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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생활 보호와 권위
신 24:1-9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신 24:1-9 / [재결합에 대한 규정] 어떤 남자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아내에게서 무슨 부정한 일을 보고 미워하게 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2) 그 여자가 그 집에서 나간 후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을 갔는데 3) 이 두번째 남편도 그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이 두번째 남편이 죽기라도 하였을 경우에 4) 본래 그 여자를 내보냈던 첫번째 남편이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는 그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도록 부정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여자를 더럽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실 땅을 그런 더러운 죄악으로 물들이지 마십시오. 5) [병역 면제 특별 규정] 어떤 남자가 새 신부를 맞이하였으면 군대에도 나가지 않고 어떤 공적인 책임도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일 년 동안 자유롭게 자기 집에 있으면서 자기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가 결혼하고 곧 출전하여 죽으면 자식을 둘 수 없을 것입니다. 6) [맷돌을 저당잡지 말아라] 여러분이 저당을 잡을 때에 맷돌은 위짝 하나라도 저당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여자들은 그날그날 맷돌질하여 떡을 구워 먹고 살기 때문에 맷돌을 저당 잡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일입니다. 7) [유괴범 처형 규정]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동족을 유괴하여 노예로 부려먹거나 팔아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죄악을 척결하십시오. 8) [문둥병 환자에 대한 규정] 여러분 가운데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하면 특별히 조심하여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십시오. 문둥병이 여러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제사장들에게 주의 사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9) 여러분이 애굽에서 나올 때 미리암이 불순종하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문둥병의 형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율법이 계속 이어집니다. 입법의 바탕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가치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맺은 사랑의 관계는 제의 행위를 통한 수직적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는 행위 안에서 맺어지는 수평적 관계로도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1-4) 이혼의 법적 근거를 진술하는 부분입니다. 이 규정은 마치 부정한 아내를 이혼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은 아내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처럼 여기는 남편의 일방적인 권리를 제한하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무분별한 이혼을 경계하고, 여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남자는 이것을 기억함으로써 선민 공동체의 기초단위인 가정을 보호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5-7) 새로 아내를 얻은 사람은 1년 동안 군역과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이 면제됩니다(민 8:23-26). 신혼의 즐거움을 누리고, 가정을 돌볼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입니다(6).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줄 때 특정한 품목은 담보가 될 수 없는데, 그중 하나가 맷돌입니다. 맷돌은 각 가정의 기초생계와 직결된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7). 동족을 자기의 경제적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합니다.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인격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대적하고, 공동체를 허무는 악으로서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제거해야 합니다(8).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8-9) 문둥병을 진단하고 처리하는 제사장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그들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라는 명령입니다(레 13-14장). 이 명령의 핵심에는 민수기 12장 1-15절에 기록된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이 세우신 정당한 권위에 대항하지 말라는 권면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에 최악의 질병으로 여겨졌던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질병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일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향한 내 신앙은 수평적 관계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확장되고 있습니까?
가정의 주인은 가족입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 고급 가구들은 주인의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억만금이 있어도 주인이 주인행세를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배경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값이 엄청나게 비싼 이 그림에서 모나리자를 빼고 풍경만 남겨놓았다면 명화로 남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아름다운 낙원이 있어도 주인을 잃은 낙원은 낙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혹시 주인 없는 가정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 설 교 >
권리와 의무
신 24:1-22 / 양인국 목사(서산교회)
1.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권리와 의무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지킬 때 더불어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다.
