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의 여행>
독일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합니다. 1년에 6주를 휴가로 즐깁니다. 끽해야 여름 휴가 일주일 받으면 신나하는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마치 휴가를 위해 1년을 일하는 사람들 마냥 휴가 자체를 즐기고 준비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럽은 미리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뭘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호텔과 비행기를 1-2년 전서부터 벌써 예약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가, 물었더니 답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독일 날씨가 너무 안 좋다는 것입니다. 흐리거나 비오거나 인상 팍 쓰고 있는 동네 건달 같은 날씨, 딱 우울증 걸리기 좋은 날씨입니다. 그러니 떠납니다.
둘째는 먹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자들이 독일로 관광을 와서는 저 보고 맛 있는 것을 소개해달라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딱 세 개만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쏘세지, 감자, 그리고 맥주”. 아직 온지 얼마 안되 독일 음식을 잘 알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가봐야 레파토리가 뻔한 레스토랑들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돈 모아 온갖 산해진미 가득한 태국이나 중국, 하다 못해 이태리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독일의 엄격한 법질서입니다. 이게 뭔 말인고 하니, 독일 사람들 평소에는 참 법규도 잘 지키고 무지 얌전합니다. 최소한 지켜야할 존중과 배려가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찌 인간 본성을 거스르겠습니까? 안에서는 잘 지키는 독일 사람들도 밖에만 나가면 엉망으로 놀아재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퀼른 카니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듯이, 눈치 안 보고 즐기는 ‘일탈’이 여행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재작년인가? 이태리 관광청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하도 이태리 와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독일 사람들의 이태리 관광 자제까지 읍소했다고 하니 빈 말은 아닌듯 보입니다.
뭐 어쨌든 여행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대개의 여행은 통상적으로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곳들로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공항에서 내리면 전용 버스가 착 대기되어 있고, 도어맨의 도움을 받으며 입장하는 호텔에서는 나는 그냥 나이트까운만 착 걸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 럭셔리 여행 말이지요. 먹거리와 놀거리와 볼거리가 삼위일체로 착착 들어맞는 그런 여행을 길들여지다 보면 마치 기름진 음식들이 코스별로 나오는 근사한 뷔페상을 대접 받는 기분도 들지만, 사실 그런 음식들이 좀 그렇습니다.
쉽게 물리는 법입니다. 너무 나에게 편한 위주로 맞춰진 여행을 다니다보면 사실 물리적인 장소만 이동된 것이지 평소 집에서 누리는 익숙함과 별 다른 차이를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행의 고수들은 과감히 배낭 하나 딸랑 매고 나름대로 ‘오지’라는 곳을 찾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나 네팔과 티벳의 산골마을들 혹은 터키의 가파도키아와 같은 광야를 말이지요. 이런 곳들을 여행하게 되면, 일단 내가 편하고자 하는 모든 욕심은 깨끗이 접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데서나 잘 수 있어야 하고 어떤 곳이라도 걸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전기와 전화, 온수와 냉방 등 사람을 안락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되고 단지 가장 간단한 이동 수단과 볼품없는 먹거리, 그리고 볼거리라고는 그런 곳일 수록 더욱 반짝거리는 별들 말고는 온통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그래서 사실 여행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그런 여행을 마칠 때 즈음 다시는 이런 여행을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묘합니다.
