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운 이웃 보호규례
신 24:10-22
10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 24:11-22 / 그가 스스로 담보물을 골라 가지고 나올 때까지 여러분은 밖에 서서 기다리십시오. 12) 만일 그가 밤에 덮고 자는 겉옷까지 담보로 잡힐 만큼 가난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그것을 밤새도록 가지고 있지 말고 13) 해 질 때에 돌려주어서 그 가난한 사람이 밤에 그것을 덮고 잘 수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그 가난한 사람은 여러분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며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일을 의로운 행실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14) [품삯에 대한 규정] 여러분이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그 사람이 여러분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인이든지 그들의 권리를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15) 그날의 품삯은 그날 해 지기 전에 지불하십시오. 그 돈이 있어야 그는 그날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여러분을 원망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여러분에게 돌아갑니다. 16) [범죄의 책임 규정] 누구든지 죽을 죄를 지었으면 그 사람만 혼자 처벌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의 온 가족이 함께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이 죽을 죄를 지었어도 부모를 함께 처형할 수 없고 부모가 죽을 죄를 지었어도 자식들을 함께 처형할 수 없습니다. 17) [자선 규정] 여러분은 이방인과 고아의 권리를 짓밟지 말고 과부의 겉옷을 저당잡지 마십시오. 18) 여러분 자신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방인이었던 것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거기서 구출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약자들을 돌보아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이 밭에서 곡식을 걷어 올 때에도 한 단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인이나 고아나 과부가 와서 주워 가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올리브나무를 떤 뒤에도 뒤에 다시 가서 가지에 남은 올리브나무 열매를 따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따가게 두십시오. 21) 여러분이 포도원에서 포도를 딸 때에도 다시 가서 남은 포도를 따오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따가게 두십시오. 22) 여러분 자신이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외국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약자들을 돌보아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딱딱한 법 조항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의 감정까지 배려하는 섬세한 사랑이며, 각 개인이 가진 권리와 인권을 보호하는 공의를 실천하는 실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돌보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됩니다.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10-13) 채권자가 돈을 빌려줄 때 채무자로부터 담보물을 잡는 것에 대한 규례입니다. 담보물을 잡을 때 지켜야 할 2가지 원칙이 나옵니다. 첫째, 상황에 몰려 돈을 빌리는 채무자의 복잡 미묘한 감정까지 살피며 전당물을 취할 것, 둘째, 생존과 생계에 직결되는 품목, 이를테면 빵가루를 만들 때 쓰는 맷돌은 안됩니다(6). 또한 낮에는 옷으로, 밤에는 침구로 사용되는 겉옷을 취할 때는 해 질 때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13; 출 22:26-27). 그리하여 그가 최소한 품위를 지키며 생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 2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움이 됩니다.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14-18) 당시의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였던 품꾼, 객, 고아, 과부를 보호하는 규정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품꾼을 학대하지 말고, 품삯은 당일에 주어야 합니다(14-15). 한 사람의 죄로 나머지 가족이 연대책임을 지는 부당함은 없어야 합니다(16). 힘이 없어 재판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생존과 직결되는 생필품인 옷을 담보로 잡아서는 안 됩니다(17). 이 규정들의 목표는 불우한 이웃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고, 그들이 불의한 대접을 받거나 박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호하는 일이 선행의 실천으로 권고되는 것을 넘어 법으로까지 규정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이 법 규정의 바탕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규정의 준수 명령은 약자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방 나라들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세울 나라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19-22) 약자 보호는 추수 때에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풍요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은혜를 나눌 때에 이스라엘은 진정 풍요해집니다(18, 22). 사회 안의 약자들은 이스라엘이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적용: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한 감격은 어려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까?
화재로 인해 순식간에 타버린 집을 바라보며 식구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한손에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또 한손에는 귀여운 자녀를 안고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집은 불에 타서 없어졌지만, 우리 가정만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큰집을 소유하기 위해 참다운 가정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혹시 없을까 생각해봅니다. 행복한 가정은 삶의 용기이며 아름다운 사회의 근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 설 교 >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주라!
신명기 24:14-22 / 김광찬 목사(제자교회)
저번 주부터 구제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저번 주 설교 말씀인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신15:1~11)에서 구제는 성도의 의무라고 했고,또한 구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라고 했다.
이번 주는 사회적 약자를 성도가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되는가 하는 문제다.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지극한 괸심을 보이시며 보호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들을 보호하라 명하신다.하나님은 이땅이 창조시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먹고 사는 문제도 없고,질병도 없고,양육강식도 없고,평화와 사랑만이 풍성한 세상이 되기를 원하신다.그렇게 되려면 복 받은 자들이 또한 먼저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약자들을 보호하여 약자로써 강자에게 당하는 것으로 인하여 쌓인 증오를 해갈하여 사회에 선의 총계를 늘려야만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약자라고 무시하고,권리를 빼앗고,자기의 이익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고,그들의 필요를 보충해 주고,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때 점점 악은 사라지고 사회는 선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하나님은 불순종하며 완악한 백성들에게 책망을 하시면서 늘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문제를 지적하신다.'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5~17)또한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듣지 않으신다는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서'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고 바른 해결책을 말씀해 주셨다.
결론적으로 믿는 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한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본문은 몆 가지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보호하라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자.
1. 품삯은 당일에 주라(14~15)
인간의 탐심의 문제를 말씀하신다.가진 자는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한다.그래서 약한 자를 이용해 사업을 하여 돈을 벌면서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신속하게 품삯을 지급하지 않는다.또한 적절치 못한 임금을 지급한다.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악덕 업주다.이는 자기의 배를 약한 자의 것을 빼앗아 채우는 악인 동시에 약한 자를 학대하는 행위다.그래서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고 말씀하신다.그는 종일 고생하여 번 품삯을 받아야만 기다리고 있을 가족에게 먹을 것을 사 돌아가 저녁을 함께할 수 있다.이런 절박한 사정을 무시하고 품삯을 당일에 지급하지 않고 뒤로 미루는 것은 범죄다.그래서'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이다.약한 자를 이용하여 사업을 하는 고용주는 약한 근로자에게 적절한 임금과('그를 학대하지 말며')신속한 지급('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를 하여야 한다.