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권리들은 행복권과 생존권 그리고 평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권리들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행복권과 생존권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은 자신과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함으로 자신에게는 권리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권과 생존권은 모든 사람에게 권리가 되는 동시에 의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처럼 동일하게 생존권과 행복권을 주셨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우리는 1-5절에 언급한 결혼과 관련된 규례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 결혼과 관련된 규례들이란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한 규례들을 말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결혼을 처음 제정하셨을 때 둘이 한 몸이 될 것을 선언하셨다는 것이다(창2:21-25), 이것은 사람이 그들을 임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이혼과 재혼을 허락해 주셨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다음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이 말씀에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복된 삶을 위하여 배필을 지으신 것이다. 이처럼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제청하신 첫 번째 제도이다. 따라서 결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행복이 목적이 된다. 이것은 결혼하여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결혼은 의미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혼함으로 불행해 진 사람들을 위하여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고 또한 재혼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복된 삶을 위하여 제정하신 결혼 제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권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 권리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권은 자신에 대해서는 권리지만 이웃들에 대해서는 의무가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하나님은 생명을 전당잡지 말 것을 말씀하셨고(24:6), 인신매매를 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고(24:7), 전염병자를 격리 시킬 것을 말씀하셨다(24:8,9). 이와 같은 금지의 법들은 모두 생존권과 관계된다. 6절의 말씀이다.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메소포타미아, 애굽, 성서 후기 유대문학에서는 생존의 수단에 절대 필요한 것, 음식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도구들을 “생명”이라고 불렸다. 이런 “생명”에는 식량, 집은 물론 농사기구들과 맷돌과 항아리 솥 등과 같이 음식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포함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라는 말은 이것은 생명과 관계 된 일이기 때문에 저당 잡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우리가 율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존권과 관계된 것들을 철저히 보장해 주셨다는 것이다. 실례로서 본문 외에도 신명기23:24,25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린 자들은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서 배를 채울 수 있는 권리가 보장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가난한 자의 겉옷을 저당 잡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다(출22:26,27,신24:13,욥24:9,10).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겉옷은 밤에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이불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 겉옷은 생명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생존권과 관계된 것들을 보장해 주신 것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또는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 생존권이 보장 될 때만 의미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7절의 말씀이다.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여기 “유인하여”는 말은 “유괴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유괴하여 강제로 일을 시킨다든지 또는 파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주신 생존권을 유린하는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자를 죽임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9절도 동일하게 생존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병에 대하여 주신 규례에 따라 행하라는 의미다. 여기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나병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그 환자를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라는 의미다. 이렇게 하신 것은 나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다. 이것 역시 생존권과 관련이 있다. 즉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생존권이 위협을 당한다면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격리함으로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외에도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주고 전당물을 취할 때 지켜야 할 규례와(24:10-13), 곤궁하고 궁핍한 품꾼에게 품삯을 당일에 주라는 말씀과(24:14-16),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는 말씀(24:17,18), 추수 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일부를 남겨 놓으라는 말씀(24:19-22) 등은 모두 행복권과 생존권에 대하여 주신 말씀들이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권리들과 의무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여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평등이란 소유의 평등 보다는 권리와 의무에서의 평등을 말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처럼 권리와 의무에서 평등할지라도 소유에서는 불평등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유에서는 불평등을 허용하셨다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에는 부한 사람이 있는 반면 빈곤한 사람이 있고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불평등을 허용하신 것은 서로를 돌아보아 부족한 것을 채워 주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으로 채워갈 수 있고 이로 인하여 세상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리들과 의무들을 지킬 수 있는가?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첫째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권과 생존권을 보장 받을 수 있고 둘째 계명에 따라서 이웃을 섬길 때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권리를 누릴 수 있고 의무를 다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행할 때 우리 자신이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복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우리 모두는 더불어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신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김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이 함께 더불어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간음과 음욕
신명기 24:1-4, 마태복음 5:27-32 / 박병욱 목사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정에서 죽습니다. 사람은 그가 속한 가정이 행복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정의 성립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에서 시작합니다. 가정의 형태가 시대마다 문화마다 차이가 있을 지라도 가정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둘 사이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생각을 하십니까? 사업체보다 직장보다 가정이 더 중요한데 가정을 위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하십니까? 학교 공부를 위해서는 수백권의 책을 읽으신 분들이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까?
