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땅에서 온 감칠맛
식해와 양념젓갈은 어떻게 다를까? 둘 다 붉은색을 띠는 것이 언뜻 보기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만드는 방법도 비슷하다. 둘다 어류를 주재료로 하고, 염장 후 양념을 넣어 발효시킨다. 다른 점은 곡물의 유무다. 식해에는 쌀이나 좁쌀 등이 들어가지만
양념젓갈엔 들어가지 않는다. 식해를 자세히 보면 곡물이 알알이 보인다. 이 곡물이 발효되면서 양념젓갈과는 구분되는 식해만의 단맛과 신맛을 만들어준다.
가자미식해는 조선시대부터 조상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다. 그 근거는 조선 초기, 1450년대에 편찬된 <산가요록>에 있다. 이 조리서에 어해(생선식해) 만드는 법이 나온다. 가자미식해는 가자미가 잘 잡히는 동해안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 등지에서 주로 먹었다. 지역마다 제조법과 맛이 조금씩 다른데, 쌀이 잘나지 않는 함경도에서는 좁쌀로 지은 밥을 사용하고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는 보리나 쌀을 넣는다. 맛도 함경도식 가자미식해가 강원도식보다 더 담백하다. 그런데 강원도 속초의 가자미식해는 함경도식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함경도의 주민들이 속초에 정착해 이북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중 하나가 가자미식해였던 것이다. 강원도에 정착한 실향민들은 이제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함경도식 가자미식해의 맛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남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이금선 명인(54)이다.
실향민인 시어머니로부터 가자미식해 제조법을 전수받은 명인은 30여 년간 속초에서 가자미식해를 만들고 있다. 명인은 가자미식해를 제조하는 게 곧 고향을 지키는 일 이라 여긴다. 명인의 부모도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이기 때문이다. 그 사명감 때
문인지 명인은 매일 새벽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사위가 어둑해 질 때까지 가자미를 버무린다.
[실향민들의 음식을 지키다]
가자미식해에 대한 명인의 첫 기억은 스물다섯살 무렵이다. 강원 양양이 고향인 명인은 속초로 시집와서 가자미식해를 처음 만났다. 명인의 시부모는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온 실향민들이었다. 시가 사람들은 이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자주 그리워했고, 그럴 때면 시어머니는 고향에서 먹던 이북 음식을 준비했다. 가자미식해는 그중 하나였다. 같은 실향민이지만 명인의 친정에서는 주로 명태식해를 해 먹었기 때문에 가자미식해는 명인에게 새로웠다.
"처음 맛을 보니 잘 익은 김치처럼 새콤하고 시원한 게 군침이 싹 돌았어요. 가자미가 비리지도 않았고요. 우리나라에 이런 음식도 있구나 했죠. 특별한 음식임을 직감한 명인은 시어머니로부터 본격적으로 가자미식해를 전수받기로 마음먹었다. 가자미 고르는 법부터 모든 과정을 엄격하게 배웠다. 가자미를 맨손으로 잡고 손질하는 것부터 힘었들죠. 갓 잡은 가자미는 끈적한 점액질이 온몸을 감싸고 있거든요. 탈염할 때는 염분이 적당히 빠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생가자미를 맛봐야 했는데 그것도 고역이었어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아 음식을 만들었다. 시어머니와 명인은 한 번에 400 ~ 500 킬로그램 씩 식해를 담가 이웃에게 나눠주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실향민들 사이에서 고향의 맛과 똑같다 고 소문이 나면서 생산량이 주문량을 못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명인은 2011년 선호식품 을 세우고 가자미식해 생산을 본격화한다. 시어머니의 도움 없이 첫 홀로서기에 도전한 것이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공장을 세웠지만, 전통의 맛은 지키려고 노력해요. 가자미식해는 계절과 재료에 따라 맛이 쉽게 달라져 수시로 맛을 보고 재료를 살피죠."
그렇게 노력한 덕에 명인은 2020년 해양수산부의 대한민국수산식품명인 으로 지정됐다. 명인의 가자미식해가 조선시대 조리서인 <산가요록>과 <주방문>에 수록된 조리법과 거의 유사하고, 명인이 가자미식해 보존에 힘쓰고 있는 점을 인정받았다.
[수산물과 농산물의 조화로운 맛]
가자미식해의 재료는 가자미 무 좁쌀 천일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이다. 가자미가 주재료인 만큼 싱싱한 가자미를 고르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10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잡힌 가자미를 사용해요. 이때 잡은 가자미가 기름지고 맛이 좋아서예요."
재료가 준비되면 먼저 가자미의 핏대와 내장을 제거하고, 토막으로 잘라 손질한 뒤 염장한다.
염장할 땐 정제염이 아닌 천일염을 써야 해요.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트륨만 남긴 정제염으로 식해를 만들면 염도를 맞추기 어렵고, 식해 특유의 깊은 맛이 안 나요. 가자미에 생기는 물기의 정도를 보며 염장이 잘됐는지 살핍니다.
가자미를 약 하루 동안 소금에 재운 뒤엔 탈염을 한다. 체에 밭쳐 소금물을 빼는데 염분이 과하면 가자미가 부패하고, 부족하면 제대로 발효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한 탈염 정도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명인은 가자미 뼈를 직접 맛보며 소금의 농도가 적절한지 확인한다.
"탈염을 한 다음엔 고슬고슬하게 익힌 좁쌀과 무, 고춧가루 등 양념을 넣고 버무려요. 재료의 배합률은 계절마다 다르게 하죠. 계절에 따라 농산물과 수산물의 익는 속도가 다르거든요."
명인의 설명에 따르면 여름에는 특히 무가 빨리 익고, 가자미는 천천히 익는다. 이 때문에 여름철엔 무와 가자미를 따로 숙성시킨 뒤 함께 섞어 버무린다. 이제 마지막 과정인 숙성만 남았다. 이 과정을 거쳐야 가자미식해는 그만의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7~10일 정도 숙성해야 양념이 가자미와 무에 충분히 배어들며 발효가 된다. 긴 과정을 통해 완성된 가자미식해를 보여주며 명인이 말했다.
"가자미식해는 밑반찬으로 먹어도 좋고 안주로 먹어도 맛있어요. 명태회처럼 냉면 위에 고명으로 올리면 쫀득한 가자미 살의 식감이 냉면과 잘 어울립니다."
[식혜 만큼 식해가 유명해지기를]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 음료인 식혜는 알아도 전통 발효식품인 식해를 모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자미식해를 제조하는 곳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젓갈 품목의 신고 현황을 본 적이 있어요. 100개의 업체가 있다고 치면 그중 가자미식해를 생산하는 업체는 4곳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대다수는 요즘 인기가 많은 명란젓·오징어젓을 주로 생산하죠. 가자미식해의 맥이 끊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명인은 요즘 가자미식해를 알리는 일에 열심이다. 올 초엔 한 대학교에서 강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가자미식해의 제조과정을 시연하고 식해를 맛보였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한번 먹어보더니 입맛에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입맛은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어머니에게서 자녀로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다만 가자미식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어 잘 모를 뿐이구나 했죠. MZ세대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가자미식해를 더 많이 알려야겠어요."
명인의 가자미식해는 온라인 쇼핑몰 선호식품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가격은 500 그램에 1만 8000원이다. 선호식품에서는 가자미식해 외에도 백명란젓 씨앗젓갈 명태회무침 낙지젓 오징어젓을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