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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지혜 12,13.16-19
제2독서 : 로마 8,26-27
복 음 : 마태 13,24-44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순례자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삶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평생 순례자요 구도자요 수행자입니다.
결코 목표 없는 방랑자도 나그네도 아닙니다.
만물을 돌보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힘은 정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우리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하여 하느님은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지혜서가 말하는 이런 하느님을 찾는 평생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하늘 나라의 비유는 하느님을 찾는 순례자를 위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지름길이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입을 열어 비유로 말씀하시며, 세상 창조 때 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십니다.
첫째, 자비로워야 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참으로 심오한 비유입니다. 공존공생의 사랑과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선의 밀 같은 세상이나 사람은 환상입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게 하겠다.”
제자들의 풋 열정과 경솔함에 제동을 거는 주님이십니다.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게 주님의 자비요 지혜요 인내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밀과 가라지의 분별은 물론이고 가라지만의 제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현실만 봐도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밖의 가라지를 제거하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의 관리가 우선입니다.
얼마 전 공원의 잔디밭을 깨끗이 관리하는 평범한 사실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아 저렇게 자주 관리하니 공원이 아름답고 깨끗하구나!’
그냥 놔두면 잡초 밭이 되었을 텐데 부단히 잡초를 뽑아주고 깎아 주니 말끔한 잔디밭입니다.
바로 부단한 회개와 절제와 극기의 수행을 통한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이래야 가라지의 세력이 번성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에 우선하는 수신(修身)입니다.
둘째, 늘 푸른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겨자씨의 비유가 가르쳐 주는 '희망'의 교훈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바로 내적성장에 대한 비유입니다.
육신의 외적성장은 멈추거나 쇄락할 지언정, 우리 영혼의 내적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성장, 희망의 성장, 믿음의 성장입니다. 마음 역시 계속 넓어지고 깊어져가야 합니다.
이런 내적성장이 우리의 참 희망입니다.
우보천리요, 천리 길도 한 걸음 부터입니다. 거목의 나무들이 내적성장의 상징입니다.
몇 날 동안 자란 나무들이 아니라 하루하루 오랜 동안 자랐기에 저렇게 큰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희망을 잃고 내적성장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할 때 서서히 무너지는 내적 삶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스스로 항구히 하느님을 찾는 노력과 더불어 내적성장이요 늘 푸르른 희망의 삶입니다.
과연 늘 푸른 희망에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는 내적성장인지요?
셋째, 믿음의 누룩, 믿음의 효소가 절대적입니다.
누룩의 비유가 상징하는바 믿음의 효소요 믿음을 통한 내적성숙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우리 삶에 믿음의 누룩이 있어야 기쁨과 평화의 발효인생입니다.
제가 즐겨드는 비유가 부패와 발효입니다. 비슷한 현상 같지만 천지차이입니다.
부패의 악취요 발효의 향기입니다. 부패된 음식은 버리지만, 발효된 음식은 먹습니다.
과연 내 인생은 발효인생인지요 부패인생인지요.
기도와 말씀, 회개를 통해 '믿음의 수행'에 충실할 때
믿음의 효소가 우리 삶을 발효시켜 풍요롭고 향기로운 내적성숙의 삶이 되게 합니다.
효소의 신비한 효능처럼, 믿음의 효소 역시 효능 또한 무한합니다.
믿음의 누룩이, 효소가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령께서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사랑을, 희망을, 믿음을 아시는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마음 속 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희망이요 힘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며
내적성장과 내적성숙을 촉진시켜 주시어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43).
바로 오늘 여기 지금이 그때입니다. 아멘.
밀과 가라지 구분법
전삼용 요셉 신부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이란 소설로 영국 문학계에 길이 남게 된 여성 작가입니다.
2017년부터 10파운드 신권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오만’은 남자 주인공의 특성,
‘편견’은 여자 주인공의 특성을 생각하며 썼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오만하면 편견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시작되기 전의 남녀의 마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주인공은 매우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여인입니다.
사람을 첫인상, 사교성,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와 제스처 등으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걸려들어 가장 안 좋게 판단을 받는 남자가 엄청난 재벌이자 미남인 다아시입니다.