직장의 상사와는 진지하게 대화하고 상사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그대로 실행하면서도 여러분의 일생의 반려자의 말은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남녀의 관계가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역시 아름다운 삶의 지침서로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이 율법을 악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요 조항들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 해석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째 주제로서 원수 갚는 일, 분노와 공격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두번째 주제로서 오늘 본문인 간음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간음
오늘 첫번째 주제인 간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먼저 마태복음 5장 27-28절을 함께 읽고 그 교훈을 알아보겠습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간음을 아주 무거운 죄로 다루었습니다. 간음을 한 남녀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간음이라고 하는 특정한 행위에만 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결과적 행위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적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 행위가 나오게 되기 까지의 과정과 원인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생각, 행동의 원인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가 깨끗해야 될 뿐만이 아니라, 행위 이전의 우리의 생각이 먼저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 뿐만이 아니라, 잘못된 욕구에 사로잡힌 생각이 이미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행동은 분리된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도의 차이만 다른 두 가지인 것입니다. 행동 이전에 생각이 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행동 이전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감정적 동기가 없는 행동도 없습니다.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은 자신을 실현하여 우리 삶의 본질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생각과 감정은 금방 성향이 되고, 성향으로부터 금방 소질이 나옵니다. 소질은 금방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개성이 되고 개성은 상응하는 결정적인 운명이 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불가항력적인 운명적 사건이 생기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의 긍정적인 생각은 불가항력적으로 느껴졌던 비극적인 운명을 깨어 부수는 위대한 생애를 만들기도 합니다. 가장 작은 원인이 때때로 가장 큰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생각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 중에서도 첫 행동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첫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 즉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행동을 가능케한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빨리 판단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일을 그만 두든지 아니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처음을 다스려라.’ 이것은 모든 아름다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생각을 다스리는 것은 모든 아름다운 삶을 위한 근본명령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처음에 엄격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을 잘해야 합니다. 처음 하는 일을 잘 준비해서 하는 사람이 인정받습니다. 처음 잘 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맡겨도 잘하고, 처음 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은 똑 같은 것을 시켜도 잘 못합니다. 처음 하는 일을 당연히 잘못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음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이 한번이고 인생의 일들이 대부분 한번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일수록 반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결혼은 한번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별을 하고 재혼을 할지라도 같은 결혼의 반복은 아닙니다. 재혼 조차도 여전히 유일한 경험입니다. 결혼도 정신적으로 잘 준비하고 처음부터 잘 해야 합니다. 입시와 취직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작 더 중요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얼마나 준비하십니까?
음욕, 간음의 원인
이 관점을 간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웃의 물건과 소유를 훔치는 사람만 도둑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는 사람이 이미 도둑입니다. 물건을 보고 탐심을 품는 자마다 절도한 자입니다.
생각이 우선적입니다. 생각이 원인적인 행동을 유발하고 운명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에게는 만드시 그림자가 따라다니듯 생각에도 반드시 작용이 나타납니다.
결과적인 간음의 행위 이전에 마음 속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소유욕은 우리 자신과 우리 욕구의 대상을 정신적으로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욕구와 욕구의 대상이 한번 붙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구가 생겼을 때 욕구의 대상과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서 떨어뜨리는 것은 쇠사슬을 끊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과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
여기에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가 중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결과 중심적 해석을 비판하십니다. 결과 이전에 이미 원인이 있습니다. 간음 이전에는 이미 음욕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시각이 문제입니다. 음욕을 품고 사람을 보는 시각 자체가 문제입니다. 여자를 음욕의 대상으로서 보는 것이 이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 속의 음욕도 역시 행동으로 나타난 간음과 동일화 되었습니다.
사람을 소유의 대상, 이용의 대상, 쾌락의 대상으로,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보며 도구화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속에서 사람만을 보는 것, 다른 사람 속에서 남자 또는 여자만을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절대적 가치를 가진 한 인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용 가치가 있는 ‘수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가진 ‘목적’으로서의 인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욕망의 도구’로서의 수단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인데, 사람의 삶은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함께 살아갈 길벗과 파트너는 발견할 수 있어도, 욕망 충족의 대상을 발견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목적이요, 인간이 목적이요, 인생이 목적이요, 생명이 목표입니다.
엄격한 결단
우리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다스리는 일이 쉬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문제가 어려우니까 인생의 비극이 싹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는 데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엄격한 자기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29-30절에서 죄를 짓게 하는 유혹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말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결단의 강함을 나타냅니다.
먼저 예수님은 바라보는 눈이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여기서 눈의 역할은 보는 것인데, 본다는 것은 생각을 말합니다.
