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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신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신자가 됩시다.
생명의 양식(진리의 복음)을 등한히여기면, 사탄에게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롬8:31-39절) 하나님은 나의 편
얼마 전 생각지도 못한 병(病)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한 교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병(病)때문에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앞으로도 더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끝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내 편이신 것을 믿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그러나’라는 한마디 말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당장 죽을 것 같고, 당장 망할 것 같아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중요한 것은‘그러나’입니다.
겉으로 보면, 완전히 망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는 평안이 있고, 이 병이나, 어려움이 나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이길 것 같은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하는 말이‘그래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는 고백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자 말자 이 세상의 복이란 복은 다 받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친다면, 우리에게는‘그러나’라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자 말자 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으로 변한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많은 시련(試鍊)들이 닥칩니다. 이때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런 시험(試驗)들을 이기고,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축복의 삶을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속에 물론 불안과 두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의 모든 불시험(試驗)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상(思想)이나, 종교(宗敎)를 택(澤)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익(有益)이 되고, 플러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상(思想)이나 종교(宗敎)를 택(澤)했는데. 망하게 되고, 심지어는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면, 아마 골수분자(骨髓分子)나 맹신자(盲信者)가 아니면, 아무도 택(澤)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기독교를 택(澤)했는데,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재산(財産)을 빼앗기고, 심지어 죽어야 한다면, 아무도 기독교를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엄청난 핍박(逼迫)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많아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예수를 버리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그들이 당당한 것은‘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하나님은 내 편이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어떤 환난과 핍박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고백과 찬송이 나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예수 믿는 자들에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시험(試驗)들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어떤 끔찍한 시험(試驗)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시험(試驗)들을 다 이기고, 승리(勝利)한다는 것입니다.
Ⅰ.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어려움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결국‘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만드시고. 또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들을 죽게 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려 있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이 채워지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試鍊)들이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닥쳐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남들은 당하지 않는 어려운 시험(試驗)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사업(事業)에서 크게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 중의 하나가 불치(不治)의 병에 걸려서 초비상(超非常)이 걸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귀(魔鬼)의 사주(使嗾)를 받고 믿지 않는 악(惡)한 정권(政權)과 방만경영(放漫經營)을 만회(挽回)하고 성과금(成果金)에 눈이 어두운 토개공으로부터 전 재산(財産)을 빼앗기고. 예배를 방해하고. 심한 반대와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교회가 코로나 재앙의 발원지(發源地)로 오해(誤解)하고. 대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일이 일어나 연약한 교인들이 신앙을 버리고. 교회들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히 하나님의 주권영역(主權領域)을 침해(侵害)하는 사악(肆惡)한 행위로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祈禱)하고 인내(忍耐)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怨讐)갚는 분은 하나님*(롬12:19)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 심판(審判)이 *심은대로 악인(惡人)들에게 부메랑(boomerang)으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어려움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8:31절)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대적(對敵)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36절)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도살(屠殺)할 양’의 처지가 어떤 것일까? 이제는 꼼짝달싹 못하고, 죽을 시간만 기다리는 불쌍한 양(羊)입니다. 즉 이 세상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자기 힘으로 양(羊)의 우리를 탈출(脫出)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바로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나 혼자만이 어려움을 뒤집어쓰고, 꼼짝달싹 못하는데, 완전히 온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데, 나 혼자만 어려움이 닥쳐서 점점 더 깊은 고난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단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는 어려움이 와야 할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모른다.*입니다.
이것은 왜 이 세상에 태풍(颱風)이 불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실(溫室)안의 화초(花草)처럼, 과잉보호(過剩保護)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온실(溫室)밖으로 끌고 나오셔서 바람도 받게 하고, 서리도 받게 하고, 태풍(颱風)에도 견디게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들을 고난(苦難)의 학교(學校)에 집어넣으십니다. 물론 예수를 믿자 말자 그렇게 하시면, 대개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앙이 자라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모세입니다.
모세는 청년이 되었을 때, 자기 민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하다가 결국 애굽의 감독관(監督官)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도피(逃避)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苦難)의 학교(學校) 학년들은 대개 일학년부터 40년까지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럼 고난의 시기(時期)에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 우선 당장도 어렵지만, 미래(未來)를 전혀 예측(豫測)하거나 계획(計畫)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미래(未來)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풍족(豐足)하게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이 풍족(豐足)해서 좋은 옷도 입고, 좋은 차(車)도 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사는데, 나는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매끼니 채워주시고, 그것도 절대로 많이 주시거나, 미리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福)을 주시는 것에 굉장히 인색吝嗇)하시거나, 하나님을 능력 없으신 분으로 오해(誤解)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움을 두고, 기도할 때, 잘 응답해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나중에 고난의 때를 통과했을 때는 기도를 잘 들어 주시는데, 고난의 때는 마치 나에게서 얼굴을 돌이키고 싫어하시는 것처럼, 기도응답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사람으로부터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데,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 못하고, 힘이 있는 자 혹은 권력(權力)을 가진 자로부터, 무시(無視)와 천대(默想)와 심지어 육체적(肉體的)고통까지 당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시편 기자의 말을 많이 묵상(默想)하게 됩니다.
