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삽화
강 문 석
고색창연한 도시 퀘벡에서 비를 만났다. 조용히 도심거리를 적시는 가을비였다. 빗물에 씻기면서 더욱 생기를 발하는 공원의 단풍잎들도 한껏 도드라진 색깔을 드러냈다. 지구촌에 단풍의 나라로 소문난 캐나다지만 이제 곧 낙엽으로 떨어질 나뭇잎들을 생각하면 금년 시즌도 서서히 저무는 걸 알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래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애써 이국의 낭만을 즐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눈앞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간데없고 속절없이 흘러간 지난날의 추억 속 가을비가 떠올랐다.
지구 반대편 이국 하늘 아래서 비 내리는 서울 명동거리를 추억하게 될 줄이야…. 불멸의 가수 배호가 흐느끼듯 애타게 불렀던 명동거리였다. 당시 배호의 비는 명동에만 내린 게 아니었다. 남산에도 내리고 돌아가는 삼각지에도 내렸다. 가수는 스물아홉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은 각박한 생활에 매달리던 청춘의 가슴에다 적지 않은 위안을 안겨주었다. 비나 안개처럼 사람을 처량하게 만들거나 떠난 사람을 그리는 노래가 더욱 그러했다. 가을비에 대한 감상은 바다 건너 섬나라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던지 ‘오사카 시구레’와 같은 노래들이 한반도까지 넘어오기도 했다.
퀘벡 거리는 인생 황혼에 닿은 쓸쓸함에다 사색의 계절까지 보태져 이런 상념을 불러왔을 터이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추억에 남는 여행을 만들고자 피사체를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일에 안간힘을 썼다. 흡사 유럽처럼 느껴지는 도시 풍광인지라 찍을 거리는 지천에 늘려있었다. 앞서 이미 초대형 아웃렛을 거친 여행자들은 거의가 기념품매장에선 지갑을 열지 않았고 아이쇼핑 위주로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골목 어귀에 위치한 대성당을 찾아 할머니 수녀가 정성스레 포장해주는 손안에 쏙 들어오는 예수목각을 서너 개 구입한 게 전부였다.
비 때문인지 우리가 버스를 내리자 가로는 한산했다. 파란 비닐우의를 걸친 채로 줄지어 단체로 걷고 있는 우리 일행도 퀘벡에서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흡사 판초를 걸치고 훈련에 임하는 병사들 같았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자욱하게 덮은 안개는 몽환적인 풍경으로 다가왔고 비에 젖고 있는 노랗게 물든 단풍이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이곳 여행정보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한 크루즈는 오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람선 두세 척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정박해 있었다. 바다처럼 넓은 강이지만 이 지점은 달랐다. 이곳 도시의 이름이 눈앞에 펼쳐진 강에서 연유되었기 때문이다.
원주민 인디언들의 언어로 갑자기 강폭이 좁아지는 곳을 이르는 말이 퀘벡이었다. 강을 향해 설치한 대포가 강변로를 따라 길게 늘어섰지만 우리의 휴전선과 같은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프랑스 군에 의해 처음 세워졌던 별 모형의 군사 요새 시타델이다. 뒤에 영국군에 의해 완공된 시타델은 미국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였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공격도 해보지 못했단다. 이곳은 군사시설로 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무기를 전시한 군사박물관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퀘벡시티는 이곳을 중심으로 안쪽에 위치한 곳을 상부타운, 바깥에 자리한 곳을 하부타운이라 부른다. 하부타운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역사지구다. 비교적 지대가 낮은 시가지는 바람이 잠잠했으나 언덕에 오르자 강바람이 드셌다. 펄럭이는 국기에 든 빨간 단풍잎은 다다닥 다다닥 연신 소리를 내면서 여기는 캐나다이고 지금이 단풍 절정이라고 여행자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실제로 목이 부러졌는지 알 수 없으나 부산 동광동 40계단이나 광복로에서 오르는 용두산공원 계단에 비하면 이곳은 경사가 상당히 완만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목 부러지는 계단’이라 이름 붙인 건 그냥 사람들을 웃기고자 해본 것 같았다. 이 계단을 내려서면 여행자들의 로망인 프티 샹플랭 거리가 시작된다. 그림처럼 예쁜 프티 샹플랭 거리는 퀘벡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꽃으로 장식한 파스텔 톤 벽돌 건물에 아기자기하게 꾸민 테라스와 개성 넘치는 간판을 단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들이 즐비하다. 부티크 노엘이란 간판을 단 점포는 입구에 들어서자 흥겨운 캐럴이 흘러나왔다. 아담한 점포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트리로 성탄절 분위기를 안겨주고 있었다. 장난감 병정과 스노볼도 빼곡하게 진열되어 위층에서 내려다보면 색색의 꼬마전구를 휘감은 트리가 성탄절처럼 빤짝였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인증샷을 남기느라 법석이었고 진열장의 산타를 카메라에 담는데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로부터 시작되었는지 할로윈으로 꾸며진 작은 공원도 이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 우리나라도 귀신으론 주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곳 귀신들도 그랬다. 사람들은 희귀한 풍경이라 여겼는지 빗속에서도 귀신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귀신 눈을 마주하고 서서 혹시 씨나락 까먹을 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귀신공원 바닥에는 이 나라 사람들이 대책 없이 좋아하는 노란 호박들이 소품으로 진열되어 빗물에 노천목욕을 하고 있었다.
북미대륙의 겨울은 상상을 못할 정도로 춥다보니 북쪽으로는 창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텅 빈 북쪽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4백년 세월이 흘렀다는 것. 그렇게 탄생한 벽화들은 이제 눈길을 끄는 관광지 명물이 되었다. 프레스코화는 5층 높이 벽면에 그려진 벽화로 무늬가 교묘하게 연결되어 그림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퀘벡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열여섯 인물과 사계절을 담은 작품이었다. 열두 명의 아티스트들이 이천오백여 시간이나 실물크기로 작업을 해서 완성했다니 그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토지나 건물을 보유하여 세금을 내고 있는 현행 부동산세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 부동산이 아닌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낸다는 노르웨이 같은 선진국 사람들을 나는 부러워하며 존경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는 창문이 많은 집을 부유한 집으로 보고 많은 세금을 매기자 아예 창문을 없앤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창문세는 캐나다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 영국과 프랑스가 원조였다. 시민들이 아궁이세를 안 내려고 아궁이를 없애버리자 창문세를 만들었는데 다시 창문까지 없애버렸으니 세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퀘벡 시가지 건물에 붙은 창문들은 특이했다. 이곳 창문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주로 회색빛 경사면에 돌출된 다락방 창문들이다. 마침 비까지 내려 창문들은 더욱 생기를 발했다. 창문엔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딜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덧문까지 달려 있었다. 퀘벡 주의사당 건물은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 중앙에 꽂힌 깃대에는 프랑스 왕가를 떠오르게 하는 흰색 백합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빗속에 펄럭였다. 의사당 건물 앞쪽 분수를 내려서자 처칠과 간디 등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들 동상이 빗물에 씻기면서 반질거렸다.
[글쓴이] 수필가 / 사진가 / 여행작가 / 비디오 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