."
"18세 이상 40세 미만 사람들을 끌고 가서 동짓달 17일과 18일에 학살시켰다."
"곱상한 여자들도 노리개로 삼다가 17일에 학살했다. 그래서 17·18일에 제사를 지냈다."
<레드 헌트>는 증언자들의 입을 빌려 4·3은 정부의 무차별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구조적 폭력에 대한 자위적인 폭력이라고 말한다.
테러리스트(경찰과 서북청년단)로부터의 자위투쟁이며 통일독립투쟁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끝맺음한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미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권력의 전면에 도전한 친일파,
정통성과 국내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 그리고 미국이 제주인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4·3의 비극은 청산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우리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은 우리사회 냉전의 산물인 흑백 이데올로기와 연관돼 있다."
<레드 헌트>를 만든 조성봉 감독은 유독 한국사회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에 천착한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1년 6개월 동안 자료를 수집했고 6개월 간의 촬영을 거쳐 4·3의 진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4·3을 위해 2년을 바친 셈이다.
이후 미흡한 부분을 보충한 <레드 헌트2>를 세상에 내놓으며 한국사회의 빨갱이 사냥의 실체를 고발했다.
4·3과 5·18은 닮았다…빨치산 다룬 <진달래 산천> 준비 중 1997년 <레드 헌트> 사건 이후 세상은 많이 변했다.
1999년 12월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올해 초 몇몇 시민단체들이 4·3 평화공원은 폭도공원이며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는 가짜로 작성됐다고
주장하는 진정서를 대통령직 인수위에 제출했다.
이들은 진상보고서가 제주4·3사건과 관련된 사형수, 무기수를 비롯해 폭동에 가담한 1만3564명을
희생자로 만들기 위해 가짜로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제주4·3항쟁에 대한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3월 16일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 있는 작업실에서 조성봉 감독을 만났다.
그는 4·3을 폭도의 역사로 되돌리려는 우익단체들의 최근 모습에 대해 옛날부터 그랬다며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권력을 쟁취했으니 힘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 올바른 방향에 역행하는 모습일 뿐이다…(중략)…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권력 중심인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10여년 전 4·3의 흔적을 더듬으며 한라산 자락을 훑고 다녔던 조 감독.
지금 그는 빨치산을 담기 위해 지리산 자락에 머물고 있다.
한라산의 민중을 찾아다니면서 자리산 빨치산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그들의 흔적을 담기 위해 수년째 지리산 골짝골짝을 헤매는 중이다.
이러한 여정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제주4·3항쟁 진압을 거부하며 여순(여수·순천)에서 총구를 거꾸로
이승만에게 돌린 14연대가 지리산 빨치산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또 4·3의 한라산 유격대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선배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배 빨치산들의 흔적을 찾아 조 감독은 제주 한라산을 뒤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라산 유격대 총사령관 이덕구의 흔적을 찾기도 했다.
조 감독은 이명박 정권이 등장했다고 역사를 바꾸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전 민주화를 기반으로 한 정권들이 변화를 시도했지만 기득권의 틀을 깨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레드 헌트>의 후속편 <레드 헌트2>의 말미에는 5·18 광주가 등장한다.
4·3과 5·18이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넣었다는 조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제주 4·3이나 5·18이나 항쟁의 역사는 다를 게 없다.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라는 반공의 틀을 깨지 못하면 지하에 계신 분들이 움틀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움직임에 맞서 그는 다시 다큐멘터리에 몰두하고 있다.
내년쯤 끝낼 예정인 <진달래 산천>이 바로 그것이다.
2003년부터 촬영에 들어간 <진달래 산천>은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었던 빨치산들의 이야기다.
제주를 피로 물들였던 레드 헌트를 영상으로 고발한 그가 대립의 역사 한가운데 섰던
빨치산들을 어떤 모습으로 담아낼지 자못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진달래 산천> 블로그 http://blog.naver.com/hanee3289
OhmyNews .성하훈 기자
조성봉
1961년 生. 부산대 역사교육과 2년 중퇴
1997년 <레드헌트-Red Hunt>연출 제작
2000년 <국가범죄> 연출 제작
2003년 <보이는 어둠> 연출 제작
2004년 <85호 크레인> 연출
2008년~ 火山 이현상 일대기를 그린 <진달래 산천> 제작 중
2011년 <진달래산천>은 잠시 접고 제주 강정마을에 머물며<구럼비에 바람이 분다> 다큐 제작
2014년 <구럼비-바람이 분다>(배급 시네마달)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경쟁’ 섹션에 공식 초청돼 월드프리미어 상영(滿席을 이룸).
※ 2018년 4월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거행된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문재인 대통령 4·3 희생자추념사 중에서
(전략)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후략)
“5·18 광주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4·3은 ‘사건’입니다.
70주년을 맞아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하는 말들이 들립니다.
그런데 그 역사에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정의된 게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1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제주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 1·2편 상영회가 열렸다.
1997년 선보인 영화는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로 규정되기도 했다.
상영 후 이어진 시네토크에는 <레드 헌트>의 조성봉 감독이 참석했다.
그는 7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정의되지 못한 4·3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자리에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 시인도 함께했다.
사회는 영화평론집 <지슬에서 청야까지>를 낸 윤중목 시인이 맡았다.
이 시인은 1997년 부산 남포동에서 <레드 헌트>를 처음 봤을 때 감격해 손뼉을 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한라산>이 나온 1987년만 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산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었다”며
“시집 발간 10년 후 나온 영화엔 피해자들이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사회 변화는 그 사회 구성원 중 가장 약자가 어떻게 변화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서 놀랐다”고 말했다.
1986년 <한라산> 집필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설명했다.
이 시인은 “여름에 한 출판사 직원을 만났는데, 그가 귀에 대고 내게 ‘4·3을 아느냐’고 물었다”며
“당시만 해도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에서 접한 것이 다였기 때문에 모른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후 4·3 관련 저작물들을 접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한라산> 집필에 들어갔다고 했다.
조 감독은 <레드 헌트> 외에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당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투쟁기를 담은 <85호 크레인>,
제주 해군기지 논란을 담은 <구럼비-바람이 분다> 등 사회적 문제를 담은 다큐를 작업해 왔다.
그는 “사회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레드 헌트> 역시 그런 관점에서 시작했다. 일부러 논의가 필요한 문제들을 찾아서 작업한다”고 말했다.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사건이 다시 주목받는 상황에 대해서는 반가움과 함께 아쉬움도 내비쳤다.
“2013년 <지슬>이라는 영화의 시도가 있었지만, 보수정권 9년 동안 4·3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많이 움츠러들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문재인 정부 들어 4·3이 다시 길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이제라도 4·3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정신을 예술적으로 학문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18년 4월 2일자 신문기사 스크랩 /
이산하 시인(왼쪽)과 조성봉 감독이 18년 4월 1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열린
영화 <레드 헌트> 1·2편 상영회 후 이어진 시네토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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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5월 28일 지명 시에 중철굴암에서 조성봉 감독과 함께 -
- 2019년 4월 28일【歷史테마】구례군당트에서 조 감독 및 진달래산천 일행들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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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는 이렇게 끝맺음한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미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권력의 전면에 도전한 친일파,
정통성과 국내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 그리고 미국이
제주인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4·3의 비극은 청산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우리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은 우리사회 냉전의 산물인 흑백 이데올로기와 연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