다아시는 물론 돈도 많지만 무표정하고 사교성 없고 거만하게 사람을 깔보는 오만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조금씩 사랑에 빠지게 되자, 엘리사벳은 거만하고 오만하게만 보였던
다아시에게서 숨어있던 따듯하고 배려 깊은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오만하게만 보이던 다아시가 엘리사벳 앞에서는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벳은 이런 다아시를 보며 지금까지 판단해 왔던 모든 것이 일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둘을 더 겸손하게 만들어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 쌍의 완전체로 만드는 힘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데 그 씨가 뿌려지면 저절로 자라나서 새가 쉬어갈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자신 안에 뿌려지면 다른 이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십니다.
씨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즉 성령이시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받는 그분의 씨가
우리 안에서 변화와 행복의 열매를 맺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만나야만 내 자신의 오만과 편견이 사그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여인이 밀가루 반죽에다 누룩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밀가루가 자기 혼자 부풀어 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 누룩을 넣어야하는데, 그 누룩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내 안에서 작용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하늘 나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기쁨과 평화”라고 정의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느님나라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참 행복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날에 밀은 천국으로 가라지는 지옥으로 보내진다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밀은 밀이었고 가라지는 가라지였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밀은 그리스도를 만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가라지는 그런 척 하는 사람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다른 종교의 사람이거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밀은 처음엔 서로 구별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참 신앙인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사람이 가라지인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대표적인 인물이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처음엔 밀과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가라지였음을 스스로 드러내었습니다.
밀과 같은 인물은 많은 제자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를 들고 싶습니다.
그들은 암암리에 그리스도의 제자로는 살고 있었지만 유다처럼 대놓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워낙 가진 돈이나 명예가 많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그 처참하게 처형당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밝히고
그의 시신을 내려 자신들의 무덤에 옮겨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
즉, 가라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이란 소설을 쓰게 된 소재는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였습니다.
제인은 평생 미혼으로 살기는 했지만 한 오만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비커밍 제인’입니다.
제인은 오만과 편견의 여 주인공 엘리사벳처럼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시골 처녀였고
당시엔 잘 받아들여지지 않던 여성 작가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재정난이 심했지만 그것 때문에 기가 꺾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부잣집 외동아들이 자신에게 청원을 하지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여인은 그 청원을 거절합니다.
그러던 중 도시에서 온 톰이라는 거만한 변호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도 무시하고 바람둥이 끼도 있지만 왠지 그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톰도 사실은 대법관인 삼촌 때문에 근근이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가난뱅이 변호사였습니다.
삼촌이 돌봐주지 않으면 톰과 가족은 굶어야만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삼촌은 가난한 글 쓰는 여인과의 혼인을 반대합니다.
물론 톰도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삼촌이 원하는 여인과 약혼을 하게 됩니다.
제인은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톰을 원망하며,
자신도 가족을 위해 부잣집 외동아들의 청혼을 수락합니다.
둘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는 했건만,
현실의 벽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그 현실의 벽에서 먼저 무너져버린 톰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톰은 갑자기 제인을 찾아와 서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서 불행해지지 말고 함께 도망쳐 다시 시작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둘은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도망을 시도합니다.
그러던 중 톰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처지가 안 좋은 톰의 가족의 형편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지만, 톰의 가족에게 톰이 없으면 그 가족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합니다.
결국 이번에는 제인이 먼저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각자의 길로 가자고 하며 톰을 떠납니다.
자신도 톰도 결국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듯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당사자들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과 가라지가 구별될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결국 ‘열매를 맺을 때’ 구별됩니다.
그 전에는 가라지가 밀과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이 될 때는 그 사랑이 가장 충만한 때입니다.
그만큼 더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밀이었음을 증명한 때는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때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열매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칠 때 비로소 참 열매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가라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막상 목숨을 바쳐야 할 때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가라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타 언덕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이 밀입니다.
골고타를 오른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잃게 만들고 목숨까지도 요구하실 때
‘아멘!’하고 응답할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위해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평생 성당을 다녀도 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자녀가 갑자기 죽는 등의 큰일을 당했을 때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하느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가라지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목숨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도 밀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가라지로 밝혀지는 일이 없도록, 지금 당장부터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많은 열매를 맺는 밀로 자라나야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날 웬 할아버지가 먼지 쌓인 공사장에서 벽돌을 쌓고 있는 건장한 세 젊은이에게 다가갑니다.
