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냐세요.
만지케르트 전투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그전에..
멘앗암과 그밖의 유목민족에 관한 책을 읽어가며 느낀 건데,
비잔틴 제국 정말이지 1100년을 잘 버텼다 싶더랍니다. (콘스탄티노플로 천도 이후)
동으로 북으로 서쪾으로 사방에 적인데다가 종교마저도 같은 넘이 없구
툭하면 북쪽의 유목민족들 (아바르, 마자르등 셀 수 없슴다)이나 동쪽의 투르크, 사사니안 등
이 약탈하고 침범하고 또 깨지고 이기고 (이긴 적도 꽤 있었습니다)
거기서 비잔틴 제국의 눈치와 꼼수, 아니 외교능력이 빛나는 순간이었슴다.
카자르 칸국이나 킵차크족 등등이랑 동맹을 맺고 돈을 주고 달래고 그래도 정 안되면
군사력을 쓰고 (다른 나라와 달리 비잔틴은 전쟁/전투에는 굉장히 신중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프랑크족이 교활한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인과 악수하면 남은 손가락수를 살펴봐야
한다고 그랬을까요...
정말이지 시대를 뛰어넘은 나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년이나 버텼지...
참고로 비잔틴과 자웅을 겨루던 대국 사사니안 제국은 20여년 만에 아랍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만지케르트 전투 역사는 군대와 같이 행군한 비잔틴 공무원 미카엘 아탈레아테스(맞나..)가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말하면 두 군대의 대빵 두명은 이 전투후 1년내로 죽습니다... 그럴 꺼
면 왜 싸우냐... -_-ㅋ
이 전투는 비잔틴 제국이 아나톨리아의 중앙 고지 평원과 동쪽 국경을 계속 찝적이는 투르크
약탈족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데서 시작합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핵심지는 거대한 도시 콘
스탄티노플과 아게안 해협의 몇몇 도시여서 동쪽 아나톨리아의 황량한 땅은 군대를 유지할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먹여 살리나..) 반대로 투르크 족에게는 이런 땅이 그들의
본래 고향인 중앙 아시아와 비슷했죠. 요새들은 잘 버티고 있었지만 요새 사이의 땅들은 비잔
틴 제국의 영향력에서 계속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비잔틴의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왕조) 는 경험이 풍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전대의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치고 빠지는 게 장기인 투르크족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이기만 하
면 그들을 영원히 끝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071년의 여름 로마누스 황제는 약 4만의 비잔틴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비잔
틴 군대는 테마에서 온 비잔틴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안, 노르만, 게르만, 투르크 용병대로 이
루어진 아주 다양각색한 군대였습니다. 뭐 그시대의 비잔틴 군대가 보통 이랬답니다 (이러고
도 천년을 버텼습니다). 부대사이의 의사소통이 힘든 건 물론이고 부대의 충성심에 대한 의
심, 불리할 때 도망칠 가능성도 있는 골때리는 군대였습니다. 이중 상당수의 병사가 중보병이
었습니다. 마침 수확의 계절이라 2달치의 병참을 거두도록 명령받았습니다 (현지의 농부들이
어떻게 겨울을 날지는 물론 관심밖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천개의 마차와 만마리의 소들
(북한가냐...)을 끌고 가느라 비잔틴 군대의 이동은 엄청 느렸을 것입니다.
다행스러울 뻔하게도 아나톨리아에 있는 투르크족은 4만명의 군대를 직접 맞딱뜨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 흩어질려고 했지만 이집트 침공을 위해 북서방면의 안정을 꾀하던 당시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 (영웅 사자란 뜻)은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휴전을 위한 협상이 결렬된 후
술탄은 전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비잔틴 군대는 동쪽으로 깊숙히 움직여서 반 호수가에 있는 아클라트와 만지케르트
(투르크에게 점령당했음)의 두 요새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두 요새를 점령해서
전진기지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은 투르크족을 전면전으로 꾀어볼려는 게 진정한 목적이었습
니다.
이순간 비잔틴 군대의 약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중 치명적이었던 것인 정보였습니다.
기동성있는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의 움직임을 속속히 알고 있었고 비잔틴은 마치 어둠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로마누스 황제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단지 술탄이 저멀리 이라크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걍 떨거지 마적단(?)하고만 만나겠지... 하고 생각했더랍니다.
