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유감
--------------------------------------------------------------------------------
매우 오랜 만에 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을 보았다.
지방 특히 고향 쪽을 가끔 갔지만 대부분 서둘러 다녀오다 보니
논밭을 볼 겨를이 별로 없었고, 지나더라도 보리 익을 무렵 아닌 때가 많았다.
얼마 전 보리가 한참 익어가는 고향 부근 남도지방을 지나면서
마침내 누릇누릇 물들어 가는 보리밭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밭을 막론하고 자라다 만 것처럼 보리들의 키가 작았다.
예전에는 가슴께에 올라왔는데 지금은 한결같이 무릎에도 한참 못 미쳤다.
동행한 고향친구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제대로 짓고 말려면 말지 왜 저렇게들 했지? 묵은 밭도 아니고...
” 친구가 한참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내 질문의 진정성(?)을 파악하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보리가 익거나 가실할 무렵 거센 비바람에 쓰러지면
농사 망하는 판이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래 키를 작게 한 개량종을 개발해
지금은 모두 그걸 심는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보리농사를 했고,
수확기에 비가 오면 쓰러진 보리 세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기에 얼른 알아들었다.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득 두 가지가 떠올랐다.
먼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느라 보리밭에 들어가 남의 농사 망치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게 됐다. 그런 일을 이제는 볼 수 없겠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하긴 농촌에 풋사랑을 속삭일 젊은이들이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고,
또한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널린 게 모텔이니 보리 키가 예전처럼 크더라도
그런 용도는 이미 끝난 것이다.
두 번째는 윤용하의 가곡 ‘보리밭’.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으로 시작되는데
지금 보리밭은 예전과 다르니 그때 보리농사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문제가 좀 있지 않을까.
이 노래의 가사를 작사한 박화목은 ‘그의 고향(황해도) 보리밭에 봄바람이 불면
사뭇 바다처럼 물결 치고, 아늑한 하늘가에는 종달새 지저귀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종달새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고, 발목을 간신히 넘을까말까 한 키의 보리밭
사이도 걸을 수 없게 됐으니 고인이 된 작사, 작곡자들이 이를 알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
하늘이 무너지면 어떡하나하며 밤마다 잠을 못자는 기(杞)나라 사람 같은 걱정이나 한다고
누가 비웃을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아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첫댓글 우리네님 다시 옮겨 놓았어요.^^*
우와~~~ 환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