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을 살아가는 나의 삶 이야기
본인은 8살때 고아가 되어 어린시절 살기위해 그룸생활을 할 당시 상대방 누군가에 의해 칼로명치끝을 찔리어 생명을 일게 되였을 때 어느 시민에 의해 병원에 옴겨 젖지만 치료를 해줄 사람이 없어 방치해둔채 몇일이 지나서 어느 의사 선생님의 인술에 의해 목숨을 구제되어 살아나게 되였다.
그분들을 모르고 살기에 바빠 은혜도 저버린채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다보니 은혜를 입은 분들은 모르고 사회에 봉사로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 1983년 부터 모범 운전자로 봉사의 길로 접어들어 열과 성의를 다해 열심히 봉사대열에서 일하다보니 임원으로 발탁되어 복지부장 및 총무부장직을 맡아 일을 하면서 제 차내에 모금함을 만들어 양친회 소망재활원의 장애인들을 돕기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같은 모범운전자회원중 자식이 심장병으로 고생하는데 수술을 해 줄수 없겠느냐는 같은 모범운전의 제안이 들어와 많은 고민끝에 당시 326명의 모범운전자 분들이 저와같이 차내에서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한 모금을 몇 달만 하게 된다면 가능 하겠다고 생각을 하여 계획을 세워 모범운전자 임원회에 그 계획서를 상정 하였던 바 임원회에서는 계획대로 해보자는 의결이 통과 되였지만, 당시 회장께서는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해주는 것은 모범운전자의 의무 역활이 아니라며 계획안을 부결시켜버리고 나 자신을 모범운전자회에서 퇴출시키려고 총무부장직에서 해임시키고 다른 회원을 임명 해서 3개월을 운영하게 되었엇다.
그러나 모범운전자회가 마비되고 어려워지다 보니 당시 부회장들이 들고 일어나 다시금 저를 총무부장직에 복귀시켜 3개월동안마비된 엄무 파악을 하다보니 경리 여직원이 회비중 80여만원을 횡령한 사실도 밝혀내므로서 부회장단및 회장과 특별회의를 하여 회장단에서 여직원의 횡령한 돈을 책임지고 몇개월동안 변재 토록 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비밀리로 봉하기로 하고 총무부장직을 수행토록 하였다.
그러나 회장은 총무부장인 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경찰서에 3회에걸쳐 부회장이나 본인도 모르게 제명토록 상신을 한것을 경찰서 교통과장께서 의하하게 생각을 하고 저를 불러 어떻게 된 사안이냐고 물어 오므로서 그 사실이 밣혀지고 부회장단 및 회장과의 불화까지 일어나 운영위원회에서 이문제로 3차레나 회의를 하는 동안 회장이 개인적으로 저의 집에까지 (5만원 상당)선물을 사들고 와서 무름을 꿀고 사정을 하면서 자기 회장직을 유지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애원을 하므로 제가 모범운전자회를 저버리고 새 생명 살리는일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어 모범운전자회에서 1989년 3월 5일사임을 하고 [사랑실은 교통봉사대]를 4월20일 창립하게 된것이다.