공평한 임금과 신속한 지급이 약자에 대한 경제적 선이다.그럴 때 약자는 빈함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2. 범법자에게만 책임을 물으라(16)
약자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는 가족들의 책임을 공동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가족 전체가 연대부담을 해야한다.부모가 법을 어겼다고 해서 자녀들까지 고통을 나누어 지어야 할 필요는 없다.또한 자녀가 지은 죄로 인해 부모가 처벌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
3.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주라(17-22)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3대 약자인 객,고아,과부를 보호하라고 명하신다.이들은 어떤 공동체에서도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이다.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신다.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고,과부의 남편이 되시고,객의 보호자가 되신다.이들에 대한 보호는 계속 말씀하신 것인데'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26:12) 즉 바친 십일조도 이런 자들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받아야만 할 3 가지를 보호하라고 명하신다.출애굽기에서도 이것을 강하게 강조하셨었다.'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1)법적인 혜택을 동일하게 하라(17상)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17상)
약자들에게는 법적인 보호가 더 필요하다.그러나 현실은 약자를 보호하기 보다 도리어 그들을 어렵게 만든다.타락한 재판관은 돈을 받고 약한 자의 편을 들지 않고 도리어 굽게 판정한다.하나님은 이런 일을 엄하게 금하셨다.'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16:19)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는 엄하게 꾸짓는다.'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암2:6)'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5:12)
2)담보물을 제한하라(특히 과부의)(17하)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17하)
'전집'은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물을 잡는 것을 말한다.
이 전집에 대해 하나님은 바로 앞에서 주의사항을 말씀하셨었다.'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신24:10~13)
여기서는 특별히 과부의 옷에 대한 담보에 제한을 말씀하신다.가난한 과부지만 옷은 제대로 입어야 한다.과부의 옷은 절대로 담보물로 취해서는않된다.가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과부는 최소한 따뜻한 옷을 입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또한 여자로써 어느 정도의 품위는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리지만 빌리면서 담보물로 제공할 것이 옷밖에는 없지만 그 옷을 절대로 전집물로 잡아서는 않된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야하는 근거를 말씀하신다(18)'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18)하나님은 십계명에서와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주인으로써 명하고 계신다.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반드시 그 구속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또한 복 주신다는 약속에 의거하여 명하고 계시는 것이다.그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애굽에서 '객'이었다.또한 종이었다.이런 그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이다.객과 고아와 과부를 내가 말한대로 보호하여 준다면 나는 너에게 풍족한 복을주어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3)추수물을 일부 남겨두라(19~21)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19~21)
내가 거둘 풍성한 수확은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임으로 그 일부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것은 은혜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다.추수물의 일부를 남기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나에게 권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시다.즉 반드시 준행해야 될 일이다.이 일을 위반하면 나는 죄인이 된다. 나의 여유분 만으로도 어려운 이웃은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이 규정에 따라 룻이 혜택을 보며 명령에 순종한 보아스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는다.
여기에서도 그렇게 하여야하는 근거를 말씀하신다(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22)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존재들이다.예수님이 바로 이런 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런 귀중한 존재들이 강한 자에 의해 짓밟혀서는 않된다.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신명기 24:17~22 / 이필재 목사
6·25를 생각하는 주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6·25 이야기는 점점 사라지는 전같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0일 육군 28사단 세례식을 우리 갈보리교회에 부탁을 해서 갈보리교회 목사님들과 우리 교인들 한 100여명이 최전방 28사단에 가서 500명 장병들에게 세례를 주고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왔습니다. 오는 9월 27일에는 또 25사단에서 똑같은 일을 우리 갈보리교회에 부탁을 해서 약속을 하고 계획 중에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제가 논산훈련소에 가서 6,000명 합동세례식도 집례한 일도 있었습니다. 군장병들이 이렇게 신앙으로 무장되어져 가는 것을 볼 때 감격스럽고 보람과기쁨을 느꼈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고 돌아왔는데 28사단장과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는 중에서 큰 걱정의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군장성으로서 이 대한민국의 앞날이 너무나도 걱정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신병으로 입대한 군인들 가운데는 6·25 동란이 북침이라고 생각하는 군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거침없이 많은 숫자가 손을 들었으니 최전방 공산당 방어선 최일선 장병의 사상이 그렇다고 할 때 이 문제는 심각 수준이고, 그러한 생각은 젊은이들 세계에서 날로 그 숫자가 많아지는 편이라고 걱정하는 말은 우리 일행에게 공개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군인 전문가로서 평가하기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미군 철수가 현실화되면 그 위험도는 자기 생각은 99%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전쟁무기 방어능력이 한국군에게는 전혀 없는 것들이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야는 주한미군의 방어 능력으로 지금 버티고 안심을 하고 있는데 그 힘이 없어질 때는 엄청난 위험이 찾아온다고 걱정했습니. 미국이 그렇게 세계 많은 전쟁에 참여를 했는데 가장 수치스럽게, 그리고 가장 피해가 컸던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일본에게 진주만 공격을 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미국의 전쟁 역사의 수치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일본 함대를 끌고 와서 진주만 공격을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그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나와서 증언하기를 "우리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해서 얻을 것은 피해뿐입니다.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나는 하버드 출신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알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가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책임을 주어서 "네가 가서 때리라!"고 해서 이소로쿠 대장이 군대를 몰고 가서 진주만 공격을 성공을 했는데 결국 그 전쟁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6.25 세대들은 과거 경험 때문에 공산당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제일 지독스러운 마귀같이 생각이 되고, 신세대들은 그런 심각성이 전혀 없는 세대 갈등이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라 생각이 됩니다. 역사학자들은 "사람이나 족이 역사를 기억하면 현명하여지고 현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 나갈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마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네가 애굽의 종 되었던때를 기억하라." 역사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 삶을 잊지 말고 현재 삶을 지혜스럽게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라." 그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신명기 성경은 히브리 민족이 가장 컸던 수난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그 민족을 향해서 하였던 설교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수치스럽게 고난을 당했던 때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비장한 각오의 피나는 노력을 해서 자신의 입지를 회복시켰을 때 쓰는 말입니다. 지금 이 모세의 설교를 우리나라 말로 하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라!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마라!" 그런 말입니
다.