여기서 ‘실족케 하다’ 대신에 ‘죄 짓게 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을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죄 짓게 하거든”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만약 네 생각이 너로 저급한 것으로 향해 있다면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저급한 본능과 욕구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손의 잘못을 어떻게 다룰지 말씀하십니다. 눈은 바라보는 지각과 생각을 의미하지만 손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손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즉 ‘너의 행위가 잘못되었거든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오른 눈과 오른 손을 예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 편은 올바르고 선한 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른 눈은 옳은 것만 보아야 하고 왼쪽 눈은 나쁜 것을 보아도 된다는 우스꽝스런 해석을 하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굳이 오른 눈, 오른 팔을 예로 든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생각과 선한 일을 당연한 것으로 하라는 강한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내면적인 생각의 죄와 외적인 행위의 죄가 슬그머니 우리의 삶과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리고 독처럼 스며들기 전에 끊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싸우지 말고 씨름하지 말고, 피하고 멀리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그 어떤 장애물도, 모든 탐욕과 욕망, 모든 공허함, 약함, 실수는 그냥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실패와 실수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모릅니다. 실패를 분석해서 성공으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실패를 되씹으면서 머리속으로 반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수는 끊어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일을 할 것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이런 것들과 치열하게 싸울 필요없이 그냥 멀리 떠나게 하면 됩니다. 부정적인 것을 이기는 방법은 부정적인 일들을 바라보며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행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면 온 육체와 생활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내적인 순결, 영혼의 순결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끊을 것을 끊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생각을 끊고 성령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행위은 끊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혼
오늘 두번째 주제인 이혼에 대해서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먼저 마태복음 5장 31-32절을 함께 읽고 그 교훈을 알아보겠습니다.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증서의 기능
오늘 이 본문에는 유대인들의 심각한 범죄가 나타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고 결혼이 지속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든 결혼의 파국이 범죄적으로 정죄될 것이 아니고, 다음의 삶을 위해서 기회를 주어야 했습니다. 결혼은 파국은 있을 수 있어도 인간의 생명과 삶은 파국이 될 수 없습니다. 결혼의 파국 때문에 인생의 파국이 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했다고 해서 삶과 생명이 모두 포기되거나 버려질 수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결혼에는 파국이 와도 생명은 계속되어야 되고, 삶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아내되었던 여자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꼭 써 주어야 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이혼은 했지만, 이혼한 여자도 다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꼭 써주라는 말씀입니다. 이혼증서의 의무는 당시의 도덕질서에서는 혁명적인 명령이었습니다.
먼저, 이혼증서를 아내에게 주기 위해서는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에 남성 중심의 사회속에서 여성의 권리는 보호되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버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검증을 받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음으로 이혼 당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간음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혼당한 증서가 있으면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어서 다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혼증서는 그의 신분을 사회적으로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혼증서의 악용
이혼증서는 이혼의 결과적 산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을 이혼의 합법적인 원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치되는 일’이 있어야 이혼을 하는데, 이 ‘수치되는 일’을 남자 중심으로 임의로 해석하여 법을 악용하였습니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의 아내가 마음에 안들면 ‘나는 당신의 이점이 수치스러워. 자, 우리 이혼하자. 여기 이혼증서가 있으니 우리는 이제 당신은 자유야’ 이런 식으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남성의 권위를 남용하고 율법의 조문을 오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자신의 욕망 성취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혼은 남편 쪽에서만 제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여자가 원치 않는 이혼을 성사시켰습니다. 수치되는 일을 엄격히 따지지 않고 도리어 그 관심의 중심을 이혼증서로 옮겨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간음의 행위 또는 이혼 증서에 집착하면서 인도주의적인 하나님의 율법을 합리화의 도구로 악용하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혼의 사유인 ‘수치되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수치되는 일’은 ‘음행’만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음행 조차도 여인이 어쩌다가 실수한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을 상품화 하여 성을 파는 정도의 타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분명히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간음죄로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버림 받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성이 자기의 혼인 관계를 자기 마음대로 폐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정당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남편이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당한 이유없이 버림을 받은 여자는 그 이혼 사유가 정당하지 않으므로 사실은 결혼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결혼 관계에 있는 여자를 맞이하여 결혼하는 남자도 역시 간음한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기준에서 볼 때 그는 전 남편과 지속되고 있는 혼인 관계 속에 침입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한번 맺은 혼인 관계는 사람이 마음대로 깰 수 없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는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내쫓을 권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남성들은 여성을 재산권의 개념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여성의 소유화, 대상화, 욕망 충족의 도구화를 비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성의 사람을 도구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남성 중심의 죄악을 꾸짖으셨습니다. 법 조문을 자기 죄악의 형식적 합리화나 합법화에 악용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예수님의 눈에는 가증한 죄악이었습니다.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사랑 / 결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결혼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과의 일치
먼저, 참된 결혼의 첫째 조건은 ‘하나님과 내면적으로 하나된 상태’입니다.