시42:3절)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또 8:36절)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신앙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믿는 것이 후회가 되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예수 믿는 것이 하나도 후회되지 않고, 전혀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분명히 겉으로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없이 퍼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더욱 행복하고, 감격스럽습니다.
롬5:3-5절)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환난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노천탕(露天湯)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가끔 온천(溫泉)에 가보면 노천탕(露天湯)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밖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어느 때는 눈이 오기도 하지만, 탕 안에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얼굴이 시원하고, 전혀 춥지가 않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환난을 당할 때는 어려움만 오는 법이 없습니다. 어려움과 함께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퍼부어지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이 사람은 어렵고, 비참한데 마음속은 오히려 영광스럽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어떤 자신감이 생기게 될까?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과연 어떤 시험이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Ⅱ.성도의 운명을 누가 결정하느냐?
큰 환난 중에 빠진 성도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사람의 힘으로 쉽게 건져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은 돈을 쓰든지, 빽을 쓰든지 하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돈으로도 안 되고,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 하나는 얼마나 불쌍한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굼벵이나, 벌레처럼 약(弱)하기 때문에 누군가 조금만 힘으로 눌러도 터져서 죽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환난에 빠진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힘없는 신자의 보호자(保護者)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8:31절)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힘없고, 가련(可憐)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전적(全的)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큰 시험에 빠진 것이 나의 무능(無能)때문이고, 미련함 때문이고, 판단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미디어 시대(時代)에 나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큰 시련에 빠져서 온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고, 꼼짝달싹 못하고, 고생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학대(虐待)하거나, 원망(怨望)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고생과 경제적(經濟的) 어려움의 원인은 나의 잘못보다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시는 사인(私印)입니다. 결국 어려움에서 벗어날 때도 100%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어느 정도 우리를 후원(後援)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8:32절)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고난 당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느끼는 감정(感情)은 참으로 나를 복(福)주시는데, 인색(吝嗇)하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축복(祝福)하시는 것을 아까워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귀찮아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절대로 인색(吝嗇)한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인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앙적으로 훈련(訓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먹을 것이나, 돈의 여유가 두둑한데, 어떻게 훈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훈련(訓練)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되고, 어려워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양반집 자녀들이 훈련(訓練)받는 것을 보면, 어려운 일은 종(從)들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즉 매를 맞을 때도 양반 자제(姊弟)들은 매를 맞지 않고, 종(從)들이 대신 맞았습니다.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훈련(訓練)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그런 식으로 훈련(訓練)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이키시고, 엄살(掩殺)을 부리는 기도는 아무리 해도 듣지 않으시고, 가져가실 때는 확실하게 가져가셔서 벌거숭이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하게 하실 때도 부르짖으면서 온 힘을 다하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정도 되였다고 판단되실 때, 모든 것을 주십니다.
하나도 아낌없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원(願) 없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연단(練鍛)하시는 목적은 한없이 축복(祝福)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미리 축복하시면, 그 축복(祝福)으로 인해 교만(驕慢)해져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 버립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너무나도 많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리 연단(練鍛)해서 아무리 복(福)을 부어주셔도, 타락(墮落)하지 않도록 만드시고, 복(福)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난당하는 성도의 운명(運命)을 누가 결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권력(權力)을 가진 자도 아니고, 마귀(魔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허락(許諾)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못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성도들을 살피실까?
8:34절)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24시간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지키면서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를 병원 측에서는 24시간 잠도 자지 않고, 혈압이나, 체온이나, 다른 여러 가지를 체크(check)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가장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기 때문에 풀이 죽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환란 때가 더욱 당당합니다. 왜냐면 환난이 자기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온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8:33절)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환난이 찾아왔다고 기(氣)가 죽거나, 죄책감(罪責感)을 느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단지 돈이 없어서 큰소리를 칠 수 없을 뿐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인 것 같지만, 아무리 세상이 주위를 틀어막아도 하늘이 뚫린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욱 담대하고, 당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치면서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Ⅲ.넉넉히 이기느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난에 빠졌을 때,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까지 비참하게 있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두려움입니다. 또 하나는 죽는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결국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도 부인(否認)하고, 주님도 부인(否認)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불안한 것이‘만약’입니다. 즉 나는 지금 철저하게 하나님만 믿고, 기다라는데,‘만약’끝까지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너무나도 비참(悲慘)하게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마귀(魔鬼)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의 귀에 자꾸만 이런 말을 불어넣습니다.‘바보야! 이럴 때 하나님만 믿고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라!’
