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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암역사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대호
‘항일 건국 민주화의 선구자’, 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 학술토론회...기념사업 성공적 추진 기원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 낭산 김준영 선생 기념 학술토론회 개최
김지향 등 유가족 및 신경식 헌정회장, 이철승 헌정회원로회의의장, 유인학 낭산기념사업회회장, 황주홍 국회의원, 김양수 영암군부군수, 김한남 영암문화원장 등 200여명이 참석
발제자 오수열 조선대교수, 토론자 이성근 전 배제대교수,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소교수, 정미량 한국학중앙연구소교수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 독립운동 앞장, 언론의 선구자, 일장기 말살 사건, 항일민족독립, 반공반탁투쟁, 민주한국 건설, 자유민주주의 민주화 투쟁, 헌법제정 기로, 법질서 확립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한 평가다.
낭산 김준연 선생(1895.3.14~1971.12.31)
낭산 김준연 선생(金俊淵,1895년 3월 14일~1971년 12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또한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ML파의 중요 인사였다. 독일 베를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결성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다 1928년 동아일보로 옮겼다.
해방 후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에 가담했으며 1948년의 대한민국 단독 정부수립에 지지를 보냈다.
민주국민당 1954년 호현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친여 인물로 분류되어 비판을 받던 중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 1961년 5월과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과 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5년부터 2년간 조선일보의 기자와 주러시아 특파원 등으로 활동했다.
금년 낭산 선생 탄신 120주년이고 한일 수교 50주년임을 맞아 지난 23일(금) 여의도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유족, 낭산기념사업회, 정치인, 문화인, 예술인, 종교인, 향우, 고향사람, 사회단체 등 200여 명을 모시고‘항일 건국 민주화의 선구자’주제로‘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헌정회, 영암군청’이 후원한‘낭산 김준연 선생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 기조발제자로 유인학 기념사업회회장을 비롯해 주제발표로 나선 오수열 조선대교수(한국동북아학장), 토론자로 나선 이성근 전 배제대 총장,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정미량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등 한국 최고의 전문가가 낭산 김준연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업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자리에 낭산 김준연 선생의 둘째 딸 김자향(96), 셋째 딸 김자선(90), 외손녀 조미경(77), 외손녀 이희주(62), 외손자 김승훈(55), 외손녀 사위 소순무(65) 등 유가족과 신경식 헌정회장, 이철승 헌정회원로회의의장과 황주홍 국회의원, 박희태 전 국회의장, 정대철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유경현 전 국회의원, 조기상 전 국회의원, 안동선 전 국회의원, 서병구 전 국회의원, 유재필 전 국회의원 등 여러 전 현직 의원과 이경동 한국문화협회 총무원장과 김양수 영암군부군수와 유재필 유진그룹회장과 영암역사연구회 회원 및 향우와 영암에서 올라온 영암군 신태균 전 문화원장, 김한남 문화원장을 비롯한 낭산기념사업회 회원, 군인 및 최재갑 영암군노인협회장 및 군민 80명 등 200여명이 토론회를 지켜봤다.
토론회는 개회사, 축사, 기조발제, 주제발표, 토론, 만찬 순으로 진행됐다.
첫 축사에 나선 신경식 헌정회장은“먼저 낭산 김준연 선생을 추념하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하여 참석하신 귀빈들 특히 따님 김자향 여사를 위시한 유족들에게 심심한 추도의 뜻을 올린다”며“낭산 선생은 천재 엘리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또는 언론인으로도 선구자였고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라면서 훌륭한 선배님께서 나라를 바로잡은 것에 대한 늦게나마 낭산 선생의 큰 뜻을 세기는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토론된 내용들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이철승 헌정원로회의의장은 낭산 선생에 대한 약력과 발자취를 소개하고 더듬어보며“낭산 선생은 제헌위원으로서 헌법기초하고 제정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공을 세웠다”면서“낭산 선생은 반탁운동에 동참하였고 민족의 독립 및 건국과 자주민주의 확립을 한 그 뜻을 받들고자 한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황공하고 또 빌어 맞이하며 기념사업회가 잘 추진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정대철 상임고문은 축사를 통해“낭산은 선친인 정일형 박사와 인연이 깊고 저 역시 낭산 선생과의 정치 선후배사이로서 각별하다”면서 낭산 김준연 선생과의 인연과 발자취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이어“낭산 선생은 참된 언론인, 항일운동, 반탁투쟁, 헌법기초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인물이라”며“낭산 선생은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조선일보 주가를 올린 분으로서 반공주의자고 헌법을 만드는데 나의 꿈이네 할 정도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한 분이고 또 낭산 선생은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으로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다 독재자다 라고 외칠 정도로 민주화를 위해 크게 노력한 분이라”고 축사를 통해 평가했다.