오늘 말씀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민족적 수난의 역사를 잊었느냐? 그때를 잊지 마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집시 민족 역사입니다. 떠돌이 백성들입니다. "우리 조상은 유래하는 나라 민이라."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와서 살았는데 그의 손자 야곱 때에 와서는 애굽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애굽으로 이사간 야곱 가족은 아들이 총리 대신이었기 때문에 힉소스 왕조바로의 대우를 받아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비옥한 땅 고센 땅에서 목축업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 애굽은 일년에 강우량이 50mm 밖에 안되는 그런 땅입니다. 그런데도 고센 땅은 매우 물이 많은 비옥한 땅입니다. 유일한 물줄기 나일강이 애굽의 중앙을 흐르고 있으면서 마지막에 와서는 이것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바람에 그 주변은 물 걱정을 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이용해서 좋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가 주는 고센 땅의 풍요를 누리면서 야곱의 말년을 아주 풍요롭게 잘 보냈는데 역사는 또 바뀌어집니다. 요셉이 죽었습니다. 힉소스 왕조가 다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이 히브리 민족은 그 땅에서 점점 학대를 받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노예가 되어서 매를 맞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뜨거운 태양 볕 아래 벽돌 굽기와 진흙 이기기, 돌 운반하기에 강제 동원을 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남아있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가장 규모가 큰 업적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중국의 만리장성입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는 애굽의 피라미드입니다. 그 피라미드 하나 건축하는데 240만개의 돌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돌을 가져다가 140미터 올려 쌓았으니 기계가 없던 시절에 그 고역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애굽에 있는 어린이들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피라미드를 정상까지 등산했느냐 못했느냐 인데 그것을 한 아이들은 "난 그것을 해냈다!"고 자랑을 합니다. 제가 그 피라미드에 갔던 날은 공휴일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아이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그 피라미드 정상 도전을 하는 것을 구경을 했는데, 발 하나만 잘못 디디면 떨어져 죽습니다. '다 해놓은 데를 기어오르는 것만 해도 기록인데, 기계가 없는 시절에 그것을 건축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떨어져 죽었겠는가?' 그때 그들은 비로소 인간됨의 가치가 자유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유를 호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자유가 지금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원해서 주어진 이 고귀한 자유의 가치성을 깨닫지 못하고 온갖 다른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과거 노예 생활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사람들이 말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애굽에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그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던 모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냐?" 민족 공동체가 총화를 이루어 창조적 건설을 해나가려면 국민 전체가 기억할 역사적 교훈이 필요한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겪은 과거 어두웠던 역사를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교육을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시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그 길에 보면 산에 즐비하게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서진 탱크, 장갑차들이 절대로 치워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국가시책으로 오히
려 보호를 받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저걸 왜 보기 싫게 지저분하게 저렇게 두었느냐? 학교 선생님들이 의무적으로 학급의 아이들을 데리고 그 현장에 항상 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중국에 1967년에 우리 나라는 주변 10개국이 합세하여 침략해 왔다. 그때 너희 아버지, 어머니가 이 탱크를 타고 생명을 걸고 이 자리에서 싸워주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산 역사의 교육 현장으로 그대로 두었습니
다.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600만의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서 6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놓고 물을 주어 가면서 기르고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이 소나무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히틀러에게 희생당한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600만을 상징하는 뜻이다. 과거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또 그와 같이 당한다." 150만의 어린이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지금 그 기념관에 가보면 150만 명의 어린이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365일 밤낮으로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6·25 동란의 때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다소 듣기 싫어하겠지만 민족수난사는 난 국가시책으로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역사에 보면 우수한 민족이 누구였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수난 역사를 이겨낸 민족, 그런 민족이 우수하게 되었고, 두 번째는 고유 문화를 지키는 민족, 세 번째는 미래를 향한 창조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 이 세 가지가 세상에 위대한 민족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수난 역사를 잊어버렸느냐? 이 노예 생활만 벗어나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유가 주어진 이 가치를 어찌 모르느냐? 사람이 한가지를 취하고자 하면 한가지는 희생시킬 줄 알아야 되지 않느냐?"
