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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등학교 시절(염리동 생활)》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가장 오랜 시간을 염리동 집에서 보냈을 것 같다. 왜냐면 그곳에서 경동고등학교에 버스통학을 했던 여러 가지 추억들이 많은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그렇게 짐작한다.
뼈저리게 기억되는 것은 중학교 때에, 재 때에 공납금을 못 내어서 수업을 받던 교실에서 쫓겨나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로, 사립학교에는 어쩔 수 없이 가정형편상으로 다닐 수 없다고 여기었다.
막연하게 생각하기에, 공립학교에서는 국가에서 학교를 운영함으로 그러한 공납금으로 인하여 수업에서 쫓겨나는 고통은 덜하리라고 믿었고, 공납금액도 저렴했던 이유로 공립학교인 경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립학교에서는 성적이 나쁘지 않은 학생은, 타 학교로 잘 보내지 않는 방침으로, 내가 공립학교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진학할 고등학교를 알아보던 차에, 학교 사정은 고모부께서 잘 아실 거라 믿어 상의를 했더니. 경동고등학교를 선택하여 주셔서, 그 학교의 원서를 들고 담임선생님과 진학에 관한 상담을 하였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극구 반대하시며, 타교에는 원서를 써 줄 수 없다고 하였지만, 나의 형편을 듣고서야, 타교에 어쩔 수없이 가겠다면, 내 성적으로는 '경복고등학교도 가능하다고 그 학교를 추천하시었다.
꽤 내 성적이 좋은 편이었나 보았다.
경복고등학교는 경기, 서울 다음으로, 오대 공립학교 중에서도 세번째의 상위학교이었고,경동고교는 오대공립 중에 용산고와 비등하다고 하였다.
정확한 판단은 내가 독자적이지 않았던 때이라. 고모부께서 선택하여 주신 곳으로 집에서는 결정하였다.
그 때까지도 내 의사 판단에 따라 결정을 하기에는 모든 사정이 허락지 않았던 때이었고, 만약 부모의 도움으로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담임선생님이 추천했던 곳으로, 원서를 당연히 썼으리라.
어느 부모가 학교 담임하는 담임선생이 추천하는 학교가 상위 급인데, 낮추어 선택하라고 지도하였을까.
여러 갈림길에서 판단과 결정을 필요로 할 때에, 부모의 보살핌이 얼마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어. 나의 큰 경험으로, 지혜를 얻게 되었던 경우이다.
물론 당연히 합격을 하였고, 나와 비슷한 성적수준의 급우는 경복고로 진학하였음을 알고서는 섭섭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크게 아쉽게는 생각지 않았음이, 철이 모자랐음인지, 아니면 그 가치를 알지 못했음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긴 이상하였다. 아마도 공립학교에서는 사립학교에서와 같이 교실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장래에 엄청난 차이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입학시험에 합격하였기에, 시험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좋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학교의 수준에 따라 모든 분위기가 차이가 나고, 좋은 학교수준에서 배우기를 원하기 때문에, 좀 더 상위 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별 수단을 다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지금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별히 입시공부를 기억에 남을 정도로는 공부를 하지도않았고. 열심을 기울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시험지를 받아시험을 치를 때의 내 생각은, 아는 것은 확실하게 쓰고, 모르더라도 침착하게 문제의 답으로 선택하게 제시된 네 가지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하는 출제방식은 익혀 온 나대로의 판단으로 합격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중학 입시 때와 같은 요령으로 해결이 그리 어렵지 않았나 보다. 시험을 보면 대체적으로 성적이 더 좋게 나오는자신감이 통했었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고학년으로 갈수록판단의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음이 가장안타까운 경험으로 될 줄은 몰랐다.
학교에 다니며 시험을 치루는 데에 별 어려움을 몰랐다.그냥 수업만 잘 들으면, 해결이 되는 줄로 자신하는 것이습관화 되었으니, 제도의 부족한 부분이 시험제도의 잘못된잣대로 인한 폐단이었고, 편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나마 학기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성적을 평가하는것이, 학교 교육의 중요한 지침으로 여겼으니, 그 고사 때에어떻게 준비하여 시험을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가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최소한도 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교육체제 이상의 맞춤교육을 받았더라면, 묻혔던 재능들을 제때에 발굴 받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으나, 그것이 다 운명(命)이라고 생각하고, 부여받은 인생으로 받아 드려야했다.