복음서에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會堂長)의 딸이 병들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懇請)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빨리 가시지 않고, 다른 여자를 고치는 바람에 그 아이가 죽어 버렸습니다. 회당장의 마음에는 차라리 이렇게 죽을 바에야 예수님을 기다리지 말고, 다른 의사(醫師)를 찾아가는 것이 더 나았을 뻔 했다는 후회(後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에서‘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만약’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만약’이지만, 하나님에게는‘반드시’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어려움이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끝이 다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초인적(超人的)인 힘을 다 모아 끝까지 인내(忍耐)해야 합니다.
8:35절)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본문 말씀을 보면 어려움이 왔을 때, 마귀(魔鬼)가 우리에게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이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빼앗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만 있다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려움이 오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통째로 부어지기 때문입니다.‘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환난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그리스도의 사랑이 의심(疑心)이 될 때도 있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금방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미스터리(mystery)입니다.
여기서 곤고(困苦)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병(病)이나, 다른 것으로 육체가 고통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迫害)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또 기근(饑饉)은 굶는 것입니다. 자기만 굶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굶는 것입니다.
또 적신(赤身)은 옷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옷을 빼앗겨 버릴 수도 있고, 옷을 살 돈이 없어서 벗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危險)은 공포입니다. 폭력(暴力)의 공포나, 협박(脅迫)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랑이 죽음 앞에서 사람을 참으로 담대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침착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죽어도 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8:37-39절)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경의 위대한 약속(約束)은 믿는 자들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환난이 우리를 삼켜버릴 것 같고 망하게 할 것 같지만, 결국 넉넉히 이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정금(正金)과 같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점수가 많이 남아서 여유 있게 입학하는 학생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커트라인(cut line)에 걸려서 아슬아슬한 학생은 부모나, 학생 자신이 그렇게 가슴이 조릴 수 없습니다.
또 운동 경기를 할 때도 월등하게 실력이 좋은 팀은 시종일관(始終一貫)여유 있게 경기를 주도하면서 이길 것입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지 않은 팀은 아슬아슬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경기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넉넉하게 이길까?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이길까?
실제로는 아슬아슬할 뿐만 아니라, 거의 이길 수 없는 경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만 그럴 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强)해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무한정으로 우리 안에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길 때는 전혀 아슬아슬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넉넉하게 이기게 됩니다.
이 말씀을 많은 영어 성경에는‘정복자처럼 이기느니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난이나, 시련을 정복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경기하는 팀을 보면, 처음에는 손발도 잘 맞지 않고, 미숙하게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잘하는 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점점 더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망할 것 같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갈수록 더욱 여유를 가지게 되고, 곧 지혜롭게 되어서 나중에는 월등한 실력으로 시련을 이기게 됩니다.
여기서 성경은 확신(確信)하고 있습니다.‘내가 확신하노니’무엇을 확신(確信)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즉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 등등입니다.
우리는 죽는다 해서 공포(恐怖)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혹 우리가 산다고 해도 교만(驕慢)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사이란 물론 악(惡)한 천사겠지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만큼은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가져가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앗지 못합니다. 또 권세자(權勢者)들이 아무리 조롱하고 위협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습니다.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만 붙들고 있으면, 어떤 시험이 와도 다 이기고 영광스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魔鬼)는 우리에게‘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지 않으냐?’고 말합니다. 물론 다니엘은 사자(獅子)굴에서 살아 나왔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뱃느고는 용광로(鎔鑛爐)에서 살아 나왔지만, 살아 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패배(敗北)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순교(殉敎)의 제물(祭物)로 바쳐진 자들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믿는 자들에게 환난과, 시련(試鍊)이 오지 않을 수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환난당하는 것을 가장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으로 연단(鍊鍛)받지 않으면,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언제나 교만(驕慢)하고, 부패(腐敗)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苦難)은 백신(vaccine)주사(注射)와 같습니다. 주사(注射)를 맞으면, 조금은 아프지만, 결국 병(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은 잠시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아프게 하지만, 영원히 죄와 교만(驕慢)을 이기고,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祝福)가운데 있게 할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 중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절)
site/Kakao 선교회 안내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운 가정과 영생을 위하여
대상 : ▷불신자 ▷개종자 ▷코로나시대 바빠서 교회출석 못하는 자 자발적인 전화 신청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영생 받고 사망 후 천국 가길 원하는 자. 즉▷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종교인에서 주님의 제자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불 땔감에서 천국 맨션(mansion)을 원하는자.
물론 각자 의지와 기질과 순종여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21:8절)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기본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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