이제 우리나라에는 6·25를 기억할 수 있는 인구는 30%밖에 안됩니다. 당시 전 세계는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 혼란의 역사를 살았는데 그 혼란 속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은 서구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오늘의 남북한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진술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서구 문화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기독교 진리가 있어서 그 기독교 진리와 함께 대한민국이 그래도 오늘 이렇게 대한민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대한민국이 다른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다면 남한도 북한과 똑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민족적 수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오늘을 감사하는, 종이 되었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은 개인적 수난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개인적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차이는 있지만 다 있습니다. 아마 그러한 시간이 지금인 교우님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 살고 계신 현재만 같이 되었으며 원이 없겠다고 하시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그때를 우리가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은 마음의 풍요를 누리는 것인데 그 마음의 넉넉함은 비천에 처했던 나의 과거를 오늘에 비교할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골에서 보면 저 개천가에 장구벌레가 아주 보기 흉한, 징그러운 곤충이 있습니다. 주로 고요 있는 물위에 징그러운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다니는 곤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습한 데서 징그럽게 살다가 삼복 더위 때가 되면 뭍으로 기어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태양 볕이 장렬하게 내리쬐는 그 뜨거운 땅바닥으로 올라와서, 그것도 아주 반들반들한 납작한 돌멩이를 찾아서 그 위에 자기 몸을 엎드립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불덩어리같습니다.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구벌레는 그것을 참습니다. 그 자기에게 주어지는 신체적 뜨거운 고통을 참고 죽음을 택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습니다. 머리 부분에서부터 그 뜨거움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데, 잠자리가 됩니다. 잠자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날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개울가에 가서 반은 잠자리가 되고 꼬리는 아직 장구벌레가 되어있는 그런 곤충을 채집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나의 개인적 수난의 때는 언제였었는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갔던 경험은 언제였었는가? 그때를 기억하라!
마지막으로는 지금 종된 자를 기억하라 입니다. 과거 나의 수난 역사를 기억하고 그런 수난을 지금 겪고있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뜨거운 맛을 보면 그 길은 다시는 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본능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앞으로는 이 세상에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던 국가들이 다 무너졌는데 개혁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다시는 그 노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공산국가에 참 많이 여행을 한 사람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 이런 곳에 가서 음식점에 가서 그 노인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그분들이 그럽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음식점에 앉아서 이렇게 정치적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행복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국민들은 국토 방위나 경제력에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철저한 정신 무장을 갖추고 있음이 평가됩니다. 67년 전쟁 때 세계 뉴스에 보도된 사건을 보면, 아기를 가진 임산부들이, 임신한 부인들이 군인으로서 그것도 낙하산을 타고 내리면서 총을 쏘고 투하되었습니다.
왜 그토록 강해졌는가? 전 세계에서 여자들도 국토 방위, 군인의 의무가 있는 나라는 이스라엘뿐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과거의 그들의 수난 역사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또다시 종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처녀들도 다 군인이란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외롭고 불쌍한 이웃을 괴롭히지 말라. 그것은 너희도 과거에 그런 삶을 살았지 않았느냐? 네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므로 지금 종과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지금 네가 자유스럽고 풍요를 누리면 지금 그렇게 종과 같이 고난을 겪고 있는 자를 기억하라."
지금 여기 한국에도 맥도널드가 들어와서 이렇게 즐거운 식사를 하게 하는데, 지금 제 집 옆에 있는 맥도널드 집에 가서 물어봤어요. "혹시 이 감자가 미국에서 오는 거냐?" "네. 사실은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너무 비싸서 이럭저럭 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미국에서는 아이다호 감자여야만 그 맛을 냅니다. 그래서 미국 세계 전역에 맥도널드 체인점은 다 아이다호 감자를 쓰도록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다호 감자는 뭐, 미국사람들이 감자하고 고기하고 밀가루가 주식이 아닙니까? 아이다호감자는 배나 비싸고 맛이 제일 좋고 아이다호 감자로 만든 것은 깜빡 죽습니다. 감자가 주 생산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다호 주민들은 지금은 뭐, 캐가는 사람도 없어서 많이 없어졌다고 그래요. 옛날부터 그 주의 법으로 농사지어서 감자를 수확할 때 맨 마지막 밥 한 일 항은 수확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캐어 먹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수확이 끝난 밭을 찾아가면 언제나, 아주 그것도 밭이 깁니다. 한 고랑은 감자가 그대로 묻혀 있기 때문에 호미를 가지고 그것을 캐어다가 넉넉히 식량으로 삼아서 아이다호 감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체인점이 아이다호 감자여야만 씁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좀 흘려주어서 먹도록 하라. 너는 애굽 땅에서 그렇게 살았고 광야 40년 동안 주어먹으면서 살지 않았느냐?" 이럽니다.
저는 서구 사회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배울 것은 참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소속하고 있던 미국 장로교 PCUSA 교단에 제가 총회에 여러 번 대표로 참석을 했었는데 그 교단은 인종별로 보면 교인 중에 94%가 백인들입니다. 나머지 그 6% 속에 흑인 교회가 3∼4%가 됩니다. 그러면 그 교단에 98% 정도가 미국 사람들입니다. 그 2% 속에 한국 교회도 있고 중국 교회도 있고 일본 교회, 필리핀 교회, 월남 교회 등 다 그 2%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하나만 따진다면 0.×% 밖에 안 되는데 총회장을 뽑는데 숫자로 따져서 1%도 되지 아니한 대한민국 사람 이 승만 목사를 총회장으로 뽑았습니다. "당신 같은 목사가 우리 미국 장로 교단에서 이렇게 일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데 한국 목사가 보기에 이 총회를 당신이 한번 잘 이끌고 나가세요." 이거 없어요. 절대 다수의 표를 백인들이 주었습니다. "한국 목사님! 당신이 총회장을 하세요." 그런 역사를 제가 보고 제가 이승만 목사를 저희 교회에 초대해 가지고 여러 번 설교를 나누고 일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이게 무슨 정신이냐? 기독교 정신이란 말입니다. 소수를 무시하지 아니하는 정신! "가난하고 병들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라! 너희도 그렇게 살지 아니하였느냐? 지금 종과 같이 된 자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 6·25를 기념하는 이 주간에 과거에 우리 민족이 6·25 동란에 어떻게 살았는가? 저도 이 마을에 살면서 제가 살던 곳이 폭격 맞아서 잿더미 다 되고 갈 곳 없어서 방황하던 그 어린 시절을 기억합니다. 6·25를 기억하면서 국가관을 튼튼히 가지며 나 자신 개인 수난의 때를 기억해서 오늘을 감사하며, '그래도 오늘 내가 이렇게 임하는 위치에 있을 때 내 주변에 종과 같이 된 자를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속해서 오늘 말씀의 약속이 범사에 복을 내릴 것이다.' 이 약속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記憶)과 잊음의 은혜
신명기24:18-22 / 배진기 목사
하나님의 은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기억과 잊음이라는 두 얼굴입니다. 우리를 절대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진정 놀라운 은혜입니다. 더불어서 나의 죄와 허물을 잊으시고 기억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기 원하는 사탄도 하나님이 가지신 은혜의 두 얼굴을 사용합니다. 사탄은 기억의 은혜를 앙갚음의 원한으로 바꾸고 잊음의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바꾸어서 사용합니다.
