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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납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고, 천지를 삼킬 듯 쏟아지던 폭우도 멈추었다. 태풍은 그렇게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채 사라졌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거센 파도를 감당해내며 자신에게 안겨든 크고 작은 배들을 품어주었을 항구의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전 우연히 찾아낸 청마시집,... 그의 시에 경도되었던 학창시절이 새삼 그리움과 함께 떠올랐다. 하여...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통영을 찾았다.
아침시간을 약간 넘겨서인지 여름 내내 붐비던 시락국집이 한산하다. 시락국 한 그릇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걷기 시작하다.
서호시장 시락국집앞 주차공간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아예 마음편히 여객선터미널에 차를 세우고 시락국을 먹은 뒤 강구안 거리에 있는 문화마당까지 걸었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의 얼굴에도 모처럼 평온을 되찾은 안도감이 묻어있다.
태풍으로 거북선에 상처라도 난 것일까. .
판옥선의 내부.
작지만 아름다운 항구의 품안에서 거센 비바람을 견뎌낸 배들. 나도 마음이 편해진다.
배들이 가득찬 항구.
평온을 되찾은 바다와 뱃사람들.
거제 저구항에서 출발하는 매물도행 배도 통영항에서 비바람을 피한 듯하다.
서둘러 출발준비를 하는 배도 보인다.
말린 고기를 파는 좌판이 늘어선 곳에는 할머니 한 분만 전을 펴고 하염없이 앉아 계신다.
늘상 같은 자리를 지키는 칼가는 할아버지도 나오셨다. 태풍에 별고는 없으셨는지....
길에 새겨놓은 표지를 보며 우체국을 찾아가다.
가는 길에 만난 김춘수시인의 시비(詩碑)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의 시 '꽃'은 지금도 다 외울 수 있을 것같다.
남쪽끝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 통영에는 이름난 예술가들이 많다. 소설가 박경리, 청마 유치환,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이중섭, 전혁림, 작곡가 윤이상 등..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아름다운 통영의 앞바다라고 주저없이 얘기한다.
문화마당에서 청마의 흔적을 따라 중앙우체국을 찾아가는 길. 행인에게 한 차례 물어보고 일러준대로 우체국으로 들어가는 입구 신호등앞에 섰다.
저기 우체국이 보인다. 청마 유치환시인과 정운 이영도시인의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같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던 스물 아홉의 정운 이영도는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고 그해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청마는 정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청마의 열정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울림이었기에 퍽이나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다 그러나 청마는 그러한 사랑의 고통마저 행복으로 느낀 것같다.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 .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우체국안의 모습. 잠시 의자에 앉아 제일 좋아하는 그의 시를 되새겨본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통영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이문당서점. 우체국 맞은 편에 있는 서점의 이층에 살았다고 알려진 이영도시인. 청마는 이층창문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연정을 편지로 전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앞에 늘상 붙는 의지의 시인이라는 말처럼, 또 위의 바위에서도 보듯이 그는 강인하다 그러나 때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솔직함...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파도-
우체국입구에는 청마시인의 모습과 시비가 서있다. 일상 깊숙히 들어온 청마의 열정과 시심(詩心).
청마는 나이 59세 되던 해,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그가 스무해 가까이 정운에게 쓴 편지는 5000 여통에 이르렀다.
시각은 점심때를 훌쩍 넘어가고., 뚝배기를 먹을 수 있나 미주뚝배기집에 가보니 문이 닫혀있다. 태풍탓에 해물조달이 어려운가보다 대신 한일김밥집에 가서 충무깁밥을 포장해오다.
^^^^ 이영도시인도 청마의 마음을 알았지만 끝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는 않았다. 외사랑이었다해도 청마의 사랑은 비난받아 마땅할 지 모른다. ................................. 우리는 이제 편지를 쓰지 않는다. 빨간우체통이 반이상 없어졌다고 한다 하얀 편지지를 앞에 두고 때로는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는 '애틋함' '안타까움' 순수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청마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의 참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
출처: 하늬바람 원문보기 글쓴이: 수선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