당시 성아운수 택시회사 에서 일을 하면서 내 가정과 가장역활 보다 봉사단체일에 전염하여 심장병 어린이 수술에 전염하여 3번째로 모범운전자 회원의 자 김00 당시11세 어린이를 수술시켜주므로서 모범운전자회에서 하지 못한일을 해 낼 수 있었고 2년동안에 27명의 어린이 심장병을 수술 시켜 주고 세계참피언인 유명우 권투선수를 불러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한 권투 시합까지 개최토록 하여 기금도 2천여 만원이상 만들어놓게되고 경기 신문에서는 사설에 택시기사의 인간애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주기 까지 하며 각종 메스컴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이루게 되니 택시 기사중 열심히 봉사 대열에 참여 했기에 총무부장직을 맡겨 9개월동안 일을 하게 했드니 2년의 임기가 끝나 재임하라는 권고도 있었고 하는 과정에 총부부장직을 맡겼던 임원이 욕심이 생겨 본인이 대표자를 해야 하겠다고 야심을 품고 나에게 임기 2개월전 부터유언 비어를 버트리기시작 한것이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시켜 줄때마다 한명당 50만원씩 빼먹었다는 유언 비어를 퍼트리기 시작 한것이다. 그러나 저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나의 소신대로 봉사자들간에 대표자를 뽑는데 투표를 하게 되면 봉사단체에 패 갈림이 염여되어 만장 일치로 재임할 것을 주장하며 추대로 해 준다면 한번 더 하고 다른 분이 저보다 더 잘해 보겠다는 분이 있으면 그분에게 물려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임원회에서 밣혔더니 임원중에서도 한번 더 해야 한다는 주장과 총무부장이 자기가 회장을 하겠다고 하니 그분을 지지하는 임원과 양분되는것을 보고 원하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기로 하였지만 임원들은 극구 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열되는것을 원치 않았던 나이기에 더이상은 회장직을 안 하는 것으로 하고 후임을 총무부장에 선임토록 의결하여 물려주고 고문으로서 홀가분한 내 생활을 하였는데 그후 봉사대를 맡은 후임은 새마을 기업 협의회와 결탁하여 그간의 업적으로 대통령 표창장을 받는데 혈안되어 금품수수까지 지원하면서 표창장을 받아 개인택시 받는 우선권을 획득한후 봉사대 회장직을 같은 회사 택시기사에게 넘겨주어 그분도 표창을 받아 개인 택시 받는데 공을 이루게 하고 봉사에는 별로 열의를 내지않는동안 저는 한국 신장 장애인 협회경기 지부에서 후원회장으로 영입하므로 수락하고 그역활에 충실히 하다보니 몇개월만에 경기 지부장으로 추대되어 신장장애인들을 위해 헌신 봉사를 하다 보니 전국지부중에서 최고 지부로 부상하게 되고 중앙협회 회장직에까지 추대를 받게 되였지만 나는 신부전증 환자가 아니기에 중앙 협회 회장 후보직을 사임하고 경기 지부장 직을 충실히 수행 하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 [사랑실은 교통봉사대]가 어려워지고 그쪽에서 다시금 봉사대를 부활 시킬사람은 윤고문 밖에 없다라고 만장일치로 합의를 하고 저를 봉사대 회장으로 추대를 해놓고 와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많은 고민을 하다가 내가 만들어 놓은 단체가 어려워 졎다니 나몰라라 해서는 안될것같아 1997년 8년만에 다시금 봉사대 회장직을 맡게 되고 신장장애인 경기지부장직은 사임을 하게 되였다.
열심히 하여 어려워진 봉사대를 일으켜 2000년에는 사무실도 시건물을 사무실로 쓸수 있게 하였고 2002년에는 전국 자원봉사 한마음 대 축제에서 220만명중 봉사부문에서 최우수 상까지 받는 대 역사를 이루고 성남에서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우수한 단체를 이루었고 타 시 자원 봉사 센터에 사례발표에도 초대되어 강의도 나가고 대우전문대 에 특별강의도 나가며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 살다보니 자식들이 서울대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현대 구름에 연구소와 금융계의 회사에 들어가 대한 민국의 경재 발전에 이바지 하는 역군의 일인이 되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게 된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006년도에 예기치 않게 제가 뇌출혈로 머리 수술을 받게 되어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머리 수술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보호아래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원상 회복되어 퇴원후 봉사대 회장직을 사임하고 후임들에게 인계해줄때 여러 은행에 후원예금이 2천여만원정도가 있고 사무실과 장애인 수송 차량 100여명이상 수술해준 실적 을 남겨놓고 물러나 제주 지부장의 권고를 받고 물 맑고 공기 맑은 제주도에 가서 3년간 수양생활를 하다가 2009년도에 성남으로 올라와 보니 아내가 수진동에 있던 4층 집을 팔아 아이들에게 집사는데 조금씩 도와 주고 빛도 갚고 2천5백만원 전세 살이를 하면서 공단 벤처기업 사무실 청소를 하러 다니고 있었기에 체면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 광주쪽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였지만 2천 5백만원으로는 셋방을 얻을만한 곳이 없었다.
몇몇 복덕방을 혜매다 마침 3천만원 전세 방이 있다기에 방을 보니 그런대로 우리 두식구가 살기에는 괜찬을것같아 계약을 하자고 하여 집 주인을 불러오게 되어 주인 어르신이 오시더니 복덕방 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3천 5백을 내라는 것이다.
하는수 없이 집주인에게 사정을 하여 5백만원은 2개월후에 값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하고 2010년 1월3일 이사를 하고 4일 아침에 일하려고 일찍 일어나 나오니 눈이 무름까지 밤새 내려 쌓인 것이다. 이사를 하고 눈이 오면 부자가 되고 잘 살것이라는 옛 어르신들의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어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위안을 얻게 된것이다.