비잔틴군은 만지케르트 요새도시를 즉각 점령한 다음 요새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비잔틴의 좌군은 마침 도시 부근에서 열심히 삥(?)을 뜯고 있다가 마적단들과 맞부닥쳤는데
마적단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니까 넘 신나서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추격하는 넘들은
걍 보내는게 일반 군대의 정석이랍니다). 당근 마적단의 이 도망은 페인트였고 이는 모든
유목민족들(몽고포함)이 즐겨 쓰는 양동작전이었기 때문에 비잔틴의 좌익은 곧 자신들이 거
친 지형에서 생각보다 훨씬 크고 조직된 적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으로 깨달았습
니다. 생존자들은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8월 26일 (운명의 전투 바로 전날) 그는 맨지
커트 도시의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비잔틴 군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을 짰습니다. 선봉인 중군의 비잔틴 황제와 중기병대 양
옆에 좌군, 우군을 배치하고 군의 핵심인 후군 (후퇴시 아군이 포위당할 사태를 막아줄 병단)
은 좌군-중군-우군에서 약간 먼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셀주크군은 반달모양으로 느
슨히 진을 짰고 좌군, 우군의 구별은 있었겠지만 전투시 아마도 좀 더 작고 기동성 있는 그룹
단위로 싸웠을 것입니다. 황제와는 반대로 술탄은 전투선에서 약간 뒤쪽에 있었는데 이는 전
투상황을 잘 알아보기 위한 목적과 병사들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
든 투르크병은 기마병이었고 그들중 대부분은 기마궁병이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접근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연하게도, 투르크군은 접근전을 피하고 적
을 에워싼 다음 적들이 지칠 때까지 화살비를 퍼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투르크군의
중앙은 후퇴해서 비잔틴의 중군을 앞으로 오도록 꾀는 동안 양 옆의 투르크군은 비잔틴의 좌
익과 우익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좌익과 우익은 화살비로부터 몸을 피하느라 상당히 느렸음
에도 불구하고 그중의 몇몇 비잔틴 병사들은 짱난 나머지 투르크군을 쫓으려 하다가 각개격
파당했습니다.
비잔틴: 빨간색, 투르크: 보라색
Phase I - 마적단을 신나게 쫓던 좌익들이 깨집니다 (만주 벌판이냐...)
Phase II- 비잔틴군 접근전을 위해 전진을 합니다.
비잔틴: 빨간색, 투르크: 보라색
Phase III - 비잔틴군의 좌익/우익이 각개격파 당합니다.
Phase IV - 비잔틴 군대는 완전히 흩어지고 포위당할 때 후군은 토낍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로마누스는 jot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접근전은 실패하고 양익과의 접촉
은 멀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누스는 후퇴라는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려 만지케
르트의 방벽뒤에 군대를 재정렬하려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잘 조직된 후퇴는 엄청 힘듭니다. 더군다나 이시대의 군대는 부대와의 통신이 힘
든 관계로 비잔틴 군대는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양익의 상당수의 병사들은 비잔틴
황제가 전사해서 전투는 졌다는 생각하에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후군은 보통 바로 이
때 나서서 후퇴하는 아군을 보호하고 혼란을 진정시켜야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하지만
마침 후군의 지휘관은 황제의 정적이었으므로 황제가 jot되기를 바라는 충심으로 걍 생까고
가버립니다 (원균보다 못한넘-_-+).
밤이되자 포위당한 비잔틴 군은 포위당했고 많은 수의 병사가 죽었습니다. 포로가 된 황제는
술탄으로부터 잘 대접받고 곧 풀려나지만 얼마 안있어 정적들로부터 죽음을 당하고 비잔틴
군대는 당파싸움을 하게 됩니다. 아쉬운 점은 비잔틴군은 비록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고 다시 회생할 기회를 당파싸움에 영원히 놓쳐 투르크족이 계속 아나톨리아에 뿌
리박을 기회를 주게 됩니다.
출처:
몽고족, 훈족과 바이킹족. 저자 휴 케네디. 편집 존 키건. 출판사 카셀. 출판년도 2002년
첫댓글 다음은 몽고가 헝가리 군대를 격파한 모히전투입니다.
저는 맨지커트 라는 발음보다는 만지케르트 전투 라는 발음이 더 익숙해서..... 영어식 발음보다는 원래 발음으로 해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을 결정적으로 와해시킨 전투였죠.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투르크 족에게 빼았기고 맙니다.
발칸 반도가 비잔티움의 곡창지대였다면, 아나톨리아(소아시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 대부분을 생산해 내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을 잃어버림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더이상 대규모 군대를 뽑아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후,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다가 서방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게 십자군 전쟁으로 발전되고 말죠....
아악 읽기 힘들어...
써놓고 보니 양이... ㅠ.ㅜ;;;
역시 회전에 관한 자료들은 이렇게 지도와 전황을 담은 그림들이 있어줘야 제대로 삘이 꽂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를 올려주신 멀티... 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연재 부탁드릴께요^^
좋은 정보 정말 고맙습니다. 리플만 대충 봤었는데 앨리스님의 리플이 아니였으면 본문 내용은 열어보지도 않을뻔 했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정보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사니안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말하는 겁니까?
정확한 책 제목을 알고 싶네요. 그 책에도 저럽 삽화가 잘 삽입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훌륭한 글 감사드립니다.
리자드님: 사산조 페르시아 맞습니다. 정확한 책 제목은 Mongols, Huns and Viking. 저자 Hugh Kennedy. 출판사 Cassell.
결정적으로 정략적인 문제도 만지케르트에 얽혀 있습니다. 로마노스 4세의 선제인 두카스 조의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과 조카가 제위 다툼에서 밀려났었는데, 두카스 가문이 군사적으로는 실력이 있었고, 또한 선 왕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선제의 동생인 요안네스에게는 카이사르의 칭호를 주었고,
그의 아들 (즉 선제의 조카) 안드로니코스에게는 만지케르트 진군 당시 일익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놈이 로마노스 4세를 구원하지 않고 상황이 불리하게 보이자 그냥 냅다 튀었죠. 두카스 왕조 쪽은 수도의 문관귀족을 대표하고, 로마노스는 군인귀족을 대표하는 쪽으로서 알력이 상당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