또한 황주홍 의원은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며“대학원 논문을 쓰기 위해 국회도서관에서 신간회에 대한 자료들이 담아져있는 마이크로필름을 열람해보니 사회면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낭산 김준연 선생이었다”며“이렇게 많이 낭산 김준연 선생의 활동에 대해 비중 있게 보도되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나라에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걸 그때 알게 됐었다”면서“이번 토론회가 자랑스러운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해 빛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영암군 전동평 군수를 대신해 참석한 김양수 부군수는“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 학술토론회를 위해 발제자 및 토론자 그리고 참석한 유가족 여러분 및 경청하기 위해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낭산 김준연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또는 헌법을 기초한 5선의원로서의 영암의 자랑스러운 인물이고 낭산기념관과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조국이 있다는 낭산기념관이 역사의 장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서“토론회가 낭산을 기리는 뜻 깊은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김준연
-제1대 한국민주당 1948.5.31~1950.5.30 영암 일원
-제3대 민주국민당 1954.5.31~1958.5.30 영암 일원
-제4대 통일당 19.58.5.31~1960.7.28 영암 일원
-제5대(민의원) 통일당 1958.7.29~1961.5.16 영암 일원
-제6대 자유민주당 1963.12.17~1967.6.30 영암 강진 일원
또한 낭산 김준연 선생의 외손녀인 조미경 아주대교수는“바쁘신 와중에도 신경식, 이철승 그리고 박희태, 정대철 등 여러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며“박희태, 박상천 두 정치인은 명대변인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없어 한이 없었는데 학교동창인 두 분이 아들 못지않은 역할을 해줬고 또 외할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나선 정대철 상임고문과 기념사업회 유인학 회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특히 유 회장이 기념관과 생가복원에 기틀을 마련한데 대해 감사드리고 그리고 영암이 먼데 마다하지 않고 전동평 군수를 대신해 올라온 김양수 부군수를 비롯한 김한남 문화원장 등 모든 영암 분들께도 또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낭산 김준연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항일 건국과 민주화의 선구자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첫 발표자로 나선 유인학 기념사업회장은“낭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특히 금년은 낭산 선생 탄신 갑자년(甲子年)인 120주년(1895년 3월 13일)이고 고향 영암에 낭산 기념관이 3년 전에 완공되어 이제는 낭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여 우리 후손들이 그분의 시대를 앞서 치열한 사상과 생애 그리고 업적을 본 받아야하기 때문에 오늘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낭산 선생에 대한 평가에서“첫째 낭산 선생은 당대 최고의 명문대학 외국 유학까지 간 수재로서 일제의 끈질긴 회유를 물리치고 일신의 영달과 평안을 멀리하고 항일 반독재투쟁을 하신 민족적 지도자였고 둘째는 낭산은 당시 최고의 학벌로 특히 동경대와 베를린대를 나온 최고의 지성인으로 신간회와 일장기말살 사건 등 독립운동 앞장, 조선일보 소련 특파원으로 소련 공장현장 생생한 보도, 사회주의 ML당 책임비서(당수)로 7년간 옥고 후 동아일보에서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 등 민족주의자들과 우익진영 전향해 사회주의의 진영에선 부정적 평가하며 민족진영 역사적 결단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으며 셋째는 조선조 몰락, 항일운동, 남북분단, 대한민국의 건국, 자유당독재에 저항한 지성인 또는 청렴결백한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애국자이자 한국적 청렴한 지성인의 표상으로서 또는 선비로서 자리매김해야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낭산 김준연 선생 학술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오수열 조선대교수는 1962년 전남 장성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따라 영암 덕진면 영리로 이거하여 6년간 살았는데 동내 앞에는 꽤나 넒은 들이 있고 들녘 한가운데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갈라산이라고 부르는 산에는 김해김씨 도성공파인 낭산의 선조들이 모셔져 있었으며 시제를 지낼 때 참석한 낭산을 먼발치로 보기도 하였고 낭산의 선조묘소가 있었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낭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소년시절을 보냈고 광주로 이거함에 따라 관심도 옅어지다가 후일 정치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낭산에 대한 관심이 재기되어 논문을 쓰게 됐다고 했다.
