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왜 본인이 World City란 개념을 중시하는가 말하겠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George Modelski의 저서 <World Cities>에 의하면 World City란 사회구조상 복잡성(Complexity)을 지니고 있는 도시들을 의미한다. 그는 Lewis Mumford를 인용하여 도시란 “통합된 사회적 관계의 실체와 상징”이며 “사원과 시장과 법정과 학원이 놓여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설들로 인하여 이 도시들은 하나의 허브(Hub)가 되며 “이 도시들은 광대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의 중심지가 되며 (사회적인) 하드웨어와 뼈대를 형성하여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맺음이란 <피와 살>로 둘러싸인 실체가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 이 도시들은 광대한 지역을 통합적인 “세계”로 정리할 수 있는 체제의 중심지가 된다.
아래의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한 지역에 많은 인구가 몰리면 이를 지탱하기 위한 인구가 필요해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주변에 “위성”격인 도시를 형성한다. 그 지역을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의 허브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대 수메르에서도 나타났고 바빌론에도 나타났고 인도, 로마, 중국, 동남아, 심지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없이 생겨났다. 사실 Modelski는 서양사의 관점에서 이를 보기보다는 ‘도시’라는 실체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일반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World City란 개념을 도출해냈기 때문에 이는 어느 한 곳에 적용되고 안되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실제로 Modelski는 이를 위하여 세계사를 “고대(Ancient)” “고전시대(Classical age)” "근현대(Modern era)"로 나누고 각 시대마다 나타난 도시들의 인구를 계산하였다. 최초로 “도시”란 실체가 나타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하여 근동, 동아시아, 유럽, 아메리카등지에서 존재하였던 소위 세계도시(이는 바꿔 말하면 중요한 중심도시<Important Urban Center>란 말이다)들을 모두 망라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에 모델스키의 이론은 ‘도시’의 발전연구에 가장 중요한 ‘일반이론’중의 하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제국은 어떠한 지역을 점령하면 주요한 성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형성하여 광역지배를 실현하려 한다. 도시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고 빨아들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고대와 현대의 도시간에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육상교통의 차이이다. 내연기관에 의한 차량과 잘 정비된 도로에 의한 물류활동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현대에서는 도시간의 거리가 중요하지 않지만 고대에서는 하나의 인구밀집지역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후생산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에 많은 하급 도시가 ‘위성’으로 형성이 된다. 현대에서는 도시집합(Agglomeration)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시가 커지면서 다른 도시의 시가지와 연결이 되어버리거나 주변 지역을 아예 도시의 권역으로 편입해버리는 수가 많다. 지금 서울 강남의 많은 지역을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아울러 서울과 부천과 인천은 행정적으로는 분리되어있지만 실제로 제 1경인고속도로를 달려본 사람이라면 고속도로의 시작점부터 끝까지 시가지로 이어져 있음을 익히 알 것이다. 이것이 고대의 위성도시와 현재의 Agglomerated City와의 다른 점이다.
어찌되었건, 물류수송의 문제로 돌아가서...거의 인력으로 모든 것을 날라야했던 고대에서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주변의 위성도시와 상부상조하면서 일종의 교류시스템을 형성한다. 이러한 예는 많은 고고학적인 예로 쉽게 확인이 된다. 이전의 글에 언급한 古푸에블로 문화에서 주도(主都)라 할 수 있는 푸에블로 보니토도 그 주변에 수개의 ‘도시’를 거느리고 그 거대한 사원(Kivas)을 주변의 도시에서 오는 순례인들의 공물(供物)로서 유지하였다. 마야문명도 남부 저지대(Southern Lowlands)에서는 티칼이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나의 광역경제권이 형성되었다.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자립성’ 교류시스템의 크기가 작던가 아니면 독립된 세력으로 남아있는 수가 많다. 수메르나 아테네가 그러한 예인데, 그 이유는 수상물류활동은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품을 저렴하게 실어나르는 것이 가능하여 주변 도시들에 의존하지 않고도 대규모 물량의 원거리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제국을 이룬 로마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드러났는데, 로마는 갈리아니 심지어는 이탈리아 북부의 농산물을 육상으로 제공받는 것보다는 해로를 통한 이집트의 곡물을 받았는데, 이집트의 생산량이 가장 높다는 것 이외에도 이집트의 곡물은 해상을 통하여 비교적 저렴하게 실어 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 Joseph Tainter에 의하면 같은 양의 곡물을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배로 운반하는 것이 수레에 싣고 120km를 가는 것보다 값이 쌌다고 한다.
낙랑군과 관련해서는 주현(主縣)이자 치소라고 할 수 있는 조선현을 중심으로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2000호이상의 인구가 많은 현(이는 shaw님의 블로그 참조)들은 조선현 근처에 몰려있다. 조선현에 어느 정도 인구집중이 있었고 주변에 배후도시들이나 위성도시들이 형성되어 배후생산인력이 집중이 된 모습니다. 대동강 중하류는 어느 정도 네트워크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현과 대동강을 떠나서 다른 현들에서는 인구집중과 도시집합의 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하다. 인구집중은 대개 물자의 집중과 함께 네트워크의 집중도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인구의 집중이 부족하면 반대로 물자의 집중과 네트워크의 집중이 안 될 것은 매우 ‘당연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인구집중, 특히 한인(漢人)계의 상당한 유입이 전제되지 않고는 한인(漢人)들에 의한 광역네트워크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시집합과 인구밀도 외에도 왜 사료와 유물이외의 수십가지 다른 방법으로 낙랑군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다음에 논하겠다.
첫댓글 글을 쓰시다 마셨군요. 시간이 없으신 것은 알겠지만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주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