희안하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런 여행이 자꾸 더 생각나는 법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투어’로 똑같이 버스 타고 같은 것을 먹고 확자지껄 같은 놀이를 하고, 싸이판에서 하롱베이 태국의 파타야까지 두루 다녀보았지만 집에서나 거기서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나의 편리 위주로 흘러가는 시간의 연장에 불과했습니다. 재미는 있고 몸은 편했는지 몰라도 그다지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작정하고 고생하러 떠난 길에서는 반드시 배우는 것들이 생깁니다. 사서 고생하는 이유도 묻게 되고, 내가 왜 이 길을 떠나왔는지도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외로움과 침묵, 그리고 한계와 절망이 뒤범벅되다보면 그 안에서 걸러지는 것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감정이 자연의 질서 앞에 맨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잘 차려지고 잘 꾸며진 인공의 시간이 아니라 거칠지만 살아있는, 입술은 마르지만 욕망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머리가 아니라 손발로 살아내야 하는, 그 비린내 가득한 생살을 한 입 꾹 베어 물고 나면, 참 ‘나’라는 인간이 별 볼 일 없음을, 그렇게 잘난 척 떠벌리고 다녀봐야 결국 대자연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광야가 지닌 매력입니다. 잘 차려진 여행은 이런 저런 추억꺼리는 만들어줄지 몰라도, 거친 광야로의 여행은 나를 만나게 하고 나를 만들어갑니다.
사순 제1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 모두는 그런 광야에로의 초대를 받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공생활, 곧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출발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음을 보도합니다. 그것도 40일이나 말이지요.
이것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예수에게 왜 광야가 필요했는지를 물으십시오. 볼 것 없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도대체 광야에서 무슨 체험을 했던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십시오. 위험하고 척박한 곳, 모든 편리와 이기와 욕심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그곳에서 과연 그가 무엇과 대면했던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40일의 광야에서 돌아와 외쳤던 첫 일성을 기억하십시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사자후와 같은 그의 첫 외침으로 우리는 왜 성령께서 그를 광야로 내 모셨는지, 그리고 그가 광야에서 무엇을 만났으며 또 무엇을 끊었고, 또 무엇으로 거듭났는지 꿰뚫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들로서의 자기 소명,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오로지 그것만이 내 생명의 모든 것이 되어도 좋다는 자기 확신, 피할 수 없는 육체의 욕망과 유혹과 만나고 그 모두도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라는 존재를 하느님 중심으로 돌려놓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그의 광야 안에 존재했습니다.
세례자요한이 죽자, 회개를 선포하던 소리가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지상 권력의 최고봉에 의해 감금되고 살해되자 그는 드디어 그 임박한 때를 직감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살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힘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힘 만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곧 하느님께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과 복음, 하느님께서 이다지도 연약한 인간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광야의 40일을 통해 받아들이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광야는 욕망의 반대말입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편리가 차단됩니다. 광야에서는 나의 뜻과 나의 소리와 내가 세운 질서가 무너집니다. 광야에서는 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소리 그리고 자연의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삽니다. 나의 뜻과 반대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나의 욕망과 반대되는 곳, 나의 기준, 나의 고집, 나의 편리와 반대되는 모든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는 내 뜻과 다른 생명의 뜻, 독점과 탐욕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자연의 질서, 편리와 나태에 길들여진 내 육의 뜻이 아닌 영혼의 길, 곧 하느님의 뜻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은 본래 우리와 다른 분이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우리가 에덴동산을 떠나왔던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느님과 다른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나누어야 먹을 수 있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인간은 싸워야 먹을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김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던 하느님의 나라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배해야 존재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욕망보다는 자유가, 탐욕보다는 베품이, 상처보다는 치유가, 죄보다는 용서가 넘실거리던 그 나라에서 벗어나던 그 순간 인간은, 결국 저 하나의 생존과 이기에 집중하게 되고 그런 인간들이 모인 세상은 정글의 법칙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비규환을 업보처럼 짊어지게 됩니다.