우리가 기억과 잊음을 거꾸로 적용하게 하면 우리의 삶이 무질서와 혼돈으로 얽혀버리게 됩니다.
은혜와 감사의 조건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되지만 원한과 분노를 기억하는 사람은 스스로 폐인이 됩니다.
은혜와 감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배은망덕이 됩니다. 원한과 분노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기억과 잊음의 적용을 지혜롭게 하는 삶을 삽시다. 내일이 삼일절 102주년 기념일입니다.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입니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줄여서 기미운동(己未運動)이라고도 부릅니다.
3.1 운동은 약 3개월 가량의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900여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
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입니다.
3.1운동은 자유 대한민국 건국의 첫 걸음이 된 하나님을 향한 민족적 부르짖음이었고 하나님은 응답으로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국가적인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기억과 잊음에 대해 묵상해보고 우리의 삶을 점검해봐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베푸신 기억(記憶)과 잊음의 은혜를 감사드리며 삽시다.
저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기억(記憶)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記憶)해 주심이 은혜입니다. 이사야 44:21에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가슴 저리는 사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정말 감당할 수 없고 측량할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기억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의 은혜는 망각(忘却) 바로 잊음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3:25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 하셨고 히브리서 8:12에서도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억(記憶)과 잊음!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적절하게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들도 기억(記憶)과 잊음의 삶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아야 것들을 쉽게 잊어버림으로 배은망덕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항상 기념하면서 감사의 삶을 삽니다.
2. 기억(記憶)과 잊음의 은혜를 잘 조화를 이루며 삽시다.
모세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선포하면서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말고 기억(記憶)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18절에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고 시작한 교훈이 본문 22절에서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라고 반복되는 교훈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이하면서 3.1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놀랍고 큰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말고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서 이웃을 위해서는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어야 함을 교훈하였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로서 또 다른 약자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잊어버리고 포기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웃의 실수나 배신이 나 불성실을 우리도 잊어 주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좋은 비유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일만달란트를 빚졌으나 주인에게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한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탕감해주지 아니한 악에 대한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8:32-33에 이 비유의 교훈이 나옵니다.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에 감사드린다면 나 또한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 받았으니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허물을 잊어 주셨으니 나도 이웃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주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베풀기 위해서 때로 나의 소유를 다 챙기려고 하지 말고 잊어버리고 남겨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다 거두려고 하지 말고 일부러 잊어버리고 버려두고 남겨드는 일을 하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기억과 잊음의 조화가 잘 이뤄지지 않거나 그것이 뒤바뀌어 버리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기억과 잊음의 조화를 잘 이루며삽시다.
3.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민족적인 기억과 잊음을 분명히 정리하며 삽시다.
우리 한국 백성들에게는 많은 기억과 잊음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감격과 아픔이 뒤엉켜 있습니다. 3.1절도도 있고, 4.19혁명도 있고, 5.18 민주화 운동도 있고 잊어서는 안될 6.25 전쟁 기념일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건강한 민족이 되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억과 잊음의 정리정돈을 분명하게 하고 애국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한일합방의 국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일제의 압제36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이웃에 함께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는 우리가 지혜롭게 지우고 잊어야 합니다. 물론 일본이 행하였던 36년의 압제와 6.26 불법 남침으로 빚어진 이 나라의 파괴와 폐허의 아픔과 고통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일본 지도자들의 몰염치한 태도들과 북한의 행위들을 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일본에 대해 지혜로운 대처를 해나가야 합니다. 잊을 것은 잊고 이웃의 교제를 나누지만 기억해야 할 아픔들 조차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양보하며 수용하여 만든 모든 대화와 합의들을 하루 아침에 뒤집어 버리고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를 운운하며 온 세계를 위협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화해 제스츄어와 함께 우리 온 국민들을 기만하고 전 세계를 우롱하여 기묘한 탈을 쓰고평화를 추구하는 지도자인양 김정은이 쇼를 하고 있습니다. 그 쇼의 탈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진리의 원수입니다. 공산주의는 마지막 날에 세계 속에 등장할 적그리스도 운동의 정체임이 분명합니다. 교회는 마땅히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원수, 진리의 원수, 교회의 원수인 마귀의 도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이러한 공산주의가 행한 악한 일은 잊어 버려야 합니다. 속고 또 속이고 있지만 계속 속임을 다하더라도 우리는 본문의 교훈처럼 북한 주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 우방들과 이웃들의 도움과 협력을 기억합시다. 극히 작은 것들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감사의 삶을 확산시켜 나갑시다.
4. 개인의 삶에서도 언제나 기억과 잊음의 은혜를 구하므로 평강을 누리며 삽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 이야기들을 다 뒤로 던져 놓고 작은 어두움도 망각 속으로 던지지 못하고 움켜쥐고 스스로의 불행을 곱씹는 어리석음을 회개합시다.