결혼에서 인간과의 관계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결혼은 영적인 결합과 연합과 일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됨으로써 어리석고 악한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결혼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가 참된 결혼의 상태입니다. 진정한 결혼의 모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진정한 신랑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불신하는 저급한 생각이 차지하든지, 육체적 세계의 유혹이 지배를 하면 우리 내면의 하나님과의 일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항상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임이요.
2. 영적 연합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결혼의 두번째 조건은 두 사람의 ‘영적 연합’입니다.
이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가 되었던 두 영의 연합입니다. 참된 결혼은 이 땅에서만의 만남이 아니라, 하늘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만난 만남입니다. 참된 결혼은 단지 육체만의 연합이 아니라, 영혼의 일치입니다. 참된 결혼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마음 속에서 축복하신 영혼의 내면적 조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결혼하기 전에 영으로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손가락에 끼는 반지를 교환하기 전에 영혼의 반지로 풀수 없는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 결혼은 파기할 수 없는 영적이고 신비한 결혼 반지입니다. 영적인 결혼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연합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런 두 영혼의 신비적 연합을 깰 수 없습니다. 모든 저속하고 세속적인 조건들도 이 둘을 따로 떼어놓지 못하고, 그저 죽음이 잠시 동안 두 영혼을 떼어놓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런 영적인 연합이 있으면서 육체적이 연합이 있다면 이 육체적 연합은 아주 거룩한 연합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3. 진정한 사랑
진정한 결혼의 세번째 조건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결혼은 진정한 결혼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했고,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남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것이고, 위하여 죽기까지 할 수 있는 대상은 진정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섰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6-18).
진정한 연합이 없고 사랑이 없는 관계를 향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것은 결혼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부부가 아닙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분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결혼의 이상이야 좋지,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나? 현실적으로는 공허한 메아리지.’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허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분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결혼할 때는 예수를 믿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우리 부부는 영적인 면에서는 확신이 없어.’
‘지금 우리의 가정이 이상적이지 않는데, 그럼 이혼하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거 아닌가?’
그렇다고 이혼의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과 현실의 관계를 보면서, 삶의 이상과 현실이 차이가 너무 난다고 현실을 포기해버려야 합니까? 현실이 이상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살해버려야 합니까? 이런 사람은 심각하게 병든 사람입니다. 이상은 우리를 좌절로 이끌지 않고,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이상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삶을 향하여 결단하게 만듭니다.
결혼의 이 엄청난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결혼을 했을지라도, 결혼의 이상은 현실 속에서 이 이상적 모델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격려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황금율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먼저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반려자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먼저 대접을 하십시오. 당신 먼저 이상적인 결혼을 향하여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고는 아름다운 가정생활, 결혼생활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이 이상을 향해 나갈 길 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통해서 행복해 지느냐, 불행해 지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마도 불행해 지는 것을 결혼 생활의 목표를 삼는 분은 아무도 없을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적극적인 행복의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또 다른 선택이 있는 것처럼 가정을 태만히 가꿉니까?
결혼 생활에서는 행복하게 되는 길 밖에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도록 노력하는 행위가 이미 행복한 것입니다. 신뢰하려는 행위 속에 이미 신뢰가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희망하는 믿음 속에 이미 희망이 싹이 틉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이미 사랑입니다. 결혼과 가정의 이상을 향하여 바라보는 순간 이미 이상적 결혼과 가정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일치되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영적 연합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충만하시길 빕니다.