낭산에 관한 자료를 챙기고 검토하면서 다른 정치인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볼 수 있었다면서 첫째는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둘째는 그의 삶 자체가 곧 사리사욕(私利私慾)과 거리가 먼 반독재투쟁, 즉 민주화 운동을 한 애국자(愛國者)이었다. 셋째는 부정부패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평생을 견지해온 청렴성이었다는데 낭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발제자로 나선 오 교수는‘낭산의 출생과 성장’을 프로젝트를 통해 더듬어봤고 낭산이‘일제치하에서의 활동’을 살펴봤으며‘해방 후의 활동’에 대해서도 깊이 파악했다. 그리고‘낭산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도 조사해봤다.
오 교수는 낭산은 그의 뛰어난 지적능력이나 일제시대의 활약상에 비하면 높이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고 낭산처럼 곧고 직설적이며 어찌 보면 단순하기 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가 1946년 민주의원, 1948년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제4.5.6대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민주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기적이라고 봤다. 이 모든 것이 고향인 전남 영암군민들이 그의 능력을 인정, 고향사람들의 지지와 기대에 대해 일생동안 조국에 대한 헌신과 청렴한 생활로 보답하려고 노력한 분이었다고 낭산 김준연 선생의 인품을 높이 샀다.
그리고 낭산 선생은 뛰어난 수재자였다며 낭산이 천자문을 다 배울 무렵 강진에 사는 이모부께서 낭산에게 천자문을 거꾸로 읽어보라고 하자 낭산은 한자도 틀리지 않고 읽음으로써 주의를 놀라게 하였는데 훗날 주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낭산의 뛰어난 기력은 이미 어릴 때부터의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낭산은 14세 때까지 사략(史略), 통감(通鑑),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시전(詩傳) 등을 공부하였고 14세 가을에는 영암보통학교 보습과에 입학하여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낭산은 5.6학년을 공부한 후, 즉 2년을 다녀 당시 최고의 명문인 한성고등보학교에 입학 하여 8등으로 졸업한 후 동경대학을 가기 위해 오까야마 고등학교에 진학해 동양 최고의 대학인 동경대학 독법과를 나왔으며 낭산은 독일과 일본이 친교가 길어질 때 독일 베를린대학 장학생이 되어 법학석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는 물론 동양 또는 세계의 최고 명문학교에서 수학을 하는 수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고찰하면서 그런 훌륭한 인물이기에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그에 대한 연구논문을 쓰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첫 토론자로 나선 이성근 전 배제대학교총장은“다른 분들처럼 만나보거나 가까이 한 적은 없지만 낭산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낭산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됐다”며‘낭산 선생의 일본 유학시절과 독립운동’에 대해 고찰했다.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는‘오수열 낭산 김준연의 생애와 정치사상’에 대한 논평문을 내며“낭산 김준연 선생과는 인연이 많다 가까이서 지켜봤고 그의 생과 발자취를 생생하게 알고 있다”고 낭산을 회고했다.
세 번째 토론자로 나선 정미량 한국중앙연구원 교수는‘낭산 김준연의 일본유학시절의 문화운동’의 논문을 내며 그에 대한 사상, 활동, 역사적 의의 등을 알렸다.
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게제 된 신문을 복사해 와 펼쳐들며 그 때 실린 기사와 사진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상세히 설명해주며“당시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낭산 김준연 선생을 다뤘다”면서 낭산의 큰 활약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리고 발표논문집을 통해‘낭산 김준연의 유년시절과 민족의식’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부록으로 다뤄났다.
그밖에 유경현(순천) 전의원은 낭산에 대한 인연을 들려준 후 낭산 인물평에 대해 요약하기를“낭산은 의지가 강하다”.“낭산은 의리가 대단하다”.“낭산은 문필이 뛰어나고 용기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낭산은 세계화를 주창한 선각자다”.“낭산은 청렴한 사람이다”라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럴 때마다 방청객에서는“그렇습니다”.“뛰어납니다”.“맞습니다”.“훌륭합니다”라고 맞장구쳤다. 유 전의원은“대한민국의 위대한 인물 낭산 김준연 선생을 우리 마음속에 영혼 속에 간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조기상(영광) 전의원은 동아일보에 있을 때 낭산과의 인연을 들으면서“낭산은 문필력이 뛰어났고 특종을 잘 다뤘던 용기 있는 언론이었고 낭산은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를 했을 뿐이지 절대 공사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어“낭산 김준연 선생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직접 체험하고‘옳소’하는 무조건적인 찬성을 한 공산주의 실태, 즉 다양한 의견과 사고를 반영하는 민주적 토론과 사회의 이념적 다양성이 실현되지 못한 '제한적, 일방적, 독단적, 강요적' 인 비민주적인 공산주의 방식과 실태에 회의감을 갖고 개탄스럽게 생각하며 국내 신문 등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리는 등의 반공에 앞장선 인물이었으며 또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기사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등 낭산 김준연 선생의 민주정신과 애국정신을 높이 받들고 그의 뜻을 잘 이어가자”고 말했다.
