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못미처 판교역에서 콜 배차를 받았다.
손님에게 전화해 판교역 어디로 가 드리면 되냐고 전화했다. 판교역 1번 출구 앞으로 와 달라는 손님의 전화 너머에는 노래방의 밴드 소리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의 취기가 전화선을 타고 내 귓가로 와서 알코올기까지 묻어나는 듯하다. 이런 경우 솔직히 반갑지 않으며 '예약'만 아니라면 그냥 물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손님이 정한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며 배차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삼선교 힐스테이트 경유 수유리>
휴! 뒤의 경유지를 못 보고 삼선교로만 알고 괜찮은 콜인 줄 알았는데, 손님까지 안 나오니 속이 탄다.
10여 분이 흘러도 안 나와 전화를 했다. "손님, 나오시려면 많이 걸리나요?" "예. 다 와갑니다."
서너 명의 취객이 걸어오며 한 사람이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통화한 사람이 이들이라는 것이 직감으로 온다. 이내 뒷문이 열리고 콜 차량이냐고 확인하며 일군의 무리 중에 두 명이 내 차에 오른다.
차는 이내 경부고속도로에 올랐다.
"손님, 삼선교 어디로 가 드리면 되죠?"
"명신 초등학교요."
명신 초등학교는 처음 들어보는지라 다시 물었다.
"명신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 거죠?"
"창신역에서 터널로 들어가지 말고 터널 위로 가면 됩니다."
연장자인 뒷자리에 탄 사람이 "김대리, 이렇게 한 팀이 되었으니 잘 해봅시다." 앞 조수석에 탄 사람은 "예"라고 짤막하게 말한다. "사실 우리 IT 업계가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 한 솥밥 먹게 되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이팅 하자고요!" 마찬가지로 조수석의 손님은 "예"라고만 응수한다. 이어진 다른 말에도 조수석에 탄 손님의 반응이 무덤덤한 것으로 보아 그가 술과 피로로 지쳐있거나, 아니면 뒷자리의 연장자가 조직 내에서 그렇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달린다.
삑~삑!
미터기에 설치된 과속 경고음이 귀에 무척 거슬려 떼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 탄 손님이 한마디 한다. "아니, 왜 그렇게 빨리 달려요? 원! 콜센터에 전화해서 주의를 줘야 되겠구먼." 사실 뒤차가 앞머리를 나의 차 엉덩이까지 바짝 붙여 심리적으로 쫓긴지라, 시속 120km을 조금 상회했기에 경고음 때문에라도 차로를 바꿀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말을 들으니 심기가 편치는 않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손님은 "속도 줄이고 올림픽대로를 타서 동호대교를 건너세요!"하는 것이다.
한남대교를 건너 약수동으로, 혹은 한남대교를 건너 장충단 길로 가는 게 정석인데 동호대교로 가라니?
올림픽대로를 타면 동호대교로 올라타는 날갯죽지가 없어 동호 고가도로 밑에서 U턴을 해서 동호대교를 올라타야 하는데 왜 그렇게 가지? 상당히 의아해했지만 손님의 요구라 그렇게 따르기로 생각하고 달리던 중 또다시 말을 하며 화를 낸다.
"아니 정말,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헐! 저 사람 왜 저러나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탈 때 불콰한 얼굴과 입가에 흐른 침을 보고 조금 경계심을 가졌었는데, 이제 사달이 시작되는 건가 긴장하면서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렸다. 그랬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수서-분당 간 고속화 도로로 해서 올림픽대로를 타야 되는데 대체 지금 여기 어디요?"하는 것이다. 기가 찬다. 자기를 염전에 노예로 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역정을 내는지 한심할 뿐이었다. 염전에 갖다 놓아도 밥값도 못하게 생겼으면서 말이야.
"손님, 우리는 경부고속도로를 탔어요!"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니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아이고! 나는 수서 그 도로인 줄 알았는데 경부로구먼. 그러면 동호대교를 탈 필요 없이 직진만 하면 되지"하며 한 풀 꺾인 모습으로 나온다. 크으억 크으억!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간 사람 하나로도 버거운데 듀얼(Dual = 이중의)로 막 덤비는구먼. 다름 아니라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자고 있던 사람에게서 호흡소리가 거칠어지고 못 견뎌하는 모습이 감지된 것이다.
이 친구 또한 경계심을 가지고 예의주시를 하고 있던 차에 이런 극한의 모습을 보이니 나의 두뇌는 사이렌을 울리며 공습경보 단계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숨소리가 상당히 거칠어 호흡소리로 봐서는 위에서 음식물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 미리 비닐봉지를 준비해 드릴까요?"라고 하자 괜찮다고 한다. 그 말이 미덥지 않아 다시 한 번 물으니 손으로 뭔가를 달라는 손짓을 한다. 그래서 준비한 비닐봉지를 손에 쥐여주니 그는 그것을 펼쳐서 만일의 사태에 준비하는 듯하다.