먼저 첫 번째 남자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지요. 그는 조금 무례하게 대답합니다.
“안 보여요? 벽돌 쌓고 있잖아요. 하루 종일 이놈의 일을 한다고요. 벽돌 쌓는 거요.”
할아버지는 두 번째 젊은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지요.
“저는 벽돌공이에요. 지금 내 일을 하고 있죠. 내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 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니 행복해요.”
마지막 사람에게 다가가면서 할아버지는 그의 눈이 기쁨으로 충만하고 얼굴이 햇살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의욕에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어요.”
일의 내용이나 성격은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명을 따르고 있다는 굳은 마음이 아닐까요?
이 안에서 커다란 만족감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삶 안에서 큰 행복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첫 번째 젊은이의 모습처럼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삶 안에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화려하면서도 쉬운 일들,
또한 물질적인 욕심들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소명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큰 것에도 만족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좋은 씨가 뿌려진 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 가운데 원수가 몰래 심은 가라지입니다.
좋은 씨와 나쁜 가라지가 함께 있다 보니 좋은 씨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즉, 주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모든 악한 생각과 행동이 바로 가라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대단합니다.
혹시라도 좋은 씨가 뿌려진 우리가 상할까봐 마지막 날까지 내버려 두겠다고 하시지요.
이제 우리의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혹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려는 주님의 사랑은 보지 않으면서
내 곁에 나쁜 가라지가 있다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변 환경, 성격, 가족, 이웃 탓 등을 외치면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모두 좋은 씨가 뿌려진 좋은 밭입니다.
물론 가라지들이 들어와 방해하고 있지만, 분명 마지막 날에
우리의 좋은 열매는 커다란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이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더욱 더 깊숙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불평불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커다란 만족감과 큰 기쁨과 행복이라는 소중한 열매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 곳간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인내하시는 모습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것은 곧 심판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시는 애절한 사랑입니다.
이 시간 인내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더 모범적인 삶을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모범적인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받고 신앙생활을 멈추고 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보기 싫어 다른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가 보면 또 거기에도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뭐 피하려다 더 큰 골치덩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키우게 됩니다.
맘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일을 하면 재미있다고 합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보면 서로의 속을 보게 되고 마음 상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서로의 열심히 달라서 비교하게 되고 열심히 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못마땅해 하며 속상해 합니다.
내가 커지지 않는 한 불평불만의 요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 마음단속을 먼저 해야 합니다.
MBTI라는 성격검사 유형이 있는데 검사의 결과물을 가지고 같은 성향끼리 모여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싫어하고 못마땅해 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의 그룹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험담하고… 뒷 담화를 한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서 나의 속을 보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챙겨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만 모아 놓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다시 그 맘 맞는 사람들 중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인생 여정의 한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완벽하지도 않고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가라지’이고, ‘나는 밀’인양 ‘이렇다’‘저렇다’ 상대를 판단하게 됩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 말고는 심판할 수 없음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부디 하느님행세를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잘 안되고 악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잘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못된 사람을 왜 그냥 두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밀과 악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가라지에 대해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하십니다.
왜 그냥 두실까요?
1).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잘못했으면 즉각 벌을 내리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참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그래도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여러분이나 저나 잘못을 했을 때 즉시 벌을 내리셨다면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의 기회, 은총의기 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독서 지혜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만 힘을 드러내시고,
너그럽게 심판 하시며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2,9).
세상이 변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2). 의인들에게는 단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금도 불에 달궈야 순금이 됩니다. 시련과 역경을 통해 단련되고 강해지게 됩니다.
악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입니다.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얌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를 다듬어 주고 견고하게 하는 복덩이입니다.
자, 옆에 계신 분에게 ‘당신은 복덩이입니다.’하고 말씀해 주세요.
3). 악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선은 다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선한 모습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아무도 완전히 나쁘거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완전히 선하시고, 악마만이 완전히 나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화의 비결은‘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공로가 많은 것처럼 실수와 잘못, 과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곳간에 쌓이기를 원하시기에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심판보다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설령 우리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주님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러진 갈대 같은 삶을 살지라도 우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매순간 주님께 희망을 둘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율곡선생도 “선한 것이거든 그 의리를 다하고, 악한 것이거든 그 싹을 자르라.”하셨습니다.