조 전의원은 "낭산의 반공반탁 정신은 불통과 오만으로 가득찬 독선적이고 일방적이고 강요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공화국에서도 독제정치에 반기를 들며 일방적인 추진방식이 아닌 국민이 주인인 국민을 존중하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등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는 일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투철한 철학과 소신이 뚜럿하고 올곧의 정신자세로 일관하며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 나라를 위해서 앞장섰다" 고 봤다.
또한 유재희(영암 금정) 전 국회의원도 낭산 김준연 선생의 업적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그의 뜻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랐다.
낭산기념사업회 유인학 회장은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한 남은 과제들을 들으며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을 들었다. 또한 낭산 기념관 활용과 보완을 제시했다.
1992년에 낭산 김준연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1995년에는‘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을 출판해 1996년에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음을 밝히며 영암군의 노력으로 영암에 나름대로 품격을 갖춘 낭산기념관이 건립되어 완공됐다고 설명했다.
유 회장은“이제 남은 과제는 낭산의 유고집과 자료집을 출판하고 유품을 잘 정리하여 기념관에 잘 보관하는 일이라”며“무엇보다도 위 출판한 전기를 객관적 진실에 입각 수정하여 보다 더 완벽한 정정판을 출판하는 일이라”고 정정판 발간 준비상황을 알렸다.
현재 기념관에 대해서는“낭산기념관이 위치한 곳은 영암읍내의 체육관 앞 월출산 자락의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기찬랜드’등 위락시설과 연결되어져있다”며“이곳을‘민족공원’으로 가꾸어 영암의 동학혁명,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의 열사와 한국전(6.25)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희생자들을 기념한 기념성역으로 건설하여한다”고 방안을 내났다.
그리고“이 주변은 여러 기념 위락시설이 있으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선열과 기념시설이 모아져 올바른 민족과 인성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 즐기고 노는 위락시설보다는 중요한 사업이므로 이를 강력히 추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낭산기념관이‘민족공원의 중심’이 되어야 영암의 정신이 바로 선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유 회장은“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한 하드웨어적인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거의 끝나가는 상태라”며“내년에는 전기집 수정을 거쳐 낭산 정정판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어적인 바탕으로 낭산에 대한 위업과 정신을 승화시키고 그 가치를 높이 살 수 있도록 낭산을 빛내는 일에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영암에 낭산을 기리는 낭산기념관을 조성해났는데 안타깝게도 기념관이 평일에는 거의 문을 닫아 놓은 상태여서 기념관조성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회장은“평일에 가보니 문이 닫아져있어 발길을 돌려야했는데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해설사가 평일에는 사람들이 없어 주말에 나오고 있어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고 기념관운영에 분노가 치밀었다”면서“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써 365일 개방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유 회장은“현재의 영암군민은 물론 국민들이 낭산 등 독립건국 투사들을 잊고 있다”며“기념관을 365일 개방해 우선 젊은 학생들을 위주의‘낭산교실’을 개설, 낭산의 위업과 정신을 교육시키는 현실적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한다”고 강조했다. 또“이 교육과정은 비단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확대 되어야한다”고 주문했다. 낭산기념관을 자라나는 청소년 등 젊은 세대들에게 낭산 정신을 깨닫고 이어받아갈 수 있도록 낭산기념관을‘학습교실’로 운영 될 수 있도록 하자”는 유 회장의 간절한 바람이다.
유 회장은 낭산 김준연 선생에 대한 토론회가 정정판 발간에 앞서 월말쯤 한 번 더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울에서는 '영암역사연구회(회장 조복전)' 가 있다. 역사연구회는 분기마다 모임을 갖고 영암에 역사에 대한 학술토론회 및 연구발표를 한다.
영암역사연구회 조복전 회장은 영암연구회 참여나 협조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로써 영암에 대한 사랑과 역사의 지킴과 계승 및 보존.보전에 대한 것들이 의무라 생각하며 이런 일들이 몇사람의 일이 아닌 모든 영암사람들이 나서야할 일이라면서 영암역사연구에 다같이 동참하자고 했다. 아울러 뜻 있는 분들의 협조와 협력정신을 발휘해 달라며 영암역사연구회가 영암의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보전하는데 좀이리마 힘이 될 수 있도록 자료수집, 역사탐방 및 발굴, 연구전념, 연구발표 및 학술토론 등에 추진 및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후원과 참여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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