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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밖으로 피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복음을 살아가는 길은 언제나 현실 한가운데에서 시작됩니다. 사랑보다 경쟁이, 용서보다 보복이, 나눔보다 소유가 더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살아가도록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현실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방식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라."
겉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덕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슬기로움은 세상의 계산에 능한 영리함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사랑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순박함 역시 단순히 착하고 순한 성격을 말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는 깨끗한 마음입니다. 상처를 입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실패를 겪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누구보다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셨고, 누구보다 순박하게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그 길은 결국 십자가로 이어졌지만, 바로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보다, 혼자 싸우려 하지 말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며,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슬기로울 수도, 끝까지 순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순간에는 미움이 앞서고, 믿어야 하는 순간에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주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거듭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조금씩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갈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화가 없어지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으로 인해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두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임을 알아듣고, 마음과 의지를 그분께 드리며 오늘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입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여러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령님, 지금 제 안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예수님처럼 슬기롭고, 예수님처럼 순박하게 사랑하게 하소서."
(천 사비나 수녀님)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오 10,16-23
아버지의 영과 일치된 삶의 평온함
생후 4주 때 각기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다가 39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만난 일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은 똑같은 ‘짐(Jim)’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키도 180센티미터로 똑같았고, 체중도 90킬로그램으로 똑같았습니다.
미네소타대 연구진이 조사해보니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 둘 다 어릴 때 ‘토이(Toy)’라는 이름의 애완견을 갖고 있었다.
- 둘 다 처음엔 ‘린다’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베티’라는 이름의 여성과 재혼했다.
- 둘 다 아들의 이름을 ‘제임스 앨런’이라 지었다.
- 둘 다 엷은 파란색 ‘쉐보레’ 차를 갖고 있었다.
- 둘 다 똑같은 상표의 담배를 피우고 똑같은 상표의 맥주를 마셨다.
- 둘 다 소방관과 보안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 둘 다 손톱을 깨무는 습관과 편두통이 있었다.
제퍼슨 의대의 버렌트(Thomas Behrendt) 박사팀은 일란성 쌍둥이들을 각기 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해놓고 한쪽 쌍둥이에게 눈을 감도록 해보았습니다.
그의 뇌파가 즉각 알파파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있는 한쪽 쌍둥이의 뇌파도 동시에 알파파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참조: ‘왓칭 2; 텅 빈 공간이 진정한 나일까?’,
김상운, 정신세계사;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저자의 사상은 가톨릭 교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다만 예화를 인용할 뿐이지 책 자체를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은 염색체를 가지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같이 자란 쌍둥이들은 커서도 저런 일치를 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품 안에서 오랜 시간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또한 지금도 하느님 품 안에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언제든지 하느님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하느님과 비슷해질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비슷해지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나는 고생을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서 큰 업적을 쌓고 주님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보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야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천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 예언자들을 죽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세상에 파견된 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이 아니라 박해가 약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영광을 바라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결국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맙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나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놓고 나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의 마이크가 되어드리면 됩니다.
마이크로 말하는 이가 두려울 수는 있어도, 마이크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지 않고서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강의 전에는 걱정이 되어 내용을 되새겨보며 긴장을 합니다.
그러다 끝나고 나면 ‘주님께서 다 하시는 일인데, 내가 왜 긴장을 했지?’라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려고 했구나!’
긴장되고 떨리는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찾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만 생각한다면 지금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은 ‘나’를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위 쌍둥이처럼 하느님과 닮게 되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을 보며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자신의 저서에서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떻게 버티어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도관들이 윽박지르며 온갖 욕설을 쏟아낼 때도 내 머리엔 시와 이미지가 물밀 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난 자유롭고 행복했지요.
어떤 죄수들은 철조망을 뚫고 탈출하려 했지만, 내겐 어떤 철조망도 없었거든요.”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10년간의 경험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하여 그 기억을 바탕으로
‘수용소의 군도’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과 나중에 이것을 통해 쓰게 될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탈출하여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바라게 될 때 지금의 고통으로부터도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업적도 남기게 됩니다.
나의 영광을 위한 모든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쌍둥이가 되어드립시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걱정은 나를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강론>
(2026. 7. 10. 금)(마태 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1)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예수님의 양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의 양답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리 떼’ 라는 말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박해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만 보면, 또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사탄의 이리 떼’가 ‘예수님의 양들’보다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양들’이
‘사탄의 이리 떼’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이길 수 없고,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또 모든 신앙인들은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승리자로서 당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는 “성령의 지혜를 청해서 받아라.”로 해석할 수 있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함’은 이리 떼의 물리적인 폭력과 박해를 무력화시키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승리자는 주님이시다.
그러니 신앙인답게 살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 승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입니다.
3) 23절의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숨어라.”가 아니라, “박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여라.”입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박해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스테파노 순교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았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신자들은 숨어 있지 않고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이 널리 전해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박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악한 일을 역이용해서 좋은 결과를 만드십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박해는 지나가는 일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종말, 재림, 심판을 막지 못한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죽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부활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5-1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마주할 현실적 박해와 하느님의 신뢰를 다루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 때문에 사람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고, 심지어는 형벌과 박해를 받을 것이다.”(16-23절 참조)라고 말씀하신다. 역사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박해를 받았다. 사도들부터 초기 교회 신자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때문에 세상의 조롱과 배척을 당한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신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바오로 사도도 박해를 하느님께 받은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박해는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우리가 받은 구원과 은총을 실제로 증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라고 하신다. 이는 박해를 두려움과 인간적 지혜로 맞서지 말고, 성령 안에서 신뢰하며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성령 안에 머무는 자는, 인간의 재판과 박해 앞에서도 담대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신을 변호한다.”(Sermones, 184 요약) 오늘날에도 우리는 말과 행동, 신앙의 실천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지혜로운 사목적 판단과 자기 보호와 사명 수행의 균형을 보여 준다. 동시에 제자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성 바실리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박해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도구다. 피할 수 있는 지혜는 사용하되,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견디고 증언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De Spiritu Sancto, Homiliae in Matthaeum 요약) 즉,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믿음의 실천과 신뢰의 삶이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피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담대히 견뎌야 한다. 말씀과 성령 안에 깨어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언제든 박해나 시련에 직면해도 올바른 선택과 증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과 사명을 따르는 가운데, 세속적 위험이나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면서, 핵심 진리를 증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하고, 믿음 때문에 맞닥뜨리는 재판과 박해 속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올바른 말과 행동을 선택하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담대히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