어찌하든지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로 삽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부모님의 은혜. 가족들의 은혜, 이웃들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감사드리며 삽시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이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 마음속에 독이나 한을 품지않고 자유함을 누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자녀들이 기억과 잊음을 거꾸로 사용하지 않기를 기도드립시다.
우리의 삶에서 때때로 우리의 소유를 잊고 포기하고 던져 버리고 은혜를 베풀며, 손해보며, 양보하며 희생하며 삽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잊으심의 은혜에 대해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기억과 잊음을 잘 조화를 이루며 삽시다. 3.1절 102주년을 맞아 민족적인 기억과 망각의 정리정돈을 잘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 개인들의 삶 속에서 기억과 잊음의 은혜를 구하므로 평강을 누리고 삽시다.
이웃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신 24:19-22 / 안효관 목사
시골에 살던 할아버지 한 분이 서울에 사는 아들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공부를 시키고 이제는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런 것처럼, 아들 집을 찾아간 할아버지는 아들 집에서 별로 환영받은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아들 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손주였습니다. 아들 내외는 자기 자식들을 끔찍이도 위해주었습니다. 손주들이 그 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대접받는 사람은 며느리였고, 세 번째가 아들녀석이었습니다. 그러면 네 번째는 누구겠습니까?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님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는 그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였습니다. 아들 내외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들 챙기고, 그 다음에 가정부에게 강아지 밥 주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시골 할아버지가 가만히 보니 자신은 강아지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가정부였고, 마지막 여섯 번째가 할아버지였습니다. 가정부까지 다 챙긴 다음에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님을 챙기는 것입니다.
시골 할아버지는 답답한 서울 생활도 힘들었지만, 그 집에서 강아지나 가정부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시방석과 같아서 도저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내외가 직장에 출근한 틈에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가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3호야 잘 있거라. 6호는 간다."
갈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들이 사라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섬기는 일조차 무거운 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고사하고, 부모님께 부모님으로서의 예우를 해 드리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선생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부모님 생전에 효도를 다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애닯다고 후회해야 소용없으니, 살아 계신 동안에 잘 섬겨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할텐데, 우리 시대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노학자의 탄식이 결코 빈말은 아닐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태길 박사'의 글에 이런 탄식이 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효도의 의미를 스스로 깨달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들에게 효도의 바른 길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을 깨우치는 묘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섣불리 설교를 잘못하면 공연히 모양새만 우스워질 것이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느니 만도 못하다.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는 생각부터가 교만일지도 모른다. 대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는 현재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라고 믿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기도 하다."
어버이주일도 아닌데 웬 효도타령이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이나 신약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사회적인 약자를 우리 신앙인들이 책임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객과 고와와 과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동족 가운데서 객과 고와와 과부를 너희가 책임지고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열심히 땀흘려 농사를 지어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추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건 부스러기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벨 때에도 밭 모퉁이에까지 다 거둬들여서는 안됩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농사를 짓지 못해서 먹을 것을 수확하지 못한 객과 고아와 과부의 몫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농사를 짓긴 하였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거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나무를 추수할 때에도 어느 정도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포도를 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를 따지 말고 남겨두어야 합니다. 내가 추수하고 남은 떨거지는 다시 따러 가서는 안됩니다. 그건 내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 농토가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 몫을 포기할 줄 아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약 성경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양과 염소를 구별하실 텐데, 어떤 사람이 양이고 어떤 사람이 염소라고 분류되는가? 오늘 신약의 말씀에서 그 구분의 기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의 편에 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굶주리실 때에 먹을 것을 주는 사람, 주님께서 목말라 하실 때에 마실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그네 되셨을 때에 영접한 사람, 헐벗었을 때에 입을 옷가지를 주었던 사람이 칭찬 받을 양입니다. 주님께서 병이 들어 힘들고 외로왔을 때에 찾아와 준 사람, 주님께서 옥에 갇혀 고통스럽게 지낼 때에 면회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께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움을 처해 있다면 누구나가 다 주님을 돕고 싶어할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여러분을 섬기는 안목사가 그렇게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실 것인데,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모습으로 우리 눈에 띄였다면 누군들 도와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되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자신들은 주님께 그렇게 공궤하지도 않았었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작은 형제 한 사람에게 한 나의 행동이 곧 주님께 한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지극히 작은 자" "객과 고아와 과부"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인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가 곧 내니라"고 말씀하실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향해 눈을 돌려본다면, 지극히 작은 자가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곳에도 지극히 작은 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거대한 빌딩과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 돈 무더기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교회가 세워져 있는 우리 후포에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지극히 작은 자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바로 여기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제가 우리 후포중앙교회를 섬기게 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후포에 교회가 10개나 됩니다. 10개나 되는 교회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후포중앙교회를 세우셨고, 오늘날 이렇게까지 자라게 하셨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 후포지역에 있어야 할 존재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런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왜 교회가 10개나 되는 이 지역에 우리 교회가 있어야 합니까? 후포에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여기 후포중앙교회 교인이 되게하셨습니까?
우연히 된 것입니까? 교회를 세우다보니 우연히 후포에 세워졌고, 교회를 찾다보니 우연히 우리 후포중앙교회에 등록해서 지금까지 다니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후포중앙교회를 세우신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후포중앙교회의 교인이 되게 하신 데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후포에 있는 다른 9개의 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다른 9개의 교회를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게 '어른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여기에 세워주시고, 오늘날까지 인도하셨던 이유는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지역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절(寺)처럼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역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 지역이 그 교회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지역사회가 외면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지역사회가 외면한다면 그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후포가 우리 교회에 무엇을 필요로 한가를 깊이 있게 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 교회가 설 자리이고, 그게 우리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주신 이유를 바로 거기에서 찾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를 섬기지만, 우리 교회는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섬기지만, 여러분은 세상을 섬겨야 하고 우리 후포를 섬겨야 합니다.