그러나 2년 계약을 하고 1년을 살았는데 집을 비어 달라는 것이다. 손자가 있는데 결혼을 시켜 살림을 차려 주어야 하는데 방을 얻어 줄 돈이 없어 우리가 살고 있는 방을 주어야 하겠다는것이다. 그래서 이사비용을 줄태니 이사를 해 달라는 것이다.
집 없는 설어움이 이런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누가 아파트 경매를 해 보라는 것이였다. 그러나 3천 5백으로 어떻게 경매를 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을 했지만 복덕방 경매 전문가의 조언으로는 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조언대로 경매에 임하기로 하고 집주인에게 이야기를 하고는 집세를 빼달라라고 해놓고 경매에 응하기로 하여 어렵게 응찰 하였던바 현재 살고 있는 32평형 아파트경매에서 (1억6천 6백1만원)에바로 낙찰되었지만 살고 있는 집주인이 집을 빼주지않아 은행 빛도 1억2천만원 융자를 받고 각종 보험 적금 모두를 융자와 해약을 하여 집값을 다 치르었지만 집을 비어주지 않아 2개월 동안 모란 하우스 속에 이삿짐을 마끼고 비닐하우스 속에서 고생을 하고 3개월후에 입주되게 되었었다.
그러면서 성남 공단에 벤처기업 사무실 청소를 하기위해 새벽 4시부터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하나님의 보호와 주님의 인도로 일거리가 차츰 차츰 늘어나 13개 회사의 청소를 하게 되여 수입도 괜찬아 지게 되였다.
그래서 봉사단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 되고 있는 것에 감사를 느끼며 내 나름대로는 후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 해 주느라 했지만 받는 측에서는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 였나보다. 2014년 11월에는 전화비가 밀려 전화를 끊겠다며 그러면 신용 불량도 된다는 문자가 3~4회 오므로 전화국에 항의를 해 보았더니 봉사대 전화 였던것이다. 지금까지 한명의 수술도 못해주고 전화비까지 못내는 실정이라니 그로인해 현 봉사대 회장과 서먹서먹해지고 전해 오는 말에는 현회장이 나를 비방 한다는 전언이 들려오고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한계를 넘어 봉사대를 다시금 인수하여 사명감으로 일해 왔던 그일을 이토록 방치 해서는 안되겠다고 다시금 생각이들어 인수해 줄것을 타인이나 직접 접촉을 하여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결국 2015년 을미년 양의해가 나의 띠인 해이므로 다시금 사명감인 새 생명 살리기 역활을 해야 하겠다는 의지로 "새 생명 살리기"운동 본부를 만들게 되였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해야하겠다고 깃발을 꼼고 다음 카페에 사랑나눔천사라는 이름을 몇년전에 만들어 놓았던 카페를 부활하여 시작 하게 된것이다. 이후 몇일전에는 카페 이름도 "새 생명 살리기"운동본부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전염하여 금년 말까지 일천만원의 기금을 만들어 제대로 해 볼 것이라 다짐을 하고 착한 대리 협동조합에도 가입을 해서 더불어 봉사활동에 일익을 하도록 하고 투잡으로 하는 일에 뜻이 잘이루어져 가정의 생활비 걱정없이 내가 하는 일에전염 할 수 있을 수 있도록 하여 착대협에서는 성남 분당 갑지역 지사도 따놓았고 글로벌 회원으로도 이루어 하루 일만원씩 적립되는 것도 이루어 놓았다.
내일이면 뉴토코리아 (주)에서 새 생명 살리기 기금마련 후원 가입원서 4,000부를 인쇄하여 후원하기로 해주어 더욱 힘이나고 있으며 착대협 과 기업간에 협약하여 대리 기사 요청하는 콜을 기업간에 할 수 있는 역활을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어 열심히 하기로 하여 아내도 이에 호응하여 오늘 일을 알바 아줌마와 같이 하기로 하고 나에게 쉬는 시간을 배려 해 주는 아량도 생겨 봉사 활동을 하기에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는 실버가 된것이 주님의 보살핌의 역사로 믿고 주님의 힘이라 감사를 드리는것이다.
첫댓글 평생을 직업처럼 좋은일을 하시는 천사님
이시대의 진정한 천사님이십니다
늘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