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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105인 사건과 기독교 수난
〈105인 사건과 기독교 수난〉은 한성대학교 사학과 윤경로 교수의 논문이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본 논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105인 사건 자체의 허구성과 사건배경을 밝혀 일제의 식민통치의 정체를 밝히려는 데에 머문 감이 없지 않다. 즉 본 사건이 향후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천착된 바는 없다. 또한 소위 역사적으로 105인사건이라 명명하면서도 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시도된 바가 없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이상의 문제점을 감안,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본(本) 사건과 연루된 인물의 분석을 중심으로 105인 사건의 실체와 성격을 파악, 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구명하고자 한다.
윤경로 교수는 이 논문에서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2인의 인물 분석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제의 조작극에 의해 탄압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런 논증을 위해 그는 122인의 출신지, 연령, 직업, 학력, 신력(信歷)에 대한 실증적·분석적인 시도를 꾀하였다. 이 논문에는 총 14개의 표(表)가 있는데, 이러한 작업은 보다 폭넓은 민족운동사 연구를 위해 일조를 더한 노작(勞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논문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105인 사건의 배경과 경위에 대해, 둘째 부분은 기소자 122인의 인물분석을 표(表)를 통하여 영역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번째 부분에서는 당시 일제에 의해 사건 관련 혐의를 받았던 선교사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분에서는 둘째 부분에서의 논의를 연장하여 기소자 122명 가운데 "신민회"에 소속되었던 인물 57명의 신분 성격을 분석하고, 피고인들의 사건 이후 동향을 독립운동 상황과 관련하여 추적하였다. 윤경로 교수가 결어에서 논한 바처럼, 세 번째 부분에서 시도한 이러한 분석작업은 신민회 소속 인물들의 분석 결과, 그들이 기소자 내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 그는 여기서 평가하기를 신민회 조직이 105인 사건을 통해 실제상 와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신민회의 주요인물들이 사건 이후 계속해서 국내외에서 반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이 10년 뒤의 3·1운동에 대표적인 인물들로 부상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또한 105인 사건 당시 나이 어렸던 학생들이 성장, 국내의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한 사실에서 신민회 활동은 결국 3·1운동까지 그 항일운동의 영역이 확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탐구를 통해, 그는 1910년 병합 직후 일제가 보다 철저한 식민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조작했던 105인 사건은, 결국은 그들의 항일활동이 3·1운동과 승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일단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는 실패하였다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여기서 더욱 자세하게 '105인 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05인 사건 당시의 한국의 정황
1905년 을사 5조약 이후 일제는 한국 주권의 완전 장악을 위해 단계적인 무단정책을 진행시켰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잡아 고종황제를 강제로 양위시키는 동시에 한국 군대의 해산을 단행하였고, 그 해 7월에 보안법 선포, 1908년 8월에 사립 학교령 발령, 1909년 3월에는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출판법, 1910년 집회 결사 엄금령 등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한국의 모든 민간 단체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민족 언론, 교육 기관, 대한 자강회나 국채 보상 기성회 등의 민족 사회 운동 기관들이 해산되고 말았다. 특히, 1910년 한일 병합을 강행한 일제는 한민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더욱 강경한 탄압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는데, 일제가 특별히 주시하였던 것은 국내에 잔존하고 있던 반일 독립세력 내지 비밀결사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항일 무장 투쟁의 방식이 국외 독립운동으로 혹은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지하독립운동이라는 비무장 투쟁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병합 후 더욱 더 헌병경찰 기구를 강화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금지를 철저히 강행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조직을 색출 혹은 파괴하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제가 특히 주시하였던 지역과 반일세력은 서북지방과 그 지역의 기독교 세력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서북지방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중심으로 가장 맹렬히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안중근·이재명 등의 지사들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었으며, 당시 일련의 항일사건에 이 지역 기독교인들이 많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서북지방에서 만연하는 반일적인 기독교세력을 무력적인 방법으로는 제거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조작을 통해서 재판제도라는 합법적인 장치를 이용, 서북지방의 반일세력을 제거하려고자 하였다.