이혼과 재혼
신 24:1-4 / 피영민 목사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모압평야에서 전한 세 편의 설교 모음집입니다. 율법이라는 뉘앙스 때문에 지극히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현대 사회처럼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받고 법원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광야에서 이런 문제까지 심각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혼율에 대해 2004년도에 발간된 보건복지부의 통계와 법원행정처의 통계에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예년에 비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우리나라 이혼율이 47%이며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에서는 이혼율을 9%라고 발표했습니다. 차이가 드러난 이유는 보건복지부와 법원행정처의 이혼율 통계 집계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한 해 동안 결혼한 신혼부부의 총계와 그 해에 이혼한 부부의 총계를 단순 비교했기 때문에 47%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법원행정처에서는 이혼한 가정의 수치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가정의 수치를 나누는 방식으로 통계를 냈기 때문에 9%라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계산으로 볼 때, 우리나라 열한 가정 중 한 가정은 이혼을 경험한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이 율법의 규례가 어떤 것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 율법의 이혼 규례
모세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이혼 규례의 내용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1절)입니다. 그 당시에 결혼이란 아내를 취하여 데려오는 것이고, 이혼이란 집에서 내어 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취하였는데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어 그 때문에 도저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본문의 정의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집에서 내보냄으로써 이혼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와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는 사회적인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둘째 남편(後夫)이 그 여자를 기뻐하지 않아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된 경우나, 혹은 재혼한 둘째 남편이 죽는 바람에 이 여자가 다시 혼자가 되었을 경우, 모세의 율법은 이 여자가 다시 첫 번째 남편(前夫)에게 돌아가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일, 즉 범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결혼과 이혼 재혼에 관한 다른 성경구절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본문의 모세의 율법만 고려해서 본다면 이혼이나 재혼은 죄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이나 재혼을 죄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혼한 사람이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시 전 남편과 결합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모세의 율법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바로 남자가 이혼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두 가지 학파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첫째로 보수적인 샴마이학파는 수치 되는 일을 아내에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된 경우에 국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에게서 처녀인 표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든가, 결혼생활 중에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국한하여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가 조금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에게서 처녀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신명기 22장 13-21절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취하여 그와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가로되 내가 이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그 처녀의 부모가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가지고 그 성읍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처녀의 아비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인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 씌움을 인하여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비에게 주고 그 여자로 그 남자의 평생에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신22:13-21).
처녀인 아내를 누명 씌어서 내쫓으려고 하는 사람은 태형과 은 일백 세겔의 벌금형을 받고 결국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자의 말처럼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인 표적이 없거든 처녀를 그 아비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상당히 엄하지만 이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미 이와 같은 율법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있어서 수치 되는 일이 성적인 부정에만 국한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힐렐학파는 이 수치 되는 일을 자의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이 맛이 없다든가, 요리를 자꾸 태운다던가, 인상 쓰는 것이 밉다든가 하는 이유까지도 모두 포함이 된다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해석이 옳다면 어떠한 이유라도 트집을 잡아서 아무렇게나 이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샴마이학파의 보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힐렐학파의 광범위하고 자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수치 되는 일이란 비록 성적인 부정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정의해야 합니다.