"김대리, 택시 안에서 실수하면 안돼. 알았지!"하며 말하는 뒷자리의 손님은 나를 진정 위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직장 상사로서 팀원의 위장까지 제어하려는 속셈인지 하여튼 이래저래 긴장감을 늦출 수는 없었다. 신당역에서 동묘역 구간은 다른 때보다는 덜 막혔지만 나의 조급증은 이런 지체에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막힌 구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에 뒷자리의 그가 "이 구간보다 장충단 길로 해서 동대문에서 우회전하는 게 훨씬 나은데요"하는 게 아닌가. '당신이 처음부터 오락가락하지만 않았어도 그 길로 갔어! 이 양반아'라고 내 속은 말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창신역을 지나 동망봉 터널 위로 난 길로 해서 올라갔다. 오르막 사거리에 이르러 "여기서는 어디로 가죠?"했더니만 좌회전을 하라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낙산 가는 길이었다. 진작부터 낙산이라고 말하든가, 명신 초등학교라고 혼란스럽게만 말한 손님이 내 눈에는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술잠에 빠져 있던 조수석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깨어나 상사를 배웅하려다가 그의 됐다는 말에 조심해 들어가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가 내리면서 자신의 동료를 잘 부탁한다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를 않았다. 그것으로 그에게 나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이다. 그 인간이 알 건 모르건 말이다.
조수석에 탄 손님에게 괜찮은지 확인하고 수유리 어디냐고 물으니 수유역 앞에 세워 달란다. 낙산에서 그냥 내렸으면 차를 돌려 종로에 가서 다시 새롭게 영업할 수 있는데 그 지긋지긋한 수유리를 가야하고, 혹시 모를 변고까지 대비하면서 가야 한다니 속으로는 '아이고 내 신세야'하며 한탄한다. 미아리고개를 올라가는 길에서 또다시 손님이 크으억 크으억! 한다. 불안해 차를 세울까 했는데 괜찮다며 그냥 가라는 손짓을 한다. "손님!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으세요"하는 말에 훠이훠이 하는 손짓만 할 뿐이다.
다행히 미아 · 수유 구간을 큰 지체 없이 통과했다. 조물주가 나를 가엽게 여기시고 모든 신호를 터서 열어놓았으며 다른 차들을 나의 진행에 방해가 안되도록 다른 데로 돌린 듯했다. 수유역에 도착해 그를 깨우니 신음 비슷한 소리만 내기에, 실내등을 켜고 창문을 열고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하니 움찔움찔한다. 다시 한 번 그를 채근하니 그제야 조수석에 뒤로 젖히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다. 천년만에 날게 되는 전설의 새인 비익조(比翼鳥)가 날려고 몸을 추스르듯 간신히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내린다.
깊은 한숨을 쉬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 얼핏 룸미러를 보았다. 방금 내린 그가 지하철 환풍구 벽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처 들면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삶의 무게에 못 이겨서인지 꾸역꾸역 속을 게워내고 있는 게 아닌가. 괜찮을까 싶어 내리려는 찰나, 신호가 열리고 다른 운전자들의 눈총에 결국 그냥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단 몇십 초만 늦었다면 악몽이 되었을 것을, 다행히 내 차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낙산에서 먼저 내린 손님이 도중에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기지 못하는 술을 마신 수유리에서 내린 손님 또한 오바이트하지 않을까 내내 전전긍긍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 둘을 내려주고 나니 진이 빠졌다고나 할까, 아무튼 허탈했다. 그러나 그들을 너무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비록 나를 힘들게 한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밉다기보다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술과 세상이 미울 뿐이다. 잠시나마 시름을 잊기 위해서 마신 술이 '약주'가 되어야 하는데, 그 슬픔과 분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보니 '독주'를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이 세상을 원망하고 탓해야 하지 않을까.
그 독주가 그들을 힘들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한 것이다. 그들이나 나나 이 세상에 던져져 남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야 하기에 애달프기는 마찬가지. 그러하니 애달픈 자끼리 서로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수유리를 빠져나왔다.
이 밤에 별이 총총 한지 어떤 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잠시 내려 하늘에 어떤 별이 떠있나 한 번 보아야겠다.
첫댓글 님의 우주적관점의 에피소드글 잘읽었븝니다. 손님이 학교를 말했다면 네비를 조용히 찍고 가시기바랍니다. 속편하게 목적지 찍고가는게 ㅊ편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님의 글을 보니 제 속마음을 들킨듯 얼굴이 붉어집니다.
의도적, 가식적 수사를 넣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나갈 생각에 쫓기다 보니 글 말미가 이상해졌네요.
수유리에 내린 손님에게서 애틋한 마음이 일어 안타까웠는데, 제가 그 심정을 잘 표현해내지 못했기에
님께서 그리 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이유야 어쨌든 저의 '함량 미달'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신데 대해 성찰토록 하겠습니다.
@선비 삶은...계란입니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운행일지가 아닌 다음에야 글쓴이의 주관적 감상은 가감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슴이지요~~
택시기사라면 가끔씩겪게되는 애환을 에피소드로 잘표현해주셨네요...
별이 총총히 떠있는지도 모르고 달려온삶..
선비님의 콜은 k-콜? 중앙콜? 저는 중앙콜 3551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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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표현해 주신 분 계시구만요.
아님 수필이든 수기이든... 있는 사실 그대로만 옮겨 적는다면야 (신문, 잡지)기사라는 표현이 적합하겠지만요.
글쓴이의 의도는 그 자신만이 나타낼 수 있는 정도나 수위가 있으리라 여기면 편케 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