뿌리를 뽑으라고 하지 않고 ‘싹을 자르라.’하신 것은
선과 악의 뿌리가 얽혀있어서 이것을 뽑으면 저것이 함께 뽑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좋은 것 속에 나쁜 것들이 들어있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어김없는 구별’이루어져 좋은 것이 곳간에, 즉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거창해집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됩니다.
비록 우리가 행하는 선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그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가라지와 추수 때까지 함께할 수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공로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모함하고, 빈정거리고, 험담하며 사사건건 반대합니까?
그래서 미워죽겠습니까? 속상하고, 분하고, 야속합니까?
그 사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의세력에 휘둘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고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악의세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아 주셨듯이 악인들에게도 인내롭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하느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밀로 머물러 곳간에 쌓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한 이들도
어느 날 하늘나라 곳간에 저장되는 값진 밀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신앙적 삶이란,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마태오13,24-25)
여러분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좋은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었다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을 때,
우리는 천사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깨끗하고 맑았었던 우리의 모습을 가만 나두려 하지 않았고,
그 상처는 세월과 함께 혼탁해진 마음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가라지 씨도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지고 뿌리를 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가라지를 걸러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때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거두어들일 때,
우리의 마음이 맺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모두를 보시고 결정하신다고 합니다.
그분 앞에 설 때까지, 철저하게 선을 선택하던, 악을 선택하던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참 무서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엉터리라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사람으로 삶을 시작했고, 좋은 사람으로 그분께 돌아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삶의 여정 속에 뿌려진 나쁜 씨들로 인해 상처가 생기고 엉터리 열매를 맺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좌절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좋은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는 마음을 만들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삶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약함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분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결국 신앙적 삶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우리가 지녔던 그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주일 복음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희망의 성령님, 제가 말씀 안에서 당신이 주시는 깨달음의 은총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아멘.
세밀한 독서(Lectio)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사람’에 비유된다.
그것도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말마디에 잠시 숨을 고른다.
사람은 쉬이 변하다가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 자기만의 수고로 자기가 원한 바를 얻어내지 못한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환경이나 상황이 받쳐주지 않으면 스스로 우스운 사람이라고 자책하거나
‘해도 안 된다.’라는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변화’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이 ‘뭘 해도 안 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변화는 분명 가치 지향적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게 변화다.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목적을 염두에 둔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래서 늘 ‘내일’을 염두에 둔 말일 수도 있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내일을 위해 노력할 때이지, 풍성한 내일은 아니야.’ 하면서
늘 ‘내일’이라는 ‘잡히지 않는 목적’을 품어 안는 말이 변화일 수 있다.
그런데 변화는 ‘뭘 해도 안 되는 경우’ 앞에서 다시금 ‘지금’으로 돌아오게끔 하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하려다가도 막상 장애물을 만나면 지금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게 변화의 또 다른 면이다.
장애물을 제거할까, 아니면 가만히 둘까.
제거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조급증에 우리는 저 장애물을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에 빠져
지금도, 내일도, 그리고 나 자신도 잊고 살아갈 경우가 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수확 때까지 둘 다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는 이유는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좋은 것’이 다치기 때문이다.
지금 좋은 것이 내일 추수 때까지 좋은 것으로 남기 위해 지금 그대로 두어야 한다.
지금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별되게 깨어 살아야 저 ‘내일’이라는 게 보장된다는 논리다.
변화하려면 지금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고, 하늘나라가 도대체 무엇인지
깨어 살펴보는 것이 신앙인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된다.
묵상(Meditatio)
하늘나라가 미래에 펼쳐질 보상으로만 생각하고 가르치는 이들,
그래서 늘 지금, 현재를 자꾸만 미래를 위한 투자의 시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들,
그들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가르침을 하도록 허락받은 걸까?
신앙의 시간을 자꾸만 완성을 위한 미완성의 중간단계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현재를 폄훼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미래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이들의 지향점은 뻔하다.
현재를 독식하겠다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나은 저 ‘내일’을 꿈꾸게 만들고 그들은 지금의 명성과 부를 움켜쥐고자 한다.
