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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감산사 미륵보살,아미타불 국보 제82호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다음 해인 720년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로나자불
철불
철불
불두
불두
불두
반가사유상
쇠북
천흥사 종 국보 제280호 고려 1010년, 높이 1.283m, 국보 제280호, 원래 충남 천안군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쇠북과 쇠북걸이
동종
청동 북
인도 네시아 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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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불상들
힌두 문학의 절정- 라마야나(산스크리트어로 라마가 나아간 길)
보관을 쓴 부처
비슈뉴
부처의 생애가 표현된 비상
스승으로서의 시바
반가 사유상
염거화상 탑
국보 제104호
안창리의 흥법사지(興法寺址)에 있었던 것을 탑골 공원으로 옮겨왔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있다. 부도 안에서 발견된 금동제 탑지(塔誌)에 의하면 염거화상의 유골을 담은 탑으로 844년(문성왕 6)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부도 중 절대연도를 가진 가장 오래된 예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로 현재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네모난 지대석은 뒤에 보수한 것이므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며, 그 위에 놓여진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석의 각면에는 형태가 다른 다양한 모습의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안상(眼象) 안에 삼족(三足)이 달린 향완을 비롯해 꽃무늬[花紋] 등 여러 가지 장식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표현하고 그 윗면에 높은 받침대를 두어 8각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받침대의 각 면에도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연화좌에 앉아 있는 비천상을 1구씩 배치했다. 탑신은 앞뒷면에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비(門扉)를 양각하고, 양쪽으로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창·탑 등을 쥐고 있는 무장형(武將形)의 사천왕상이 입체감 있게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옥개석은 서까래·추녀·기왓골·막새 등이 모각되어 있어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추녀 끝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랫면에는 비천상을 조각했다. 이 부도는 탑신부와 기단부의 비례가 잘 맞아 전반적으로 안정된 균형감을 이루고 있고 조각상이나 장식문양에서는 통일신라 전성기의 조각양식이 보이는 것으로 이후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8각원당형 부도의 모본이 되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 탑
보물 제362호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진경대사의 사리탑으로, 탑비와 함께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1919년 경복궁으로 옮긴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전형적인 8각 부도이지만 표면의 조각은 적은 편이어서 재료의 빛깔과 아울러 청초한 느낌을 준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있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 또한 8각으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무늬의 바닥선이 불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북모양으로 중앙의 곳곳에 꽃송이를 새긴 후 이를 도드라진 띠장식으로 연결시켰다. 윗받침돌에는 연꽃 8송이를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높고 큰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은 8각의 굵직한 지붕선이 꼭대기에서 아래로 이르렀으나, 끝에 달려있던 꽃장식은 모두 부서졌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한 돌로 조각하였다.
만들어진 때는 진경대사가 입적한 해인 신라 경명왕 7년(923)으로 추정되는데, 아래받침돌의 안상에서 이미 고려시대의 특색이 보이고 있다. 기단 가운데받침돌이 낮고 작은 것이나 탑신의 몸돌이 가늘고 긴 것에 비해, 지붕돌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의 균형을 잃고 있다. 조각수법이 강하지 않고 전체 형태가 길쭉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
보물 제361호
고려시대 초기의 승려인 여암(麗巖)의 탑비
939년 건립. 높이 350㎝. 국립 중앙박물관 소재.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미지산 보리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비좌(碑座)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비례가 맞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을 따르고 있다. 머리는 용의 머리로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등에는 6각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둘레에는 연사상문양대(撚絲狀紋樣帶)가 돌려져 있다. 비신(碑身)의 제목은 "高麗國彌智山菩提寺故敎諡大鏡大師玄機之塔碑銘幷序"이며, 내용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이환추(李桓樞)가 구양순체로 썼다. 이수는 제액(題額)을 중심으로 구슬을 다투는 2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대경대사는 880년에 헌강왕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당나라의 운거대사(雲居大師)에게 심인(心印)을 얻어 귀국한 뒤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다. 930년 2월 17일 보리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제자 최문윤(崔文尹)이 939년에 건립한 것이다.
흥법사진공대사탑부석관
보물 제365호
진공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과, 그 옆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함이다.
본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었으나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부도는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보물 제190호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현재 탑은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부도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개성 현화사에 있던 석등과 배례석
보신각 종
보물 제2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첫댓글 가본다 하면서 못가봤는데..볼것이 많군요.
불교문화유적을 보려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봐야겠네요.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