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자연환경과 기후는 서구의 선교사들에겐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수단 오지 선교회(SIM)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Africa Inland Mission)도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생존했다.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AIM)는
피터 캐머론 스코트가 설립했다. 그는 1867년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그는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오페라 가수가 되려 했다.
그래서 합창단원 모집에 응모하러 오페라 극장에 갔다가 극장계단에서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즐거움의 세계에서 각광을 받으며 관객의 환호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리 힘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칠 것인가? 그는 결국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결단했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스코트는 심슨이 세운 뉴욕의 선교사 훈련학교에
입학하여 아프리카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였다.
1890년 11월 심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으니 23살이었다.
그는 다음날 기독교 선교연맹의 선교사로서 아프리카의 서해안으로 출발하였다.
그가 도착하고 난 후 몇 달 뒤에 그의 동생 존도 선교사로 합류하여
아프리카에서 즐거운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그 만남은 곧 슬픔이 되고 말았다.
존은 아프리카의 기후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백인의 묘지라고
일컫는 아프리카 땅에 몸을 묻고 말았다.
그는 동생의 관을 짜고 그를 직접 묻었다. 그는 동생의 무덤 앞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헌신을 다시 다짐하였다.
그러나 스코트도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서약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그는 영적으로
새로워 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찾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하게
한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무덤이 있었다.
그는 경건하게 무릎꿇고 앉아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쓰인 비문을
읽는 동안 리빙스턴의 영혼이 스코트의 앞에서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위대한 선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스코트 역시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라도 바치리라 결심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스코트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세우고 여러 사역자들을 만났다.
후에 이 선교회에 큰 공헌을 하게 될 피어슨과 헐버트도 포함되었다.
드디어 1895년 8월 스코트를 포함한 7명의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10월에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 도착 후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갔다. 1896년 단 1년 만에 이룬 업적보고서를 제출했다.
4개의 선교기지가 세워졌고 교육과 의료계획 그리고 현지어 공부도 진행되었다.
첫 번째 보고서가 보고 되는 동안 예전에도 기후 때문에 병을 앓았던
그는 1년에 4천km 정도를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의 병은 상태가
악화되고 선교사로 간 그의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도 뒤로 한 채
사역을 시작한지 14개월도 안되어 1896년 12월 스물 아홉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는
오늘날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