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진짜 하느님
달콤한 간식이 귀하던 시절에 어머니는 외출할 때 아이들에게 찬장에 둔 사탕 꺼내 먹지 말라고 한다. 하늘에서 하느님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 알아서 하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은 엄마 안 계실 때 우리 사탕 하나씩 꺼내 먹자고 하실 거다. 어떤 신부님이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느님과 실제 하느님이 얼마나 다른지 설명한 내용이다.
하느님은 나의 뒷조사를 하는 형사나 내 방을 압수수색하고 내 개인 전화기를 뒤지는 검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나를 변호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다. 기억하지 못하고 죄인 줄 모르고 저지른 죄까지 없애주신다. 뉘우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은혜를 입을 만한 선한 일을 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만 탈렌트의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마태 18,27). 참으로 믿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 있는 힘을 다해 믿는다. 수없이 결심하고, 눈물로 뉘우쳐도 완전히 개선되지 않으니 하느님이 그런 식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시면 나는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신 계명은 삶의 또 다른 짐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게 짐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거나 참 좋으신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쉽게 빼앗긴다. 아니 멀어지는 즉시 그렇게 된다. 그러면 그분은 바로 검사나 형사로 둔갑한다. 그들을 만나기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양심 성찰을 게을리하고, 성사와 하느님 말씀을 멀리할수록 주님의 계명은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는 이들이 평화롭고 복을 받는다.
하느님의 계명은 십계명에 있고, 그것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그리고 다시 서로 사랑함으로 요약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런데 복잡한 세상사와 인간관계 안에서 이웃사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사랑하기 위해 모든 법규와 세상사를 알아야 한다면 누가 제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나.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자주 마음속으로 고백한다면 성령님께서 내 마음과 발걸음을 하느님 뜻에 합당한 곳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믿는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살기도 바쁜 데 언제 교리 공부 또 하고, 복잡한 신학 서적을 읽을 수 있겠나. 하느님은 결코 어려운 분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런 분이 아닌데, 나를 살리기 위해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분은 얼마나 더 쉽고 또 좋은 분이겠나. 이런 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무엇에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 주님을 잘 몰랐을 때는 높으신 하느님이 하라니까 억지로 또는 벌 받는 게 무서워서 계명을 지켰다면, 지금은 그것이 제게 참된 자유와 기쁨을 준다고 믿고 지킵니다. 잘 안돼도 있는 힘을 다해 지키려고 하고, 실패해도 또다시 시작합니다. 다 못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겁니다. 주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길, 사랑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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