중간고사가 있었는데, 마포에서 학교가 있는 보문동과 삼선동 시이로 등. 하교의 통학을 같이하게 되었던. 같은 빈 급우들은 자연스럽게 학교생활에 동반자와 같은 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그 중 한 친구의 제안으로, 시험공부를 같이 하기로 하고. 자기 집으로 갔었다. 단단히 시험공부계획과 준비를 하는데 까진 좋았는데, 그 친구의 아이디어로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잠을 쫓아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있다면서 담배를 한갑 준비 했던 바. 아마도 '스포츠'라는 담배인데, 일반 담배보다 적은 수량의 담배종류이었다.
우선 한 대 피우면 잠을 쫓을 수 있으니.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친구의 제안에 둘이서 담배를 한 대씩 피운 담배의 효과로, 그대로 녹아 떨어져 시험을 망쳤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한 충격은 시험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자세에서 받았던 성적표이었다. 그나마도 급하게 한번이라도 시험범위 안에서의 내용 (책과 노트)을 읽기라도 했을 때에는 기막힌 기억력으로 답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완전하게 담배에 취하여 기억꺼리마저 없게 되었었다.
과목에 따라서는 주관식인 출제형식으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외우고 있어야지민 답을 쓸 수 있었다. 바뀌어 진 평가방법에 당황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결과를 받아보고 나서는 충격과 반성을 한 적이 있기도 하였다.
그 뒤로는 긴장을 많이 하여,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으나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엄청나게 차이를 보였으니, 그 얼마나 문제가 있는 시험방식이었는가 마는. 그래도 그 때에 시험 준비로 기억하였던 것이나의 지식으로 남아 있었다는 생각을 할 때. 그러한 시기에집중하여 준비하는 시험공부가 일정기간을 정리하여 기억으로 남아서 지식으로 쌓여지는 것이라고 알았다면. 더 철저하게 단기간에라도 시험공부를 집중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울과 뉘우침이 남아있다.
결국 시험을 위하여 공부하였던 문제들이 지식으로 남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시험 준비가 지식을 쌓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 시험공부에 대한 오해이었다.
학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가 시험공부이었다고 생각할 때에, 선생님들의 공부지도의 아쉬음이 남게 되었고, 내스스로가 깨달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여, 우수한 성적을 받게 되었겠고, 많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후회스럽다.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공부는, 시험공부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가장 쉽고, 중요한 방법이라 하겠다.
{학교 통학, 교회 활동}
학교로까지의 통학거리가 제법 멀었었다.
마포에서 서울의 중심인 서대문, 광화문, 종로를 거쳐서 동대문을 지나서 신설동에서 동북쪽인 미아리 방향으로 가다가. 보문동을 지나 버스에서 하차하여, 오백미터정도를 걸어서 돌산 쪽으로 가는 통학 코스이었다.
하나 뿐인 교통수단으로 정시에 등교함으로 해서, 약속하지 않아도 학교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이 버스 안이었으므르, 반가운 공간이었다.
통학버스 안에서 재미있었던 장난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혹시라도 자리를 차지한 친구가 생기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른 분을 그 친구 앞으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는 학생복을 입은 학생이라면, 연세 들어 보이는 어른이 앞에 서 있으면, 당연히 자리를 양보하여야 하는 철칙과도 같은 예절이 있었다. 도리 없이 자리를(양보)뺏기는 결과이어서 그러한 예절을 장난으로 삼았던 것에 재미를 삼기도 하였다.
또 하나는 자리에 앉은 친구에게는 짐을 있는 대로 다 올려놓는 일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이더라도 짐을 받아 주는 호의에 당연하게 맡기는 때이었다.
어느 때엔 제법 눈에 맞는 여학생이 앞에 서기라도 하면. 가방을 받아 안고 있는 것이 즐거운 때도 있었고, 그로 인하여 사귐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어, 아무데나 서 있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었다.