지금 우리 후포의 인구가 약 1만명 정도 됩니다. 그 1만명 가운데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1,000명이 넘습니다. 우리나라가 2000년에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습니다.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7%를 넘어서면, 그 사회를 '고령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건 우리가 임의로 붙인 것이 아니라 유엔(UN)이 정한 기준입니다. 유엔은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에 7% 이상을 차지하면 '고령화 사회'(高齡化社會)라고 부르고, 14%를 넘어서면 '고령사회'(高齡社會)라고 하고,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超高齡社會)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미 2,000년에 노인인구가 7.1%를 넘어서면서 고령화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인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오는 2019년이면 노인인구가 14%를 넘어서서 '고령사회'로 들어가게 되고, 2026년이면 20%를 넘어선 '초고령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우리 후포는 이미 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후포에 와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이고 노인들이 많지 않는 곳이 없다고는 하지만, 우리 후포는 더욱 많이 느껴집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혼자 사시는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혼자 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나 다른 가족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른들이 너무 많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사시는 노인이 1985년에는 6.6%였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1995년에는 13.2%로, 10년 사이에 배로 늘어났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도 20%에 다다를 것입니다. 노인 5명 가운데 한 명이 혼자 외롭게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통계입니다. 아마도 우리 후포는 훨씬 더 그 비율이 높을 것입니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가장 힘든 부분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건강의 문제이고, 두 번째가 외로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왜 약장수가 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몰려듭니까? 왜 수십 만원씩 하는 그 비싼 약을 삽니까? 건강 때문이고, 외로움 때문입니다. 건강의 문제가 코 앞에 닥쳐서 어느 날 갑자기 잠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 분들은, 자식들이 준 용돈을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약을 사는데 펑펑 써버린 노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 박혀 있어야 하는 그런 외로움과 고독을 매일같이 반복해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는 분들은, 도시락을 싸 들고서 약장수 구경가는 어른들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종종 차를 타고 가다가 경로대학에 나오시는 할머니들을 만나는데, 인사를 하면 "우리 집에 들어와서 놀다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손길을 뿌리치고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돌아와야 할 때에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후포중앙교회를 이 후포의 중앙에 세워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린 그 외로운 어르신들, 병으로 인해 - 삶의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하며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살아가셔야 하는 그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지역의 어른들은 우리 교회가 책임져야 할 "객과 고와와 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행복한 노후, 건강하고 기쁜 노후의 삶을 살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계획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모두 한꺼번에 이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만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준비를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외롭게 사시는 분들을 찾아가서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3년 동안 경로대학을 운영해왔고, 이제 오는 13일이면 4년째 경로대학을 개강하게 됩니다. 경로대학을 열게 된 것도, 지역의 어른들을 섬기기 위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경로대학은 지역의 어르신들을 교회로 초청해서 그분들에게 노년의 기쁨을 드리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당으로 찾아오시는 분들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우리가 찾아간 바로 그 자리가 주님이 계신 자리이고, 우리는 거기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게 사시는 어르신들을 찾아 뵙는 것은 사실 주님을 찾아 뵙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교회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약한 자로, 외롭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바로 그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곳을 찾아갈 때에 우리는 교회당 안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그분들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이 천국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이튿날 청년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질문합니다. "목사님 어제 천국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도대체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천국을 보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네 그러세요. 그렇다면 제가 천국을 보여드리지요. 마을 어귀를 조금 벗어나면 가난하게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병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굶는 날이 많습니다. 그분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먹고, 옷을 가져다가 입혀 드리고, 약을 사 가지고 가서 드리십시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그분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천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보게 될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잔뜩 기대감을 품고 청년은 음식과 옷과 약을 가지고 가난한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옷을 갈아 입히고 약을 먹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천국을 본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목사님을 찾아가서 항의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였지만 저는 천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는 동안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천국은 바로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곳입니다. 약한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바로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할머니가 바로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나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내 작은 삶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모습이 보여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롭게 사시는 그분들을 찾아간다면, 우리는 그분들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분들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누구 나가 바쁘고 힘든 삶을 사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당에 나오지 못한 분들을 심방 가도 잘 만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사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주일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내가 주님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라면, 한 주일에 한 시간 정도가 결코 긴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한 시간이 다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나가다가 잠시 들러서 안부라고 물어보는 정도여도 좋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어르신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가 뵌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게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고, 우리 교회를 이 후포 지역에 세워주신 목적이라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힘드시겠지만, 또 바쁘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 하시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일에 여러분의 작은 동참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발걸음과 작은 몸짓이 언젠가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다가와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웃의 애타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작은 마음으로 다가가는 우리를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가슴으로 맞이하실 어르신들의 주름진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얼굴이 주님의 얼굴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
신명기 24:17-22 / 코너스톤교회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와 비슷하게 취급하는 세 부류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전쟁이 빈번이 일어났던 고대 사회의 경우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의학이 현대처럼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전염병이나 다른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면 가난하여 먹고 살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과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부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남편이 병으로 인해 죽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가정의 경제적인 면을 대부분 남자들이 짊어지는 시대였기에,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과부들은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가난한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아나 과부의 경우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고아는 나이가 어려 일할 수 없고, 과부의 경우 아이가 있어서 일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는 사회적 성차별로 인해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아 일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계층들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재판을 억울하게 진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신 24: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객은 나그네들을 의미합니다.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는 가장 약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이웃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바로 이런 자들을 향하여 계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이 환난에 처한 자들을 돌아보아 보호해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재판을 할 때도 이들이 가난하단 이유로 억울한 판결을 받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17절에 보면 이들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들의 옷을 전당잡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은 그냥 옷의 기능만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당시 겉옷은 가난한 자들이 덮고 자는 ‘blanket’ 역할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졌습니다. 만일 옷을 밤새 전당 잡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밤새 추위에 떨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의 필수품인 옷을 전당잡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추수할 때도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봅시다.