제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한 부인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이 부인은 백인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인데 내용인즉 슨, 현재 살고 있는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할지 그냥 살아야 할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기 남편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머리에 총을 들이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마나 곤란한 문제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만약 그런 사람하고 당장 이혼하라고 답해주면 남편 되는 사람이 제 머리에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냥 살라고 답변했다가 그 남편이 혹시라도 총을 발사해서 그 부인이 죽게 되면 이 여자의 가족들이 나에게 쳐들어와서 당신이 잘못 상담해준 탓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고 탓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나도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당신 편이고 저도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 당신이 그 남자와 계속 살아도 나는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고, 이혼을 해도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결혼 생활 중에는 성적인 부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보수파와 자유파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 힐렐학파, 즉 자유주의파가 우세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이상적인 창조질서를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이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또 물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버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고 대답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그게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완악한 상태에서 구제하기 위해 이런 규례를 준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2. 이혼 규례의 영적인 교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와 같은 이혼규례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저급(低級)한 가치보다 고급(高級) 가치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모든 가치는 중요하지만, 가치가 충돌할 때에는 고급 가치를 취하고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가치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다이아몬드와 꿀꿀이죽을 주면 돼지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당연히 꿀꿀이죽을 먹고 다이아몬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다이아몬드와 맛있는 음식을 주고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다이아몬드를 고를 것입니다. 사람은 가치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생각할 때도 무조건 이혼은 안 된다는 기준으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에는 어렸던 제 큰 아들에게 칼로스라는 남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칼로스는 편모 밑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은 칼로스의 어머니에게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고향인 남미는 카톨릭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혼을 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망와서 산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혼이 안되서 고향을 떠나 멀리 타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 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모세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가치의 고저와 경중을잘 판단해서 저급한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고급 가치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백년해로를 언약해서 그 언약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가치입니까? 그 언약을 깨면 마땅히 슬픔과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도저히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살 수 없다면, 남편과 아내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도저히 함께 살을 맞대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결정적인 흠결이 있는 경우에는 언약 준수의 의무보다 한 단계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경우에 모세는 언약 준수의 의무보다도 인간의 평생 행복 추구권을 더 중요한 가치로 보았습니다. 비록 할 수 없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이혼을 당한 여자에게도 이혼증서를 줘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것은 그 여자에게도 평생 동안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세가 인정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재혼을 한 후에는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혼해서 혼자 살다가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서 사는 것은 괜찮지만 재혼 후에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존엄성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윤리가 개나말 수준으로 전락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언약준수도 귀한 가치요, 평생의 행복추구권도 귀한 가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도의 존엄성을 갖는 것도 결코 희생될 수 없는 고급 가치라는 사실은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지라도 고급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본문 5절에 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 갓 결혼한 남자에게 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가야 하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혼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무조건 입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신혼을 맞은 남자에게 일 년 동안 군 입대를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군대에 가서 국토를 방위하는 것도 중요한 가치지만 새로 장가든 사람이 경건한 후손을 낳고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토방위보다 더 귀한 고급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6절에도 동일한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맷돌의 전부나 그 위짝만이나 전집하지 말찌니 이는 그 생명을 전집함이니라.”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당연히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는 것은 귀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빚을 갚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맷돌을 모두 전당잡는다든가, 아니면 모두 전당받기는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맷돌의 한 짝 만을 전당잡아서 어차피 맷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빚진 사람의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빚을 갚는 것도 중요한 가치지만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저급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급 가치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교훈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서 주일 성수도 하지 않는 등 신앙을 멀리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가치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 분명히 저급한 가치입니다. 일시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영혼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의 경중고저(輕重高低)를 잘 분별해서 귀하고 고상한 고급 가치에 헌신해야 합니다. 고급 가치를 위해서 때로는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현실과 이상적인 질서 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이혼이란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인간의 현실이 타락된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서 모세가 이혼규례를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이상적인 질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 교회와 가정은 모두 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영역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원죄 가운데 있고, 설령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품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옛 성품을 그대로 안고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실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질서의 완악함을 고려해서 규례와 법과 말씀을 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한 국가, 사회, 가정의 현실이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적이지 않다고 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자꾸 갖게 되면 그 사람의 인품이 부정적이 됩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완벽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등록하게 된다면 그 교회의 완벽성은 그 사람 때문에 당연히 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죄성과 문제와 이상적인 질서가 깨지는 일들이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이 깨졌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이나 재혼을 했다고 해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얽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현실 상황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황과 죄 진 이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과 하나님의 전략의 차이입니다. 