상대를 첫눈에 먼저 파악하고 그 앞에 서는 것도 할 수가있었지만, 워낙 등. 학교의 시간에는 그럴 틈이 없이 오로지차에 달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차후의 일이었으니, 어쩔수 없는 인연일 때도 있었으니, 색다른 그 시대의 현상이었다.
버스에는 차장이 있어 승하차를 생기고. 특히 요금을 받아야하니 차장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거의가 여자들이었고,여자로서 감당하기에는 힘들고 익센 일이었으니. 그러한 일도 중요한 취업의 한 분야였었다.
학생들은 요금이 조금 싼 것으로 기억되었지만, 거리에는상관없이 일정요금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불합리한 면도 있었지만, 시내버스의 일정 노선이라 그리 큰 차이는 없다고판단하고, 더 이상의 차등 요금이 사실상 불가능한 어쩔 수없는 요금제도 이었다.
대대로 버스의 운행도중. 차의 고장으로 인하여 중도에 하차할 시에는 요금을 들려받았는데, 목적지에 가까운 곳에서의 고장은. 공짜로 버스를 타는 행운의 경우도 왕왕 있었다.중심가에로의 교통수단으로는 전차가 있었는데. 도로 한가운데로 선로를 설치해 놓고, 전력선으로 전기를 이용한 운행수단이 있었다.
서울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이라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의 전차를 타 본 경험이 서울을 구경하였다는 징표로 삼을수 있는 수단이었고, 마포에서 동대문으로 운행하는 노선이서울을 관통하는 중심행로이었다. 그 외 노선은 간선과도같이 여겼다.
노래도 '마포종점'이라는 곡이 있었음이 이 때를 연상시킨다 물론 나의 행로가 주로 알고 있는 전차의 운행기억이니 착각일 수도 있지만, 시가지가 그리 복잡하지 않았으니아마도 서울역과 연결된 용신 이니. 기껏해야 상도동진 정도이었으리라노랑
버스 내에서의 또 다른 기장 짓궂은 장난은 여럿이 모여있는 가운데 주위의 여학생의 머리카릭을 뽑는 장난이었다.그 당시에는 짓궂은 정도의 장난으로 여겼던 기억이다.자연스럽게 비슷한 등교시간에 버스를 이용해야하는 인연
으로 디러는 남녀학생들의 시험의 기회로도 이용되었고 됨왕 눈에 맞아 따라 다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었다.
요즘으로 치면, 스토킹에 비슷한 짓도 별 이상하게 여기지않았고, 그 당시 학생이라는 신분의 특혜와도 같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 시절이었다.
남녀학생 간에 교재에는 용기가 첫째 필요한 조건이었고그에 못지않은 조건이 최소한의 지금이었다. 얘기가 진행되려면 주로 빵집에 들어가서 멩 값이라도 지불할 능력이 있어야하니, 나 같은 형편은 용기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뒷감당은 불가능하니 구경만 할 따름이었다.어느 정도의 용돈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적지 않은 추억이 있었으리라 쓴 웃음이 앞선다.
그래도 오다가다 눈여겨 마주쳤던 상대가 긴간이 있었으나. 그냥 지나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뒷감당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으니
하지만 동 급우들의 집단적인 기회에는 동석하여 빵집에서 만남의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고 당연한 들러리의 역할이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일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조금씩 지유로운 분위기로 바뀌는 환경에다가 교회에 나가면서 모다른 경험과 그래도 한 학교에 일정기간 다니는 것만이라도나에겐 엄청난 안정된 생활조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차츰 섣격도 바뀌기 시작하여, 말 수도 보통수준으로까지 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항상 나이를 의식했었는데, 또래보다 어린나이로 인한 의식수준의 차이를 별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체격적인 부분인 키는 입학하였을 때는 맨 앞 번호이었으나, 이학년에 올라갈 때엔. 일 년에 거의 십 센티 이상으로 성장하여. 학급의 중간 즘으로까지 키가 성장하게 되었다.