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농부가 밭에 나가서 곡식을 베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곡식 한 다발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밭에 가서 잊어버린 곡식 한 다발 가지고 오는 것이 정상이고 상식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시 밭에 돌아가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하고 굶주린 나그네, 고아, 과부가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비심을 베풀 것을 원하십니다. 19절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자비심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형제, 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비롭게 행하는 것을 무척 기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20-21절도 같은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 24: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신 24: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20절은 감람나무를 떤 후에 남은 것까지도 모조리 가져 가려고 살피지 말고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는 명령입니다. 21절은 포도를 딴 후에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배만 채울 것이 아니라, 이웃들의 어려움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22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시절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신 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한 때는 그들도 가난했고, 굶주렸고, 헐벗었고, 연약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자비를 베푸사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봐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야 하는 차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갖는 것이 아니라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계속해서 물을 흘려 보내기 때문에 온갖 생물들이 싱싱하게 생명력 넘치게 살아 있습니다만, 사해는 물을 품고 있기에 물이 썩어 이름 그대로 죽은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을 흘려보내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로 우리 삶에 채워주실 것입니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
신 24:17-22 / 김철수 목사
하나님 인류 구속 역사 분명히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신 24:18)
성경은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방향을 틀어야만 사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은 인류 현주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왜 선택하셔서 인류를 구속(redemption)하시게 됐는지 그 이유와 진행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은 인간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야 살 수 있는지, 그 원초적 방향성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 전반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사망으로 끝난다는 엄연한 실존적 진실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철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의 불행과 죽음이라는 현실만큼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기에 결코 현학적 타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생의 숙제입니다. 특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과 삶의 이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생명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저 일상의 당연한 일로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를 비롯해서 복잡한 현실들이 우리 사회를 암울하게 만들고 우리 주변에서 슬프고 아픈 현실들을 함께 겪으면서,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주는 거짓 영광과 기복적인 소망에 빠지기가 쉽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경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이 신화가 아니라면 복잡한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감격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의 가슴에 다가와야 할 터인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거울로 삼고 그 앞에 우리 스스로를 비춰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하는 성경은 인간의 호기심을 다 채워줄 만큼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꼭 알아야 할 삶과 죽음의 비밀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매우 짧게 응축된 방식으로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 역사 속에 개입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당신의 선교를 시작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하신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첫 인류의 조상이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뒤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을 때에,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이 물으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어디 있는지 질문하며 그 첫 부분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이제 하나님 밖에 있게 됐고,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인 인류 모두에게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들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누구며, 지금은 어디 있느냐?”
아담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시각과 느낌은 너무 황당한 것들이었습니다. 선하게 창조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맡긴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스스로 ‘벗었다’는 느낌으로 수치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은 이렇게 인류의 유전자 속에 흘러들어 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고, 인간들을 당신께로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아담의 타락 후 바로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적 선교는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진행됐고, 그렇게 이스라엘은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타락한 인류의 상징적 대표지만 또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구속을 성취했고, 승천하신 이후 신약적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이스라엘이 가졌던 구약의 선교 사명을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부르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것(출 19:6)과 동일한 자기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시고 명하신 말씀들을 새겨들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오늘 신명기 24장 17~22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돌아보려 합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는 인종과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많은 면이 흡사합니다. 사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의 다른 민족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세대를 거듭하면서 애굽의 종살이를 했듯이, 다른 민족들도 나름대로 어딘가 누구에겐가 묶여 산 역사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섬기면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돌아보면 아프리카의 많은 민족들이야말로 이스라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까지, 즉 출애굽한 때까지를 430년(갈 3:17)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나그네 생활을 마친 뒤 애굽에 정착은 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서신서들과 복음서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영적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즉,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입니다. 그러기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와 삶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규범은-즉 모세를 통해 받게 된 소위 ‘율법’에 기록된 언약적인 삶은-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그분을 증거하고 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즉, 주변의 이방과는 구별된 삶, 소위 ‘거룩’이라는 말로 특징되는 그런 삶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가였습니다. 그들은 나그네였고 노예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 구원의 사실을 그들은 언제나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됐습니다. 옛날이야기로, 혹은 간증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을 사는 삶의 이유이며 동기가 되는 기억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진실로 겸허한 삶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형통할 때에도 애굽인들처럼 제국주의적인 자세를 갖거나 갑질을 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삶이 아니라, 언제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이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늘 긍휼히 여기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민족이나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신과 같이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당시 이방 민족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초민족적으로 긍휼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떤 삶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항상 기억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무리 번성하고 세상을 다 가졌다 해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민족답게, 본인들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야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역사서나 선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불행히도 과거를 잊은 그들의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자신들이 나그네였으며 애굽에서는 종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곧 거기서 불러내어 주신 하나님을 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급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20세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민족 중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까지 이렇게 성장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교회들도 20세기 부흥의 신화를 쓸 만큼 놀라운 성장을 했습니다. 선교사 파송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구 비례로 본다면 아마 세계 1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것이 멈추고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들과 해외 선교도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서 팬데믹이 끝나고 ‘돌아가기’ 혹은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회복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것은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돌아가고 회복할 무엇이 분명히 있습니까? 아니면 성장인지 거품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그 어떤 가시적인 힘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우리의 구원과 구속의 감격스런 과거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 겸비하고 있나요? 혹시 정말 기억해야 할 그 가슴 벅찬 과거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요? 과연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 그분의 도구로 바른 길을 가고 있나요? 포스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맞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허하게 우리를 깊이 돌아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