미움이 시작되었고 시기와 질투, 판단과 단죄, 지배와 계급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살인이 시작되었고 방화와 전쟁은 거듭되었습니다. 때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살육과 차별을 벌이기도 했으며, 공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산 사람의 가슴까지도 갈기갈기 찢겨놓았습니다.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찰했던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격정적인 단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리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7-9)
“나의 뜻은 너희 뜻과 같지 않다.” 이 말을 명백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을 신앙하고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뜻, 우리의 편리와 우리의 이기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신앙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함께 미사하면서도 이 미사를 요식행위와 절차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제이자, 이 사순시기의 정체인 <광야>입니다. 사순이라는 이 40일은 바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광야>로 나가자는 초대입니다. 사순시기가 곧 광야의 시간입니다. 광야를 찾아 떠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광야를 떠나면서 사실 광야에 또 하나의 호텔을 짓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살던 곳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나의 일상과 아무 진배없는, 그냥 ‘다른 곳’ 말이지요. 광야를 나서면서 오만 것을 다 챙깁니다. 화려한 식탁보를 챙기고 근사한 먹거리를 찾습니다. 전화에 TV에 한국 드라마까지 꼬박꼬박 챙길 것은 다 챙깁니다. 그리고는 광야를 가서도 그것을 들여다보느라 하늘의 별 한 번 헤아릴 겨를이 없습니다. 광야에서도 바쁘고 분주하고 시끄럽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광야에 나갔으면 광야다운 맛을 좀 보아야 안되겠습니까? 광야의 맛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침묵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집중입니다. 하느님께로 집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광야이고 그것이 떠남입니다.
떠났으나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사순이 그냥 40일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에 불과합니다.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 루르 본당 공동체에게 광야라는 시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현시대에 더 이상 공간으로서의 광야를 찾아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광야는 커녕 피정 한 번 하자고 해도 오만 핑계를 다 달고, 미사 한 번 하고 기도 한 번 하자는 것도 허락받기 어려운 판국에 40일 광야를 떠나자 하면 달랑 보따리 쌀 사람 몇 안 됩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에게 광야라는 <시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 속에 광야라는 시간을 만드십시오. 물리적인 공간으로 떠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루라는 시간의 얼마만큼이라도 광야를 만드시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내 뜻과 반대되는 것을 하십시오! 편하고 싶다면 불편한 일을 하십시오! 미루고 싶다면 해야만 하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TV를 켜고 싶다면 촛불을 밝히십시오! 미움이 솟구친다면 용서를 선택하시고 나태와 게으름이 몰아친다면 하다 못해 화분에 물이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십시오.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하기 싫은 그 일을 억지로라도 해보시란 말씀입니다. 미워하기보다 사랑하고, 야단치기 보단 받아주고, 큰소리 내기보단 작은 소리로 속삭이란 말씀입니다. 험담하기 보단 칭찬하고, 독점하기 보단 나누고, 인정 받기보단 인정해 주란 말씀입니다. 내 뜻과 반대되는 것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광야의 진정성이요, 이것이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광야에서의 도리입니다. 배낭 하나 딸랑 메고 떠나는 여행길에서도 배울 것이 있는데, 사순 40일을 보내고도 남길 것이 없다면, 이 얼마나 볼품없는 신앙길이란 말입니까?
잠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광야를 만드시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광야에서 돌아와 무엇을 선포하시겠습니까?
몸의 때를 벗기는 데에도 따뜻한 물 받고 거품 풀고 이태리 타올로 빡빡 미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판인데, 어이 영혼을 때는 저절로,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밀어지리라 바라십니까? 구원은 떨어지는 감나무 아래 입만 쩍 벌리고 서있는 일도 아니고, 영혼의 때는 몸의 때보다 더 심각한 상처를 남기는 법입니다. 보십시오. 몸의 때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영혼의 찌꺼기는 죽어도 남는다 하지 않습니까? 정화와 조명의 시기가 사순의 광야입니다.
본당 청년들도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정화와 조명의 사순피정을 하였습니다. 짧은 인생이지만 저마다의 살아온 삶의 모습을 반성하며 다시금 새롭게 살아갈 결심들을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님이신 여러분들도 각자의 광야에서 여러분 각자의 피정과 각자의 성화들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의 말씀으로 루르 한인 성당 공동체의 사순을 선포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 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선택하여라.”(신명 30,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