안악 사건의 발생
이러한 정황에서, 그 첫 번째 표적이 되었던 사건이 바로 1910년 12월의 안악사건이었다. 안악사건의 배경은 1910년 8월에 합방이 되었을 때, 사실상 국권이 일제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국내에서 그동안 구국 계몽 운동이라든지 독립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국외에 독립 운동을 위한 기지를 만들자는 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었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안중근의 사촌이 되는 안명근 의사가 자기의 고향인 황해도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안악, 해주의 부호들에게 돈을 염출해 내는 일을 진행하다가 중도에 발각된 사건을 안악사건 또는 안명근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완전히 드러나게 된 것은 1911년 1월인데, 여기에 안명근을 비롯해서 안태국, 이승훈, 이동휘, 양기탁 등이 연루되었다. 이들은 제주도와 인천의 섬으로 유배당하게 된다. 안악사건의 과정에서 다행히 신민회의 조직이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주요간부와 다수의 회원이 검거됨으로써 신민회의 활동은 크게 둔화되었고, 마침내 105인사건 과정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 해체 당하게 된다. 안악사건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사건이 105인 사건에 배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105인 사건의 경위
안악사건을 통해 일제의 당초의 목적 즉, 향후 야기될 모든 형태의 항일운동을 사전에 방지, 제거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황해도 지역의 민족세력을 순조롭게 탄압한 일제는 그 목표를 다시 평안도로 옮겨 비슷한 수법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훗날 『민족의 수난』이라는 기록을 남긴 선우훈은 일제의 105인 사건 조작 이유에 대해, 신민회의 근절, 기독교의 탄압과 선교사의 추방, 애국지사 및 청년의 사기 제압 등으로 진술하고 있는데 이제부터 신민회 붕괴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105인 사건의 배경을 통해서 105인 사건 조작의 이유를 통찰 해 보도록 하자.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방을 통하여 실제로 무력적인 방법으로 조선을 강점하긴 하였지만 국내에 이에 저항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민족세력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세력이 바로 기독교 세력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1908년 3월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슨 암살 사건과,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피격 사건, 그리고 1909년 12월에 이재명 의사에 의한 이완용 피격 사건, 이렇게 연달아 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은 모두 서북인들이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일제는 서북지방과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거침돌이 될 세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어떻게하든지 이들을 한번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1911년 9월초에 강도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재윤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허위자백을 받게된다. 그리하여 날조되고 조작된 105인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105인 사건을 터뜨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11년 여름에 개성에서 열린 제2회 학생 하령회였다. 서울을 비롯한 광주, 전주, 군산, 개성, 선천 등 스물한 개 학교의 학생회 대표 아흔세 명이 모인 이 하령회를 위해 YMCA 학생회 간사 이승만과 브로크만은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회의 조직망을 강화하고, 대회장 윤치호는 한국 기독 학생회를 세계 기독 학생 협의회에 가맹시키는 수속을 진행시켰다. 일제는 갖은 박해 속에서도 해산되지 않은채 버티고 있던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 대하여 평소부터 앙심을 품고 있던 터라, 이들이 학생 하령회까지 조직하여 맹렬한 애국 운동을 펼치려는 것을 보고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겠다는 최종 단안을 내린다. 그래서 1911년 10월 12일, 일제는 사전에 치밀하게 모의된 데라우치 총독 사내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죄목으로 서울의 경신학교 학생 세 명을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11월 11일에 선천의 신성학교 교사 일곱명과 학생 스무 명을 검거, 평양, 영변, 선천, 서울 등지에서 칠백명을 검거하여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해 내었다. 피의자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안태국, 이승만, 이승훈을 비롯하여 양기탁, 임치정, 유동열, 윤치호등 신민회 지도자들과 양전백, 양준명 등 하령회 강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경이 검거한 인원 수는 대략 7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1심에 기소된 사람은 123명이었고, 재판 도중에 1명이 사망하여 모두 122명이 정식 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1912년 9월 28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122명의 피고인 가운데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이 사건을 일컬어 105인사건 이라 함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갖은 고문 끝에 제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에 달하기 때문이다.
기소자 122인의 인물 분석
윤경로 교수는 여기에서 105인 사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그들이 일제의 조작극에 의해서 탄압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필연적인 이유로서 1심에서 판결을 받은 122명 전원에 대한 그들의 출신지, 연령, 직업, 학력, 신력(信歷) 등의 모든 신분요소를 분석하고, 아울러 선교사의 문제도 추적한다.