마귀는 사람이 죄 짓기 전에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그 때부터 마귀는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죄 짓기 전에는 이상적인 질서를 주시면서 죄 짓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연약해서 죄를 짓게 되거나 이상적인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우리가 있는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전까지는 인간 사회에서 이상적인 것을 발견할 수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처한 현실 속에서 좌절하여 부패와 타락과 침륜으로 나아갈 것인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상적인 질서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순간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신명기 전체의 사상도 사람이 어느 상황에 처해 있든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어떻습니까? 어떤 현실이든 하나님은 정죄치 않고 여러분을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 속에서 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둥병에 대해서
신명기 24:8-9 / 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진영, 즉 텐트촌이 있습니다. 이 진 바깥에서 누군가 살고 있습니다. 레위기 13장, 14장에 나오는 문둥병 환자들이 그들입니다. 반면에 텐트촌 내에는 멀쩡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문둥병 환자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자기네들은 저런 무서운 저주를 안 받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문둥병 환자 되었다가 완치된 자들이 생깁니다. 제사장들이 이 여부를 관찰하고 판정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풀린겁니다. 따라서 이들은 다시 건강한 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둥병 환자의 치료와 관련된 율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문둥병 외의 사람들은 문둥병 환자에게 일어난 변화와 율법의 내용과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작업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모두 애굽에서 살다가 기적으로 거기에서 탈출에 성공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제사장이 있고, 그 대제사장과 하나님과 통하는 사이이니 대제사장의 반복적인 제사행위가 그들을 모두 ‘거룩된 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문둥병 환자가 발생된 겁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체가 미래의 한 사건을 향하여 흐르는 물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미래에 어떤 약속으로 모든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지를 이스라엘 나라는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최종적 해답이라고 간주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여태껏 자신이 정리한 것을 최종적 하나님의 뜻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사건을 유발하면서 개입하게 됩니다. 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문둥병 환자 발생’입니다. 저주의 표상이지요. 거룩한 하나님의 진에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로서 문둥병자들이 사는 진 밖에, 새로운 ‘거룩의 기준’이 개시되려고 합니다. 어떻게요? 저주받았다는 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저주 안에서 거룩이 나오는 겁니다. 반면에 진 안에 있는 자들은 기존의 거룩을 붙들고 이미 저주가 해소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즉 공간의 구분을 통해서 거룩과 저주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완결된 거룩과 저주를 구분 짓는 공간은 신약에 와서 ‘십자가 사건 안’으로 확정됩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의 오해는 계속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구성될 거룩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동(移動) 중에 있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다시 진 밖에서 진 안으로 들어오는 그 과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세 단계를 통해서 율법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레 14장) 첫 번째 단계는 제사장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가 필요합니다. 새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흐르는 물과 함께 질그릇에 담아둡니다. 다른 한 마리는 죽여서 피를 짜냅니다.
그 피를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살아 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 보냅니다. 두 번 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제물이 아닙니다. 7일 동안 문둥병자 되었던 그 사람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아직 진 안에 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제물로서 어린 수양과 1년된 어린 암양과 고운 밀가루과 기름 섞인 소제물과 기름입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기 8장에 나오는 아론의 대제사장 위임식과 아들에게 행하는 행사를 그대로 합니다. 어린 수양을 속죄제로 드리면서 피를 받아내어서 제사장이 문둥병 들린 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기름을 가지고 문둥병 들렸던 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편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것은 곧 피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써, 기름 위에 피 바르는 대제사장 위임식에 시행한 속죄 제사의 절차와 대조가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지속적인 저주의 표상이 발생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도 이스라엘의 존재 바닥에는 문둥병이라는 저주가 깔려 있습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단독적으로 세 가지 기적을 통해서 애굽에서 벌어진 일의 내막을 알려주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우리는 지팡과 모세의 손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즉 애굽은 모세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었던 겁니다. 모세의 사적인 감정은 하나님의 일에 훼방이 될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적과 관련되어 애굽에 파견됩니다.
두 번째 기적은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보라고 하십니다. 즉 모세의 시선으로 모세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모세가 보기에 멀쩡해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달랐습니다. 지팡이를 쥐었던 모세의 손을, 뱀과의 전쟁의 결과로만 멀쩡하게 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모세는 여전히 저주받은 자일 뿐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강물을 떠서 땅에 뿌리니 피가 된 겁니다.
이제부터 땅이 저주받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악마의 전쟁이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도 내내 바탕에 깔리게 됩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의 누나가 기어이 사단을 냅니다. 모세가 흑인 여자와 혼인하려 하자 누나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비선실세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리암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미라암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여 문둥병 환자가 됩니다. 이로서 축복이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아는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7:11에 보면, 문둥병 환자 10명이 한꺼번에 나음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에게 도로 돌아온 자는 오직 이방인 환자였던 단 한 명 뿐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알았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분인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은 문둥병 걸려도 마땅함을, 낫게 된 후에 알게 된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저주를 대신하시는 율법 정신의 완성을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 정신이 우리의 삶의 바닥이 될 때,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행하심을 알고 구원에 초조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