세상이든 교회든 그런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그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지금’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너무 의존적인 삶을 살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지는 안 않았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한 하늘나라가 뭔지 깨닫기 위해선
가라지 틈에 밀로서 버텨야 할 자기 존중, 자기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내가 변화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지켜야 할 정도를 걷는 꿋꿋함이 있다면
저 먼 미래에 우리는 ‘좋은 씨’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낼 것이고
그것으로 하늘나라의 완성을 맛볼 것이다.
하느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지, 저 미래에 서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분이 아니시다.
기도(Oratio)
지금 제 곁에 머물러 저를 위로하시는 주님, 주님이 저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저를 아끼고 보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야곱이 우물>
마음 밭 묵상
이상민 신부
사제가 되어 고해성사를 들을 때면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고해소에서 정작 본인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주변인의 잘못을 고백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즉 본인은 정말 좋게 살려고 했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주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고해소에까지 그런 이야기를 할까 짐작해 보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더 자신과 상황을 성찰해 보시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나는 가라지 투성이 밭인가, 아니면 좋은 밀밭인가를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좋은 씨앗을 우리에게 주셨을 텐데 왜 우리의 마음에는 가라지가 자라는 걸까요?
그런 가라지가 뒤덮인 밭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좋은 씨앗을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좋은 말씀의 씨앗을 우리 안에서 잘 키워야 하는데
남을 시기하고 남을 미워하는 그러한 웬수가 심고 간 가라지를 오히려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자기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더더욱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남을 의식하면서 시기와 질투하는 그러한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웬수에게서 온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고운 말씀의 씨앗을 잘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떻게 가꾸고 있습니까?
<생활성서 ‘소금항아리’>
힘주시는 하느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시며,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하느님이신지 숙고케 합니다.
힘쓰시는 분인가, 힘주시는 분인가?
심판하는 하느님이신가,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신가?
심판으로 끝나시는 하느님이신가, 끝까지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신가?
의외로 많은 분에게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하느님, 벌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시고 벌주시는 하느님은 잘해야만 상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우리의 교리가 가르치는 하느님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과 벌을 주시는 것도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상과 벌이 심판의 끝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라는 뜻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저의 사단장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신 분이고,
군인으로서만 끝냈다면 훌륭한 군인으로 남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분은 부대원들이 잘하면 별게 아닌데도 상을 잘 줬고,
자기의 지휘방침을 어기면 아주 엄하게 벌을 내림으로써
부대원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부대원들의 사기도 무척 높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대한 뒤 얼마 안 있어 이분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많은 사람을 눈 깜짝 안하고 죽이는 것을 보고
이분의 상벌은 자기 말을 듣게 하기 위한 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말을 들으면 상과 혜택을 주고
자기 말을 거역하면 가차 없이 벌을 주고, 불이익을 주는 거였습니다.
상벌을 활용하여 자기 세력을 쌓고, 자기를 위해 그 권력을 휘두른 겁니다.
하느님도 이분과 같은 분이실까요?
우선 하느님은 힘의 주인이시기에 힘을 모으거나 쌓을 필요가 없고,
그런고로 힘을 잃지도 않고, 힘을 잃을까봐 염려하지도 않으십니다.
또 그런고로 힘을 함부로 쓰지 않으시고 조급하지도 않으십니다.
힘을 함부로 쓰는 것은 조금 있는 힘을 과시하시고파 그러는 것이고,
힘이 있어 과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써야할 때만 쓰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 무리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힘이 없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힘이 들기에 빨리 끝내고 싶지요.
전임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그렇게 무리하고 조급하게 추진한 것은
국민들을 설득할 힘도 없었고 5년의 힘밖에 없었기에
자기 임기 내, 다시 말해서 힘이 있을 때 해치우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때를 고집하지 않고
네가 받아들일 때를 기다리고, 모두의 때가 바로 자기의 때입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쓰지만
자기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힘 있는 사람은 그 힘을 남을 위해 씁니다.
그러니 힘의 주인이시고 원하시는 때에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심판에 서두르거나 조급치 않으시고 상과 벌을 적절히 주시며
당신 구원의 초대에 우리가 스스로 응답할 때를 기다리겠지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함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코자 하시니
우리는 더더욱 함부로 남을 가라지라고 심판하려들지 말 것이고,
힘닿는 데까지 이웃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