첫째로 윤경로 교수는 그들의 출신지를 일별하면서, 대체적으로 피고인들이 서북지방, 특히 평안도 지역 출신자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그는 우리가 105인 사건 조작의 동기는 지역적인 측면에서 볼 때, 평안도의 평양, 선천, 정주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신장되고 있던 민족세력을 탄압하고자 했던 일제의 음모를 통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기소자 122명의 연령분포를 통해 그 당시 평균연령이 30세 전후의 청년·학생층이 많았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일제가 105인 사건 조작으로 미래 독립운동의 잠재적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하였던 속셈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로 그는 기소자 122명의 직업별 구성에 있어서의 분류를 통해 가장 비율이 높은 분야가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일제가 병합 전부터 이미 교육계에 대한 탄압과 학원사찰을 실시하였고, 을사조약(1905) 이후 민족지도자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항일민족교육이 강화되자 105인 사건을 통해 노골적으로 탄압을 가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가 민족운동의 현실적·집단적 세력으로서 학원에 대해 얼마나 심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직업 구성에 있어서 주목되는 점은 상공업 종사자와 언론, 서적업, 의사 등을 포함한 전문업 종사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사건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지식층 내지 민족자본의 대두를 저지시키고자 하였던 일제의 탄압정책의 서곡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넷째로 학력분석을 통한 분석은 기소자들이 양적-질적 측면에서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과 아울러 특히 기독교 교육의 영향이 매우 강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서북지방 개신교인들의 민족운동 관련성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다섯째로 그는 신력의 분석을 통해, 이 사건을 조작한 일제의 의도가 한국기독교세력을 제거하려 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개신교가 민족운동을 함에 있어서는 서로의 교파를 초월하여 단합하였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러한 분석은 일제가 교회를 직접적, 현실적인 반일세력으로 파악하지는 않았지만 교회가 간접적, 잠재적으로 반일 세력화 할 가능성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려고자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윤경로 교수는 선교사들의 문제를 통해서 일제가 한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재한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일제는 기독교 선교사를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교두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어차피 기독교의 속성이 친일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관련된 선교사들의 대다수가 서북지방의 평양과 선천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105인사건을 이용, 반일 기독교 세력의 배후세력인 외국인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본 사건이 확대되어 세계여론으로부터 종교탄압이라고 거센항의와 비난을 받게되자 선교사들에 대한 구속 및 선교지역 추방을 철회하였다.
신민회 소속 인물의 분석과 사후 동향
윤경로 교수는 이 부분에서 앞 글에 서술한 바와 같이, 57명의 신민회 소속 인물들의 분석결과, 그들이 기소자 122인 가운데서도 신민회 최고 지도자에 속하는 인물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30대가 주류를 이루어 완숙한 비밀결사운동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이 다양한 직업분야에 골고루 퍼져 신민회의 포괄성을 반영하고 있었고, 지식수준에 있어서도 한층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세히 정리 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짐작컨데, 일제의 105인 사건의 조작이유는 결국 신민회 조직파괴에 제일의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리고 피고인들의 사후 동향에 대해서는 신민회가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조직이 발각, 붕괴된 점에서는 국내의 독립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105인 사건 이후에도 일제의 의도대로 신민회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건 후에도 항일의식을 계승해서 승화, 발전시켜 국내외에서 반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들이 10년뒤의 3·1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는지는 모르나 국가민족의 항일독립정신만은 결국 단절시키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표(表)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3·1운동과의 맥락에서 투명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
일제치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은 일제의 박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안악사건과 신민회사건(105인사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특히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직후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의 항일민족 탄압사건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최대의 박해 사건이었다. 이 박해사건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이 신민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에 대한 일제측의 보복이며 식민통치 벽두에 기독교도를 비롯한 한민족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위협이었다.
105인 사건은 선교사가 연루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끌게 했던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안태국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한 반박으로 일제통치의 비도덕성과 만행이 세계에 널리 폭로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각도에서 이 사건이 갖는 민족사 및 한국교회사적인 의의는 적지 않다. 1900년대 민족운동의 핵심체였던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려 했던 독립운동을 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교회사적인 면에서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경로 교수가 105인 사건의 기소자 122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그 중 기독교 신자가 82명을 차지하여 전체의 90%를 넘고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 서북지방의 기독교도가 신민회 등을 통하여 한국민족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대로 일제는 기독교를 한민족 통치의 장애물로 생각하여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상 1907년을 기점으로 볼 때 일반 기독교 신자와 항일운동진영 사이에는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에서 인식의 편차가 심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이러한 인식의 양극적 편차가 좁아지게 되고 일치될 수 있어서, 105인 사건은 그후 기독교의 민족운동성을 보다 강화시켜 주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 민족운동의 촤고봉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5인 사건에 대한 교회사적 의의(意義)라고 한다면,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민족운동성과 한국교회의 신앙, 신념체계와의 관계성이 갈등관계, 충돌관계에 놓여져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민족운동에 민족구원사상, 민주민권사상이라는 이념적 근거가 되어줌으로서 역사와 신앙의 문제를 상호보완 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사건의 교회사적 의의는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즉, 개인구원만을 너무 강조한다거나, 혹은 사회구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분법적 사고-생활 구조를 지양하도록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