원래 힘이야 타고 났던 내림으로 빠지지 않았지만, 작은 키로 인한 핸디캡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핸디캡에서 벗어나다보니. 여러모로 뒤지지 않는 외모를 갖추게 되었고,
별다른 외출복이 필요 없었던 시절에 학교교복의 가치는.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의 표시가 모든 가치를 판가름하였다. 제법 빠지지 않는 학교 표시인. 모자에 딜게 된 교모탯지(badge)며, 교복에 다는 뱃지가 상당한 수준급을 갖추어지게 되었으니, 별로 위축되게 지내지는 않았으나,항상 주미니 사정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 눈치나 보고 따라 다니는 짓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으니, 별다른 이탈할 일은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의 학생모임은 좋은 교제의기회이었다. 교회에서는, 학생들이 모이는 학생회에서, 주위의 다른 교회학생모임과의 친목으로, 배구시합을 자주하였는데, 자연적으로 학생들의 사교의 기회가 되었다.특히 성탄절 같은 축제 때에는, 교회에서의 준비 프로그램
도 많이 있었으니. 학교에서 하지 못하던 활동을 교회에서경험할 수가 있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여학생들과의 접촉은 거의 불가능한 환경조건이어서, 남학생들만의 접촉이 당연하였다.
남녀공학은 몇 안 될 정도이었고, 거의 남녀학생들이 구분되어 학교생활이 되었었다.
교회에서는 오직 '학생부'라는 구분으로 모이는 곳이니, 자연스럽게 이성에 대한 접촉도 가능하게 되는 곳으로 때로는그러한 호기심에서 교회에 나오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으리라.
성가대와 같은 성가합창을 연습하기도 하고, 시화전과 같은 발표회도 더러 하곤 하였다.
그 때에, 합창을 연습할 때에는 베이스 파트를 하곤 하였고, 시화전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시를 낭송하기도 하는기회를 가짐으로써, 호기심 많던 시절을 잘 보냈었다.가끔 기억나는 일은, 성탄절 때에 키드를 만들어 주고받았던 기억이다.
개 중에 두 여학생으로부터 카드를 받은 기억이다.
변두리 위치의 교회라, 내 정도의 학교수준의 학생은 드물었고, 여러모로 제법 관심의 대상이 되다보니, 여러 카드를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러한 감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지 조차 감당이 어려웠다.
관심의 대상이면, 그에 대한 적당한 반응이 부족했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도 그 기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이되어, 우연히 나중에도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되기도 했었다.
더 가깝게 하지 않았음이, 몇 가지의 조건이 항상 앞섰다.첫째가 학교수준이었다. 그 당시에는 어느 학교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이 뚜렷하여. 상위 몇 몇 학교 외에는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다음이 외모이었다. 그 외모는 어떠한 심사로 어떠한 언행을 하는가에 따라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여러 방면으로의 호기심 많던 사춘기에 하고 싶은 것은많았으나, 나에게는 허락지 않았던 조건으로 어쩔 수 없는한계이었다.
가장 큰 것이 일정치 않았던 주거지이었다.
부모의 슬하에서 생활하는 가정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 때에는 분수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어느 정도의 용돈이 필요하였지만 그것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얼마만큼의 용돈이라도 만들어 보고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외지도뿐이었다.
신문에 과외교사 광고를 내어 보기도 하였다.
주로 수학 과목이었는데, 고등학교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상위권의 학교에 다니는 덕으로 몇 번 과외지도도 했었다.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에 고1을 가르쳤던 기억인데, 그 때에 용기와 자신감이 대단하였나 보다.
별 어려움 없이, 수학과목은 남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이었다. 수학과목에는 남보다 재주가 나았었나보다.
수학과목은 외울 것이 별로 없고,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과공식의 이해력만 가지면, 어렵지 않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목 이었다. 그러한 특수성으로 부담이 없이 가르칠 수있었다.
그 뒤로도 숫자에 관한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음이, 그분야에 재능이 있었나본데, 그 재능에 맞는 분야를 더 깊게공부하여 전공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첫댓글 벌써 고등학교?!
낸 초등학교를
읽는데
새콤 달콤
떫은
어쩜 이리
기가 막히게
생각나게 할까
아련한 추억속으로 가고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